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궁지에 몰린 백작님 (98/129)


98화. 궁지에 몰린 백작님
2023.05.08.


저도 모르는 사이 식탁에 앉게 된 시온은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이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부엌에 선 이비는 딱히 능숙하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질끈 묶고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꽤 야무졌다.

이비 아리아테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무려 시온 라우렐의 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뭐야, 왜, 갑자기 뭔데.’

시온은 돌변하듯 상냥해진 이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앞치마로 허리를 동여맨 이비의 뒷모습을 주시하다가, 영문 모를 죄책감에 고개를 돌렸다.


“더워?”

그 모습을 본 유비아가 시온을 향해 갸웃댔다.

아무 의도 없는 물음이었으나, 제 발이 저린 남자는 차갑게 눈을 흘겼다. 본전도 못 찾을 행동이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해야지 그렇게 눈치 주면 못 써.”

“푸훕!”

유비아의 타당한 훈계에 시온이 당황할 틈도 없이 부엌 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비였다.


“아, 죄송해요. 들려서.”

이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사과하며 시온을 돌아보았다. 그때 이비의 눈은 포근하게 휘어 있었다.

그 낯선 눈웃음에 시온은 짐짓 당황했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비아는 소소하게 확신했다.


“많이 덥구나.”

유비아의 염장이 안 그래도 더운 시온을 조금 더 덥게 만들었다.

아직 더위를 느낄 날씨는 아니지만, 오히려 요 며칠 내린 비로 조금 쌀쌀했지만, 그럼에도 시온은 더웠다.


 
왜냐하면 상황이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 시온은 이비가 자길 보면 민망해하거나 더 틱틱 댈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스스로 업혔던 일을 뒤늦게 후회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비 아리아테의 동요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이비는 또 그의 예측을 박살 냈고, 나아가 오히려 그를 혼란에 빠트렸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귀여워지는 것으로 말이다.


“유비아, 식탁에 접시 좀 놔 줘.”

시온이 이비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쓰는 사이, 이비가 유비아를 불렀다.

이후 소담하게 차려진 식탁은 시온을 또 한 번 번뇌하게 만들었다.


‘……뭐지?’

이비가 영리하게 뚝딱 준비한 음식은 흰콩과 붉은 소시지가 들어간 스튜, 감자와 계란으로 만든 오믈렛, 검은 올리브가 박힌 빵 등. 비스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금 유복한 수준의 가정식이었다.

동시에 전부 미묘하게 시온이 선호하는 것들이었다.

시온은 우연이겠지 하며 이비를 슬쩍 쳐다봤고 이비와 눈이 마주쳤다.

도대체 어째서인지 이비는 시온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그래서 시온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슨 짓이야.’

시온은 앞치마를 두른 이비 아리아테가 자신을 위해 요리하고 착하게 웃는 이 상황이 전혀 납득되지 않았다.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몇 주 전, 투하의 별장에서 이비가 그를 뒤에 두고 혼자서 천장까지 기어 올라가던 것을. 그의 턱을 올려 치고 정강이를 까고 손등을 깨물었던 것도.

아니, 몇 주 전까지 갈 필요도 없다. 몬트라 후작을 괴롭혀서 울린 건 불과 며칠 전이다.

가식을 지운 이비는 시온의 아홉 살 제자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왈가닥이었고, 그 사실을 시온에게 전혀 숨기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다시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근데 왜 갑자기 참하게 구는 건데. 아니야? 나만 그렇게 느껴? 내 과도한 망상이야?’

시온은 이렇게 따지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이비를 경계했다.

그 와중에도 이비는 생글생글 웃으며 식탁을 앙증맞게 눈짓했다. 어서 먹어 보라는 뜻이었다.

시온은 어쩐지 소름이 끼쳤지만 별수 없이 식기를 들었다. 그러곤 가장 만만한 스튜를 떠서 입으로 옮겼다.

그러자 이비가 답지 않게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입에 맞으세요?”

“그냥 그러네요.”

왠지 기대가 가득한 물음이라 시온은 일부러 무심하게 대답했다.

기껏 차려 줬는데 고마운 줄 모른다는 소릴 듣고 싶었다. 그렇게 한 소리 듣고 나면 이 체한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온의 예상과 달리 이비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릴 따름이었다.


“다행이에요. 처음 만든 거라서 걱정했는데.”

