107화. 섬망
(107/129)
107화. 섬망
(107/129)
107화. 섬망
2023.06.08.
밤하늘이 하얗게 물들었다.
섬광이 번뜩이고 이어진 굉음에 시온은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의 노호가 잦아들자 다시 잔잔한 빗소리가 울렸다.
그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시온은 엉망으로 뒤섞인 기억을 갈무리하기 위해 주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이곳은 호밀밭이 있는 마을, 남쪽 숲의 오두막. 그 애와 비를 피하려고 들어왔다.
그 애는 이비. 여기, 내 옆에 있다.
고개를 돌리자 무릎을 끌어안은 소녀가 보였다.
그 모습에 왠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비가 저대로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왔다.
그래서 이비를 부르려다가 멈췄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마땅한 호칭은 아마도 아리아테 양.
하지만 차마 그렇게 부를 수 없어 당신이라는 말로 얼버무려 왔다.
그러다 널 찾던 날 저도 모르게 외쳤다. 내가 아니라 그 남자가 부르던 것처럼 이비, 라고.
끝내 부를 말을 고르지 못해 어깨를 건드렸다.
이비가 스르르 무너지는 모습에 심장이 다시 내려앉았다.
두려움에 숨을 멈췄다가, 이비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는 걸 본 후에야 시온은 현실로 돌아왔다.
‘젠장…….’
잔상에서 벗어난 시온은 질린 기분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새 식은땀을 흘렸는지 손이 축축했다.
시온은 한차례 진저리를 내고서 이비를 다시 바라보았다.
찬비를 맞아 노곤했는지 이비는 불편하게 쓰러진 채로도 얌전히 자고 있었다.
시온은 망설이다가 이비를 고이 눕혔다. 그러곤 흘러내린 모포를 제대로 덮어 주었다.
장작이 타닥댈 때마다 이비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움직였다. 짙은 음영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평온해 보였다.
‘잘 자네.’
정말 얄밉게 잘도 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어느 정도 진정된 줄 알았는데, 시온의 가슴은 아직도 쿵쿵 뛰고 있었다.
이비가 곁에 있기 때문인지 비와 어둠 때문인지 옛날 일이 계속 떠올랐다.
아니, 옛날 일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건 지나간 일이 아니라 다가올 일.
많은 것이 뒤바뀌어 불확실해진 가능성.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허상이자 그럼에도 예정된 재앙.
또한 그것은 오직 시온만이 기억하는 그를 미치게 하는 악몽이었다.
.
.
.
아직 도래하지 않은 315년.
실은 이미 몇 번이고 찾아왔으나 어디론가 사라진 그해 겨울에 세상은 멸망한다.
경계의 검은 땅부터 사라진다.
그럼 깊이 잠들었던 용도 깨어나고 그 용이 토해 낸 천 갈래의 벼락이 동쪽 하늘에 넘실댄다.
그래서 온 세상이 성녀를 동쪽으로, 벼랑 끝으로, 사지로 밀어 놓고 갸륵하게 기도한다.
신이여 우리를 구하소서.
한 여자가 미쳐 날뛰는 재앙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구원을 촉구한다.
그런데 정말 믿었을까?
정말 믿었다면 그 여자만 용의 아가리로 밀어 넣을 게 아니라 구원과 기적을 목도하고자 다 함께 왔어야지.
어쨌든 여자는 동부로 끌려가고 구시대의 유물도 연인을 위해 나선다.
하지만 라우렐 백작은 제정신일 때보다 인형일 때가 훨씬 쓸만했던 모양이다.
그 모자란 남자는 형편없이 무너지고, 족쇄가 풀린 새벽의 왕은 동녘을 벗어난다.
그리고 여자와 세상을 죽여 종말을 이룬다.
그렇게 끝나는 게 차라리 나았을까.
하지만 티엔다비스는 그 자체로 종말의 번외, 어쩌면 인간을 괴롭히기 위한 고문의 연장.
