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구원받아 사랑하게 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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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구원받아 사랑하게 된 이야기
2023.06.05.
그날로 시온의 낯가리기는 끝났다.
덩달아 세상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는지, 이비가 가져다 놓은 책을 그제야 슬쩍슬쩍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책은 몬트라 가문에서 해마다 발행하는 티엔다비스의 연혁집이었다.
그 안에는 티엔다와 비스의 역사가 꼼꼼히 기록되어 있어서, 시온이 놓친 시간을 따라잡기에 그보다 좋은 자료는 없었다.
이비가 가져다 놓은 연혁집은 시온이 경계로 내려간 304년부터 작년인 313년까지의 분이었다.
우선 307년까진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티엔다 귀족들의 동향, 비스의 가뭄과 작황, 밤의 일족에 대한 보고, 전염병 유행 등이 주였다. 시온이 태풍을 깨트렸다는 기록도 두어 줄 있었다. 여기까진 시온이 익히 알던 세상이었다.
그런데 6년 전인 308년부터 이 단조롭게 갑갑한 세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 시작은 한 소녀의 등장이었다.
―308년 마냐냐의 계절.
―탑주 로히카 세드로가 비스에서 마냐냐의 현신 발견.
―이름은 이비 아리아테. 18세 여성.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
―이비 아리아테가 탑에서 노래함. 마냐냐와의 공명 관측. 마냐냐의 빛 발현. 이비 아리아테의 머리카락 변색 발현. 호수 정화에 13분 소요.
―마냐냐 탑이 성녀 로블레 투하의 임기를 조기 종료, 이비 아리아테를 새로운 성녀로 발탁.
아니나 다를까 이비의 기록은 시작부터 비범했다.
다만 이비의 비범함을 이미 아는 시온은 살짝 엉뚱한 부분에 놀랐다.
‘비스 출신이었어?’
아리아테라는 성이 영 낯설었는데, 밑 대륙 출신이면 그가 모를 만도 했다.
시온은 이비가 비스 어느 지역 귀족인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없었다. 대체 누구의 의도인지, 이 기록은 이비를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신화의 도입부처럼 의미심장했고, 실제로 이비의 이어진 행보는 경이로웠다.
―308년 타르데스의 계절.
―마냐냐 탑이 정화식 주기를 40일에서 15일로 단축.
―성녀 이비 아리아테가 호수를 정화.
―성녀 이비 아리아테가 호수를 정화.
―성녀 이비 아리아테가 호수를 정화.
―309년 어스름 시작의 계절.
―마냐냐 탑이 비스의 댐 건설을 위한 회의 주재.
―마냐냐 탑이 정화의 소금 분배 방침 수정. 바옌 군 우선 지원 결정.
―바옌 군이 밤의 일족 소탕 계획 발표, 내달 실행 예정.
―309년 어스름 끝의 계절.
―바옌 군이 밤의 일족 소탕 성공을 공표.
―세드로 가에서 성녀 이비 아리아테에게 백작위 및 비스 남부의 영토 수여.
불과 1년이었다.
이비는 등장한 지 단 1년 만에 이 불완전한 세계의 결함을 고쳤다.
이비의 압도적인 정화력으로 대륙 구석까지 강줄기가 뻗어 나갔다. 정화의 소금이 넉넉히 생산되며 반역의 용이 흩뿌리고 간 저주도 그 위세와 서슬이 꺾였다.
밑 대륙에 안정이 찾아오자 높은 데서 젠체하던 티엔다 귀족들도 은근슬쩍 비스로 눈을 돌렸다.
그로써 용에게 미움받던 세상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310년 어스름 시작의 계절.
―탑주 로히카 세드로와 성녀 이비 아리아테가 타르데스 전당 및 동녘의 경계 시찰.
―311년 마냐냐의 계절.
―탑주 로히카 세드로와 성녀 이비 아리아테가 타르데스 전당 및 동녘의 경계 재시찰.
―아마네세르 44일째 침묵. 관측 이후 최장기 침묵.
―아마네세르 52일째 침묵.
―311년 타르데스의 계절.
―아마네세르 80일째 침묵.
―아마네세르 150일째 침묵.
