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속도 없는 백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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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속도 없는 백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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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속도 없는 백작님
2023.05.11.
빗소리가 거셌다.
그 아래 깔린 침묵은 무거웠다.
이비의 시선이 일렁였고, 시온은 이게 정말 현실인지 헷갈렸다.
아니, 꿈이든 현실이든 똑같이 위험했다.
여기서 한 발 나아가면 지금까지 애써 쌓은 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내가 아닌 너로 돌아가던 세상을 견디며 꾸역꾸역 삼킨 감정이 모두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저는…….”
이비의 희미한 목소리가 버거운 침묵을 깼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고 이비는 말을 멈췄다.
이비는 시온의 굳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진지하게 중얼댔다.
“……저는 역시 천재인가 봐요.”
심각한 와중에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 엉뚱한 발언에 시온이 미간을 좁히자, 이비가 건방지게 훗 웃었다.
“이걸 다 알아내다니. 이 정도면 백작님을 부려 먹을 자격이 있어요. 그죠?”
이비의 의기양양한 공치사에 시온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이비는 여상히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아직 얼떨떨하긴 해요. 설마설마했는데 설마 진짜일 줄이야.”
“……어떻게 안 겁니까?”
이비의 분위기가 가벼워지자 시온도 비슷한 느낌으로 입을 뗐다. 그에 이비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저씨는 라우렐 백작이어야 했거든요. 그 와중에 백작님 목소리가 아저씨랑 비슷하게 들렸고, 그래서 설마 했는데 유비아가 알려 줬어요. 노체는 어떤 편법으로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고요.”
그러더니 짐짓 심각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백작님과 비슷한 사람을 한 명 봤어요.”
“어떤 게 비슷하다는 거죠?”
“백작님처럼, 아니. 아저씨처럼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이요. 엔테라는 젊은 남자였어요.”
이비가 짧은 이름을 발음하자 시온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저한테 저주를 건, 왜인진 모르겠지만 저를 죽이러 왔다는 밤의 일족이에요. 그런데 투기장에 엔테가 한 명 더 있었어요. 밤의 일족인 데다가, 그 사람과 똑같이 생긴 어린 남자애였어요.”
이비는 자길 죽이려 한 녀석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태연했다. 그러면서 시온에게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백작님은 엔테를 아세요?”
시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아나 보네요. 모르는 게 비밀일 순 없잖아요.”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말씀하세요.”
“이쯤 되니 무섭네요.”
“제 예리함이요?”
“네.”
시온은 결국 인정했다. 이젠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을 변방에 가둔 저주가 이비의 말에 하나씩 부서질 때마다 기분이 복잡했다. 홀가분하다고 해야 할지 허무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미 그의 중심을 차지한 이비가 존재감을 더 키우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해야 할지.
만감이 교차했지만, 시온은 잔뜩 엉킨 속내를 습관처럼 눌러 넣었다.
“당신 말대로 나는 엔테를 압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는지는 아직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알고 있습니다.”
시온의 뒤늦은 실토에 이비가 가만히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작정한 듯 요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이걸로 몇 가지는 확실해졌네요. 우선 아저씨는 시간을 넘어온 백작님.”
이비는 시온이 평생 혼자 짊어질 줄 알았던 비밀을 너무 쉽게 발설했다. 하지만 그 사실에 감회를 느낄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백작님은 아저씨가 아는 걸 알아요. 나중에 벌어질 일도, 엔테도, 내가 큰 동물을 무서워하는 것도. 다른 건 몰라도 내 사소한 약점까지 알 정도면, 전해 들었다기보다는 기억을 이어받은 쪽에 가깝겠죠.”
이비는 거침없이 핵심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저주 때문에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게 지금 상황이니까, 결국 백작님의 저주도 열쇠는 엔테예요.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백작님이 말할 수 있는 게 많아질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닌데 의도가 좀 의심스럽네요.”
“기분 탓이에요. 그리고 돕고 살아야죠, 우리 사이에.”
이비가 앙큼하게 덧붙인 마지막 말에 시온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이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음, 이쯤 왔으면 왜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시간을 거슬러 와서 날 괴롭히는지 고민해야겠죠. 우선 내가 머지않은 미래에 성녀가 되는 건 확실한데, 백작님은 그걸 왜 굳이 막는 걸까요? 엔테라는 인간은 왜 날 죽인다고 난리고. 탑의 성녀는 어차피 상징에 불과한데.”
이비는 허공에 대고 묻더니 다시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백작님께 가장 궁금한 건 이거예요.”
이비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고, 이비는 그런 백작을 노려보며 나직이 물었다.
“백작님은 왜 저를 바보 취급하셨어요?”
“당신이 바보처럼 굴었으니까.”
분위기 잡은 것과 달리 이비의 질문은 쉬웠다. 그래서 시온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건 불가항력이었어요!”
“그랬겠죠. 하지만 그땐 누가 봐도…….”
바보라는 말에 발끈한 이비를 위해 시온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비는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반박의 여지가 없어서 더 그랬다.
말마따나 시온은 최악의 첫 만남 이후 이비를 꽤 바보 취급했다. 티엔다의 귀족들이 다 모인 연회장에서 대귀족에게 버르장머리 없다고 말하는 여자를 똑똑하다고 여길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비는 새삼 억울한지 다시 항변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왜 보이는 대로 믿으셨냐고요. 날 안다면 내가 똑똑하다는 것도 알아야죠. 그럼 내가 그랬어도 ‘아, 쟤가 저렇게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애가 아닌데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야 맞죠. 아니에요?”