그래서인지 그 남자에게도 바란 적 없는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정신이 드나?”
익숙한 목소리에 시온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눈앞에 선 여인을 보고 소리 없이 신음했다.
그를 깨운 사람은 그의 연인, 한결같이 차갑고 아름다운 이비 아리아테였다.
직전까지 폐허에서 뒹굴며 절규하던 시온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겨를도 없이 이비를 끌어안았다.
미친 용의 숨결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었다. 이비도 그 빛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그 광경을 직접 보고 절망하던 시온은 왜인지 멀쩡하게 이비를 다급히 살폈다.
그리고 괜찮은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다가 제 목을 움켜쥐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성대를 갑자기 움직인 탓이었다.
“혼란스러운가?”
이비가 그를 밀어내더니, 무심한 투로 말했다.
“너는 시온 라우렐 백작. 아마네세르를 떨어트리기 위해 경계의 총사령관으로 차출된 라우렐 대공의 서자. 10년 전 전당에 내려가자마자 저주받았고 3년 전 아마네세르가 침묵한 후에도 경계 감시를 지속하다가 보름 전 티엔다로 귀환. 그리고 방금 전에 저주가 풀렸어.”
이비의 단조로운 음성에 시온은 그대로 숨을 멈췄다.
그러곤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하늘로 가득 찬 창문이 보였다. 그 하늘은 벼락도 멸망도 없이 파랗게 평화로웠다.
시온은 이 순간이 이비와 처음 만나던 순간인 걸 금세 깨달았다. 그의 금발은 길이가 제각각인 채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꿈을 꾸는 건지, 아니면 이제 막 꿈에서 깬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워하며 이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를 관찰했다.
그러길 얼마, 시온은 머지않아 확신했다.
종말의 끝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을.
그 남자는 기뻐했다. 안도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한없이 감사했다.
그리고 연인의 죽음과 멸망을 다섯 번 더 경험한 후에야, 이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것을 깨달았다.
그 남자는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었지만 끝내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지 못했다.
대신 같은 시간을 반복하며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이비 아리아테의 연인이 아닌 것을.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도.
그럼에도 남자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한번 좋아하면 꼬리를 멈추지 않는 값싸고 우스운 성미 탓이었다.
어쩌면 사랑받으며 곱게 큰 도련님의 해맑은 용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남자는 도전하고 다시 도전하며 죄를 짓고 업을 쌓으며 천천히 망가졌다.
그러다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
정말이지 영리하지 못한 개였다.
.
.
.
시온은 그 남자가 싫었다. 멍청하고 맹목적이고 구차해서.
시온은 그 여자도 싫었다. 냉정하고 음험하고 이기적이어서.
시온은 자기 자신도 싫어한다. 치졸하고 우유부단하고 여전히 이비가 안 보이면 겁에 질려 찾는 꼴이 그 남자와 다를 바가 없어서.
이 와중에 비는 지겹게 내렸다.
시온은 고요히 잠든 이비를 바라보다가 혼자 돌아갈까 생각했다. 물론 정말 이비를 두고 떠나지는 못했다.
서성이다 지친 시온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대로 선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그가 아직 소년일 때의 꿈이었다.
소년은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아무 기약 없이 온 세상을 헤매고만 있었다.
아직 만난 적도 없는 너를 잃었다는 생각에 슬피 울며 찾았다.
그게 너무 외롭고 힘들어 텅 빈 하늘에 대고 말했다.
나는 너를 모른다고, 나는 그 남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나 혼자 절박한 게 죽도록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년은 정말 어쩔 수 없이 간절했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너를 찾았다.
짧게 잠이 들면 꿈에서까지도.
***
시온은 새소리에 눈을 떴다.
빗소리도 얕게 들려왔고 주위는 어스름히 밝았다.
아직 잠이 덜 깨서 멍하니 낯선 천장을 쳐다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곤히 잠든 이비가 보였다.
그래서 시온은 몸도 그쪽으로 돌렸다. 그러곤 이비를 품에 담으며 꼭 끌어안았다.