―마냐냐 탑이 성녀 이비 아리아테를 ‘용에게 목소리를 전하는 자’로 공표, 아마네세르의 수면기를 공식화.
‘이거였구나.’
시온의 쓸모가 사라지고 라우렐의 위상이 땅에 처박힌 계기.
시온은 자신과도 밀접한 기록을 찬찬히 다시 읽었다.
티엔다비스에 물이 풍족해지자, 이비와 로히카는 눈을 돌려 동녘의 경계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친 용마저 길들였다. 감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도 이비는 노래했다고 한다.
티엔다비스의 가장 실질적인 위협이 얌전해지자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처음 얼마간은 혹시 몰라 경계 감시도 지속했다.
하지만 평화가 이어지자 사람들은 차츰 무뎌졌고, 라우렐의 권위도 덩달아 녹아내렸다.
쓸모가 사라진 라우렐은 하루아침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 옛 영웅에 대한 예우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티엔다의 저울은 냉혹해서 무가치한 것에 무게를 굳이 더해 주지 않았다.
시온은 이 야멸찬 사회가 새삼 씁쓸했지만, 이 역시 기꺼이 이해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가치 있는 것을 취하고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행위의 반복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해 이 당연한 규칙을 따른다.
라우렐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군림한 것도 순전히 이러한 규칙 때문이었다.
그러니 더 특별한 가치를 지닌 누군가가 등장했을 때 왕좌를 빼앗기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비는 그렇게 왕좌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때 이비는 단지 인기 높은 성녀가 아니라 구세주, 신의 대리인 수준으로 떠받들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비는 그저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후 이비의 행보는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311년 어스름 시작의 계절.
―마냐냐 탑이 동부령의 소유권을 주장.
―대귀족 투표로 타르데스 전당을 제외한 동부령이 마냐냐 탑에 귀속.
―마냐냐 탑에서 광맥을 찾기 위한 조사단 파견.
―312년 어스름 끝의 계절.
―조사단이 비스 왕정 시대에 건설된 광산 다건 확보.
―마냐냐 탑에서 몬트라 후작가 외 다수 가문에 광산 위탁.
―312년 마냐냐의 계절.
―마냐냐 탑이 비스 남부 폐허 재건 계획 발표.
―마냐냐 탑이 비스 북부 유적 발굴 계획 발표.
동부에선 원래 철이 났다. 하지만 아마네세르 때문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는데, 그 용이 침묵하며 인간은 300년 만에 광맥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모든 건 탑을 통해서였다.
대륙의 수호자랍시고 태만하게 왕 노릇이나 하던 라우렐과 달리 마냐냐 탑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장악했다. 그러곤 용의 억압을 핑계 삼아 미뤄 둔 숙제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시온은 마냐냐 탑의 행보가 당연히 로히카의 의지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하지만 그다음 계절의 기록을 보고 자신의 편견을 깨달았다.
―312년 타르데스의 계절.
―성녀 이비 아리아테가 카셀 몬트라의 후작위를 박탈, 비스로 추방.
시온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책으로 얼굴을 덮은 채 속절없이 쓰러졌다.
‘심장 아파.’
시온은 긴 소파에 엎어진 채 잠시 흉통을 견뎠다.
심장이 또 쿵쿵 뛰고 있었다.
이비가 생각보다 더 멋있어서, 연정에 경외가 섞이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젠 이비를 떠올리기만 해도 바다를 처음 봤을 때처럼 벅찰 지경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가슴이 이렇게까지 뛰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낯선 괴로움을 애써 추스르는데, 문가에서 내리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왜 여기서 자는 거야?”
오전 일정을 끝내고 잠시 쉬러 온 이비의 목소리였다.
이비가 자신의 소파에 늘어진 시온을 향해 냉랭히 말했다.
“피곤하니까 네 방으로 가.”
매몰찬 구박에 시온이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더니 긴 다리로 제 앞을 지나가던 이비의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
방심하고 있던 이비는 그대로 소파에 엎어졌고, 그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온을 쳐다봤다.
“피곤하다며.”
이비가 눈으로 온갖 욕을 했지만 시온은 당당했다.
“피곤하면 쉬어야지.”
