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함정에 빠진 백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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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함정에 빠진 백작님
2023.05.15.
“단지 빚이면 그렇게 열심히 찾을 필요 없잖아요.”
비에 젖어 덜덜 떠는 주제에 입만 산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덩달아 비를 맞은 시온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백작님을 기다렸어요.”
화를 내던 시온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이비는 가련히 젖은 채 시온을 바라보았고, 시온은 그 모습을 마주 보다가 한숨만 길게 뱉었다.
“일단 돌아가죠.”
시온이 곱지 못한 투로 이비를 채근했다. 하지만 이비는 나무 둥치에서 발을 떼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아까보다 더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그래서 시온은 다시 혀를 찼다. 이 비를 다 맞으며 숲을 지나는 건 확실히 가혹했다. 게다가 이비의 뺨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온이 그 처량 맞은 꼴을 보며 인상을 쓰자, 이비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 피할 곳을 알아요.”
이비가 흘리듯 말하자 시온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비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그래서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보려다 구차함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 이비를 찾으러 온 이상, 함정을 눈치챘다고 한들 피할 길은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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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두 사람은 숲속에 놓인 자그마한 오두막을 발견했다.
시온은 그 오두막의 문고리를 당겨 보고 이비를 쳐다보았다.
“잠겨 있네요.”
그러자 이비는 고개를 갸웃대며 그를 쳐다봤다. 마치 ‘그런데요?’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온은 그 순진한 얼굴에 떠밀려 결국 문고리를 부숴 버렸다.
문이 열리고 오두막 안의 안락한 공간이 드러나자 시온은 만감이 교차했다.
시온은 어째서인지 그 남자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8년 전 비가 오던 날, 그 남자도 이비 때문에 이 오두막의 문을 부순 적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 남자의 무단침입을 답습하게 됐지만, 이 처지에 환멸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달달 떨던 이비가 결국 재채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 소리에 시온은 잡생각을 미루고 일단 움직였다.
그는 벽난로에 장작부터 던져 넣었다. 하지만 습기를 머금은 나무는 잘 타지 않았고, 그는 혀를 차며 벼락을 떨궜다. 파직 소리가 나더니 곧장 불길이 일어났다.
“그, 그때도 이렇게 불을 지핀 거예요?”
어느새 옆으로 온 이비가 턱을 덜덜 떨며 물었다.
“소, 속았어요. 어른은 굉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비가 헛소리를 재잘댔지만 시온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두막 구석으로 가서 수건과 모포를 몽땅 꺼내 왔다. 그러곤 이비에게 떠넘기기 전에 바닥에 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망토를 눈짓했다.
이비는 흠뻑 젖은 망토를 순순히 벗었다. 그래서 시온은 움찔했다가 이를 악물었다.
이비는 망토 안에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이미 다 젖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도 벗는 게 낫겠네요.”
시온이 마지못해 중얼대자 이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절했다.
“거기까진 싫어요.”
“……싫으면 싫은 거지 거기까지는 뭡니까.”
시온이 정색하며 지적했지만, 이비는 듣는 척도 안 하고 그를 매도했다.
“어떻게 벗으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세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시온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이비를 쳐다봤다.
애당초 이런 상황을 만든 게 누군데.
왠지 억울해진 시온은 더 휘둘리기 싫어서 냉랭히 말했다.
“싫으면 관두던가. 툭하면 앓아누우면서 괜한 고집…….”
하지만 시온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이비가 시온을 보며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시온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무심코 한 말이 이비가 감기에 잘 걸리는 걸 알고 한 말인 걸, 그리고 그 사실이 이비를 또 한 번 기쁘게 만들었다는 것도.
잠시 새침하게 굴던 이비는 해맑게 웃으며 시온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이비는 기쁜 걸 숨기지 못했다. 아니, 숨길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이비는 시온을 향해 그토록 애틋하게 웃었고, 시온은 아까 식사할 때 그랬던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시온이 다른 곳을 보며 숨을 고르자 이비가 속삭였다.
“백작님도 다 젖었어요.”
“추위를 안 타서 괜찮습니다.”
“하지만 불공평하잖아요.”
“아까부터 논리가 이상한데 좀 자중하시죠.”
시온이 다시 차게 말하자 이비도 눈썹을 세웠다.
괜한 실랑이가 이어지나 싶었지만, 그들의 대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비가 또 한 번 재채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비가 몸을 떨자 시온은 고개를 저으며 이비에게 모포를 떠넘겼다. 그러곤 오두막 구석으로 타협 없이 밀어 넣었다.
이비는 하는 수 없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원피스를 벗고 커다란 모포를 둘렀다. 그 사이 시온도 등을 돌린 채 거치적대는 셔츠를 벗어 버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모포에 파묻힌 예비 성녀와 상의를 잃어버린 백작님이 되어 벽난로 앞에 앉았다.
나란히 앉지는 않았다. 시온은 불을 돌본다는 핑계로 벽난로에 가까이 앉아 일부러 이비를 등졌다.
그렇게 상황을 외면하려 했지만, 보지 않는다고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가 잠잠히 뒤섞였다. 습한 공기는 그의 감각을 더 예리하게 일깨웠고, 그는 이 으슥한 오두막에 이비와 단둘이라는 사실을 잠깐이라도 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집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는 절반 이상이 무색해졌다.
시온은 멋대로 기대하는 이비에게 절대로 그 남자가 되어 주지 않을 거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남자와 똑같은 꼴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이건 우연이 아니라 명백히 함정이다. 이비 아리아테가 준비한.
그러니 놀아나지 않게 조심해야겠지만, 시온은 알면서도 벗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백작님은 모포 필요 없으세요?”