시온은 이비의 머리에 뺨을 기댄 채 잠시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왜 꿈이 아니지?’
시온은 대단히 당황했지만 이미 걸어 잠근 팔을 푸는 대신 침착하게 생각했다.
왜 두 팔에 실존하는 질량이 느껴지는 것인가.
왜 세상은 내게만 이렇게 모질고 사악한 것인가.
잠이 확 달아난 시온은 정신적으로 허우적대며 간밤의 기억을 가지런히 줄 세웠다.
그러곤 이비와 나란히 잠든 것 외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네 번쯤 확인하고서야 이비의 등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시온은 실수를 덮기 위해 최대한 신중히 물러났다. 그런데 잘 자던 이비가 돌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시온은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이비가 아직 자는 걸 알고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도 다시 불안해져 이비에게 자냐고 세 번쯤 물어보고 대답이 없는 것에 재차 안심했다.
그러곤 금세 또 다른 번뇌에 시달렸다.
‘얜 왜 이렇게 무방비하게…….’
숙녀의 몸가짐 어쩌고 하는 고루한 소리를 할 마음은 없지만, 이래저래 위험한 행동은 피하는 게 마땅하다.
그래서 시온은 이비가 너무 대책 없이 군다고 생각하다가 불길한 의심을 떠올렸다.
‘……정말 무방비한 건가?’
방심할 수 없다. 상대는 이비 아리아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비는 시온이 자기 집사를 견제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 신경도 안 쓰다가 자기가 필요하니 냉큼 써먹었지.
그 일을 떠올린 시온은 새삼 오싹해졌다.
‘어디까지 눈치챈 거지?’
시온은 이비의 획기적인 머릿속을 궁금해하다가, 문득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어젯밤 이비는 시온을 향해 눈을 질끈 감았었다. 그가 잠시 흔들린 걸 눈치채고 한 짓이 분명했다.
‘젠장……!’
시온은 그 일을 떠올리고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거기서 눈을 감다니,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허락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게 전혀 애틋하거나 설레지 않았다.
도리어 이비의 적반하장에 어물쩍 추스른 화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저 괘씸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불쾌했다. 아니, 마음이 상했다.
어제 이비는 지나치게 상냥하고 귀여웠다. 그런데 그건 전부 시온이 뭘 바라는지 알고서 한 행동이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이 정도는 줄게. 그러니까 너도 내가 원하는 걸 줘.
시온은 이비의 모든 행동에서 이런 의도를 읽었다.
애당초 이비는 그걸 숨기지도 않았다.
관계 또한 거래의 일종이니 나는 이렇게 주고받겠노라, 너도 싫지는 않을 테니 잘해 보자. 계속 이렇게 제안해 왔다.
그 여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면만 해맑게 바뀌었을 뿐, 이비 아리아테는 결국 이비 아리아테였다.
시온은 더 이상 이비의 옆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어나 앉자 시온의 팔을 놓친 이비가 비로소 잠에서 깼다.
이비는 눈을 뜨자마자 시온이 보이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놀라기는커녕, 졸린 눈을 비비며 그를 향해 웃었다.
그 모습에 시온은 숨이 턱 막혔다. 그래서 목이 졸린 심정으로 묻고 말았다.
“왜 웃습니까?”
“기분 좋아서요.”
그 솔직함에 시온도 결국 옅게 웃었다. 이비는 전혀 모르겠지만, 시온 정말 화가 났을 때 차갑게 웃는 사람이었다.
“내가 의도대로 움직여서 만족스럽습니까?”
“네, 보람차고 좋아요.”
“그럼 다음 계획은 뭐죠?”
“일단 말투부터 착하게 고치고 나머진 차차 고민해볼게요.”
시온은 거기까지 듣고 입을 다물었다.
시온의 질문이 끊기자 정적이 흘렀다. 이비도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시온은 내친김에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당신, 사람을 좋아하는 법을 알고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