아니, 뻔뻔했다.
사람을 넘어트린 주제에 놈은 무척 생각해 주는 양 말끔하게 웃었다.
이비는 그 어이없는 놈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따끈하게 데워진 소파에 등을 대고 누웠다.
“신발 벗고 쉬어.”
“귀찮아.”
“벗겨 줘?”
“알아서 해.”
시온은 알아서 하라는 말에 힘입어 이비의 신발을 손수 벗겼다.
그러더니 편히 누울 수 있게 이비의 두 발을 제 무릎에 올리고 어째서인지 이비의 발목을 드레스 자락으로 꽁꽁 묶다가 기어이 걷어차였다.
시온이 강아지처럼 발치에서 사부작대자, 이비가 눈을 감은 채 중얼댔다.
“곱게 크긴 했나 보네.”
“부정하지 않겠다.”
심지어 돌아온 대답이 퍽 귀여워 이비는 한숨만 반복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굴속에서 으르렁대던 주제에, 시온은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자마자 아주 건방지게 요망해졌다.
삶이 송두리째 무너진 직후인데도 그는 다시 타인을 믿었다. 이미 인정한 감정을 숨기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았고, 자기 사람에겐 은근슬쩍 애교를 부리는 면도 있었다.
이비는 시온의 그런 면을 내심 신기하게 여기는 듯했다.
“내일부터 며칠 자리 비울 거야.”
“나도 데려가.”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하고 싶은 게 많을 나이니까……?”
그러니까 이런 면에서 넉넉히 사랑받고 자란 도련님의 티가 났다. 그는 자신의 애정과 희망이 거절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직접 보고 싶어.”
게다가 굴에서 나온 이후로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숨지도 않았다.
결국 몇 번의 논의 끝에 이비는 시온을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다행히 아름다운 라우렐 백작은 성녀의 호위로 부족함 없이 잘 어울렸다.
시온은 이비와 함께 세상 곳곳을 다녔다.
그리고 보았다.
존재 자체로 세상의 구원이자 축복인 이비의 위대함과 찬란함을. 그리고 정의로움을.
그렇게 함께 지낸 지 어느덧 1년.
시온은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된 이비에게 작별을 고했다.
“대공 가로 돌아가겠다고?”
되묻는 순간에도 이비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냉랭했다.
하지만 시온은 이제 이비의 희미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이비는 나름 놀란 표정이었다.
“이제 와서 왜?”
“내 지분을 받으러. 상속받을 것도 있고 보상받을 것도 있고, 조카도 데려와야지.”
“조카라면 하르딘 라우렐의 둘째 아들?”
시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의 저주가 풀리며 라우렐 가의 비밀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니 시온의 뒤를 잇기 위해 태어난 그 아이는 말귀를 알아듣는 순간 자신의 탄생 비화부터 듣게 될 것이다.
“자길 버릴 작정으로 낳은 아버지를 기른 정 때문에 미워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건 가혹하니까. 차라리 같은 처지인 사람이 키우는 게 나을 거야.”
“그래, 잘 가.”
시온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비는 순순히 끄덕였다.
시온은 이번에도 이비의 희미한 감정을 읽었고, 그래서 안심한 듯 웃으며 이비를 끌어안았다.
“뭐야?”
“자리 잡으면 청혼할게.”
“내세울 지위가 생기면 여자를 얻을 수 있다, 뭐 이런 건가?”
“얼굴만으로 성녀의 남편이 됐다는 불명예는 피하자, 뭐 이런 거.”
“누가 맘대로 남편이래.”
이비가 싸늘히 반박했지만 시온은 여상히 웃으며 이비에게 입을 맞췄다.
시온은 아직 이비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비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 믿었다.
그동안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품에 안은 수가 이미 셀 수 없어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다.
시온에게 이비는 구원자이자 주인이며 가장 존경하는 친구였다. 동시에 단 한시도 그의 마음에서 멀어진 적 없는 불멸의 연인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약속했다. 영원히 너와 함께 하기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키기로.
여기까지만이라면 그저 다행인 이야기.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구원받아 사랑하게 된 이야기.
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아름다운 결말을 허락하지 않아서, 얼마 후 너는 죽고 세상은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