여기엔 이비가 모르는 이유가 있지만, 이비가 모르기에 시온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비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백작님, 저랑 별로 안 친했죠?”
미래를 상정한 물음에 시온은 재차 침묵했다. 이비도 딱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혼자 흥 하고 토라질 뿐이었다.
이비는 자신이 그의 가장 아픈 구석을 건드렸다는 걸 까맣게 몰랐고, 덕분에 시온의 오래된 심장은 또 한 번 조용히 갈려 나갔다.
“대답을 못 하신다면, 그다음 궁금한 건 이거예요.”
혼자 피 흘리는 시온의 심경을 모른 채 이비가 재차 물었다.
“저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구셨어요?”
그 말에 시온은 그만 실소를 삼켰다.
내가 너에게 못되게 굴었나?
딱히 곱게 굴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만 할까.
저주받은 백작은 또 한 번 천 마디 말을 삼킨 채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이비는 그 위를 순진하게 밟고 섰다.
“말은 못 해도 반가워할 수는 있었잖아요. 그럼 나도 더 일찍 알아봤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이비의 목소리는 여상히 가벼웠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었다. 애써 밝게 말하는 이비의 눈에 서운함이 가득하다는 걸.
그리고 시온은 언제나 이비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반가워할 순 없죠.”
시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의 눈이 커졌지만, 시온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는 그 남자가 시온 라우렐인 것도 맞고, 내가 그 남자의 기억을 가진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아니고 그자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시온의 어조는 차분한 듯 분명했다.
그건 거절이었고, 그 사람이 되어 줄 생각 따위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비는 이 명백한 선 긋기에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자그맣게 물었다.
“그럼 날 찾아온 건 단지 빚을 갚기 위해서예요?”
“네.”
시온은 망설임 없이 끄덕였고,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이비는 야속한 듯 그 쌀쌀맞은 백작을 바라보다가 한층 낮게 말했다.
“내일이면 성녀 발탁식 일주일 전이에요.”
푸념인 듯 애원인 듯 희미한 목소리였다.
“그때 정했죠. 발탁식 일주일 전까지 상대를 설득하기로.”
이비와 시온은 서로가 필요한 걸 깨닫고 손을 잡았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끼고 맺은, 평행을 이루는 동맹이었다.
하지만 그 휴전도 오늘까지. 내일이면 다시 두 사람은 성녀 자리를 두고 담판을 지어야 한다.
“백작님께 제가 단지 갚아야 할 빚이라면, 저는 설득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누굴 위한 청산인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이비는 확신이 필요했다.
“저는 단지 빚인가요?”
시온 라우렐이 내 편이라는, 그가 날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아니, 이건 핑계고 이비는 그저 원했다. 내 세상을 열어 준 사람과 다시 만나기를.
그래서 백작의 냉정을 견디고 물었지만, 시온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대답했다는 듯이.
그의 침묵에 이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고운 얼굴에 실망이 차오르고 상처받은 흔적이 위태롭게 비쳤다.
하지만 이비는 참았다. 대신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생각할 시간을 드릴게요.”
이비 아리아테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당연히 매달리지도 않는다.
예외는 오직 한 사람뿐. 그 유일한 예외를 위해서라면, 얼마간은 비굴해질 수도 있었다.
“적어도 오늘까진, 시간이 있으니까요.”
이비는 그렇게 최후의 통첩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온은 잡지 않았고, 이비는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그로써 혼자 남은 시온은 등받이에 기대며 욕설을 삼켰다.
그는 이비가 무엇을 바라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아까부터, 아니. 투기장에서 다시 만난 순간부터 벽을 허물고 다가온 이비는 그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받은 그때와 같은 모든 것을.
“싫어.”
시온은 쓴 물을 삼키며 중얼댔다.
역시 싫다. 그 남자가 되는 건, 절대 싫다. 차라리 모든 걸 혼자 삼키고 땅에 묻히는 편이 낫다.
시온이 고요히 몸부림칠 때였다. 빗소리 사이로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창문을 돌아본 시온은 다시 탄식을 토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딜 가는 거야.’
망토를 쓴 이비가 빗속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시온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단지 빚이라고 선을 그어 놓고 이렇게 신경 쓰는 건 모순이다. 그래서 시온은 혼자 비를 헤치며 어디론가 향하는 이비를 그저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눈을 돌렸다.
이비 아리아테다. 당차고 영리하고 제 앞가림은 차고 넘치게 잘하는. 미친 점성술사면 몰라도 시온 라우렐은 필요로 하지 않는.
시온은 그렇게 되뇌며 다시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그러곤 창밖의 일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상태로 제법 오래 참았다.
결국 신경질을 내며 일어난 시온은, 등꽃이 핀 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비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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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무섭게 내렸다. 하지만 시온은 빗줄기가 몸이 때리는 줄도 모르고 이비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마을을 돌아다녀도 이비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이비가 종종 가출했던 언덕까지 올라가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아까까진 마지못해 찾고 있었는데, 이비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급해졌다. 스멀대며 피어나는 불안감이 그를 윽박질렀다.
그래서 걸음이 점점 빨라지던 중, 한 장소가 뇌리를 스쳤다.
이렇게 비가 오던 날이었다. 그 남자는, 몰래 떠나려던 어린 이비를 오솔길에서 찾아냈었다.
시온은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 진흙탕을 밟으며 달렸다.
그리고 기어이 찾아냈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던 이비를.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번에도 시온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이비가 놀란 기색 없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단지 빚이면 그렇게 열심히 찾을 필요 없잖아요.”
시온은 남의 속도 모르고 말하는 이비가 얄미웠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 한편엔, 속도 없이 안도하는 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