“됐습니다.”
시온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는 이비에게 등을 돌린 채 불만 노려보았다. 그러곤 이 어정쩡한 상황에 눌러앉은 자신을 속으로 욕했다.
그래서 이비가 자신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비는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기댄 채 시온의 등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귀티가 흐르는 얼굴과 달리 그의 등은 험했다. 넓은 어깨와 단단해 보이는 근육만으로도 위압적인데 상처까지 가득했다.
그래서 이비는 제 앞에 무방비하게 드러난 등의 느낌이 궁금해졌다.
“흡!”
시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리를 폈다. 그러곤 제가 낸 소리에 당황한 채 뒤를 확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떤 경위를 거쳐 도달한 결론인지, 모포에 파묻힌 이비가 손끝으로 그의 등을 살살 훑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상처가 왜 이렇게 많아요?”
시온은 질겁하며 묻다가 이비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던 말을 삼켰다.
“여기 상처, 여기도 상처.”
이비는 남자의 등에 새겨진 상처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었다. 그래서 시온은 자신의 등이 얼마나 너덜너덜한지 새삼 신경 쓰였다.
죄 없는 남자가 위축된 사이, 이비가 그의 등을 간지럽히며 물었다.
“경계에서 생긴 거예요?”
“그것밖에 없죠.”
“그렇구나…….”
“……손 좀 치우시죠.”
시온이 견디다 못해 나직이 고했다. 이비는 시온을 힐끗 쳐다보고는 순순히 손을 뗐다. 그렇게 방심시켜 놓고 두 손을 펴서 그의 등에 댔다.
“에잇!”
얼음장 같은 손이 맨살에 달라붙자 시온은 헛숨을 삼켰다.
자칫 비명을 지를뻔한 시온이 질색하며 이비를 노려봤지만, 이비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시온은 화도 못 내고 미칠 지경이 되었다.
이비는 대놓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깨끗이 선을 긋고 모든 여지를 잘라낼 때와 또 다른 지옥이었다.
이비는 차가운 손을 데우려는 듯 시온의 등을 노골적으로 붙잡았고, 결국 시온은 이비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 얼마나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예고 없이 날아든 물음이 그를 덜컥 붙잡았다.
“힘들지 않았어요? 혼자 찾아다닌 거잖아요.”
시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주 때문은 아니었다.
티엔다에서 초면도 구면도 아닌 채 만난 이래,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시온은 몇 번이고 이비를 찾았다. 몇 번은 집요하게, 때로는 다급하게.
때문에 이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힘겹게 자신을 찾아 헤맸을지를.
그래서 시온은 말할 수 있었고, 이비는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 고집스러운 남자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침묵만 이어졌다.
이비는 조금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혼자 있을 때 상상해 봤어요. 아저씨가 없는, 그러니까 내가 아저씨를 만난 적 없는 세상을요.”
이비가 손끝으로 시온의 등에 그림을 그리며 중얼댔다.
시온은 반쯤 포기한 듯 피하지 않았고, 이비는 제 몫이 된 등을 더 자유롭게 탐험하며 말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기는 했나 봐요. 그죠?”
이비의 음성에 자조가 섞였다.
하루를 살기 위해 하루 치의 구원이 필요하던 빈민가의 천애 고아.
험한 꼴을 잔뜩 당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는 한 모양이다.
이비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맺혔지만 잠깐이었다.
이비는 도로 누그러진 목소리로, 무릎에 턱을 기대 살짝 웅얼대는 투로 덧붙였다.
“하지만 살아남은 게 다일 거예요. 지금까지 아저씨 같은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이비의 목소리가 달았다. 등에 닿는 손길은 간지러웠다. 덕분에 한층 괴로워진 시온은 무심코 말을 돌렸다.
“당신 집사 있잖아요.”
“음, 디에스는 티엔다에서 계속 곁에 있어 준 사람이에요.”
시온은 자기가 말을 꺼낸 주제에 이비가 집사의 이야기가 하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고, 이비도 태연히 말을 이었다.
“유일한 내 편이에요. 여기까지 버틴 것도 디에스가 옆에 있어서 가능했던 거고요. 만약 디에스가 없었으면 정말 외로웠을 거예요.”
“그래서 사이가 좋군요.”
“맞아요. 소중한 사람이에요.”
이비의 말을 가만히 듣던 시온은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졌다.
그런데 시온이 언짢아지려던 찰나 이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디에스는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자기가 날 돌본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내가 키우는 쪽이거든요.”
좋네요, 서로 지키고 돌보고 키우고.
시온은 이렇게 빈정대고 싶은 걸 참았다.
그는 이비의 집사가 늘 거슬렸지만 그걸 표출한 적은 없었다. 남을 견제하는 얄팍한 인간으로 보이긴 싫어서.
그래서 여태 잘 숨겨 왔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이비였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르다는 거예요. 나는 디에스를 아끼지만 디에스에게 기대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기댈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명이라고 정했으니까요.”
이비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던 시온은 그 말이 묘하게 변명조라는 걸 깨달았다.
의아해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비는 시온을 보지 않고, 그의 등에 핀 상처 하나를 바라보며 중얼댔다.
“내가 지금까지 기댄 사람은 아저씨밖에 없어요.”
이비는 억울하다는 듯 말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밤하늘처럼 검고 깊은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시온이 불길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이비가 작은 입술로 속삭였다.
“앞으로 기대고 싶은 사람은 백작님이고요.”
그 한마디가 안 그래도 위태롭던 시온의 심장을 결국 쿵 떨어트렸다.
시온은 숨 쉬는 법도 잊어버렸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은 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