‘왜 그래, 진짜…….’

시온의 속은 이제 답답하다 못해 울렁대기 시작했다.

시온이 경직된 채 쳐다보자 이비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시온은 방금 삼킨 스튜의 맛도 모른 채, 이 상황을 버틸 수밖에 없었다.

.
.
.

이비의 생글거림으로 얼룩진 식사가 겨우 끝났다.

왠지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시온은 퀭한 얼굴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이젠 추워?”

유비아 놈이 개수대 옆에서 기웃대며 물었다.


“얼굴이 하얘졌어.”

시온은 이 순수한 듯 음흉한 놈을 노려보다가 앞선 실패를 떠올렸다. 그래서 씨알도 안 먹히는 간접공격 대신 녀석의 눈에다 손에 묻은 비눗물을 털어 버리는 직접공격을 감행했다.


“으앙!”

항상 애늙은이처럼 굴던 유비아가 처음으로 어울리는 소릴 내며 도망쳤다. 그로써 놈을 간신히 물리친 시온은 폐부에 쌓인 울화를 한숨으로 길게 뱉었다.

먹은 게 다 얹힌 기분이었다. 이유는 물론 이비의 살갑고 다정한 분위기 때문이다.

이비는 식사하는 동안에도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그간 시온에게 보여 준 가식적인 미소나 음험한 냉소가 아닌, 남자라면 열에 아홉은 오해할 만한 달콤한 웃음이었다.

그 얼굴을 떠올린 시온은 속이 또 거북해졌다.

그릇되었다. 불편하고 부적절하며 사리에도 맞지 않음이다.

처음엔 저러다 뒤통수를 치겠지 의심했는데, 이젠 차라리 뒤통수를 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비를 업어줄 때 느꼈던 승리감도 이미 오간 데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훗날 후회하고 창피해할 이비를 상정하고 내린 판정이었다.

하지만 이비는 창피해하긴커녕 사랑에 빠진 것처럼 거리감을 지웠고, 시온은 결국 깨달아 버렸다. 이비의 태도가 정말 변한 것을, 그리고 그게 어디서 기인했는지도.


‘이제 와서.’

시온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복잡했다.

누군지 알아봤다는 이유로 단 며칠 만에 태도를 바꾼 이비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몇 년째 판단을 유보 중인 시온은 우유부단한 놈이 되어 버렸다.

시온은 이비를 만났을 때 이비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이비와 너무 깊게 관여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시온 라우렐이지 그 남자가 아니니까. 설령 머릿속에 너에 대한 기억이 가득하더라도 말이다.

자기모순을 아는 시온은 씁쓸한 기분으로 접시의 물기를 닦았다.

일부러 손을 느리게 움직였지만 수북하게 쌓여 있던 접시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설거지가 끝나 버렸다. 이제 이비가 기다리는 위층으로 올라갈 시간이었다.

***

그새 하늘이 흐려졌다. 또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시온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이비는 안락의자가 있는 방에서 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소파에 앉은 이비가 문가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모습에 시온은 다시 멀미가 났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예뻤다. 어둑한 집 안이 한층 밝아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시온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며, 평소보다 싸늘한 얼굴로 이비의 맞은편 안락의자에 앉았다.

비로소 단둘이 마주 앉게 되자 이비가 먼저 운을 뗐다.


“감사해요, 백작님.”

“……뭐가 말입니까?”

“투기장에서 구해 주신 거랑 정원에서 잠들었을 때 방에 데려다주신 거요.”

이비의 인사는 솔직했다. 어딘지 애틋하기도 해서, 시온은 이제 괴롭힘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뒤에 건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결국 그 솔직하지 못한 남자는 냅다 시비를 걸고 말았다.


“인사가 꽤 늦었네요.”

그의 쌀쌀맞고 재수 없는 대답에 내리 착하던 이비의 눈초리가 살짝 뾰로통해졌다.

그래, 차라리 덤벼라.

시온은 반격을 바라며 이비를 뻔뻔하게 주시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눈싸움은 시작되지 않았다. 잠시 새침했던 이비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온순한 얼굴로 이비가 섭섭한 듯 말했다.


“백작님만큼 늦진 않았어요.”

시온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다가 뒤늦게 말문이 막혔다.

톡, 톡.

그때 마침 빗방울이 창문을 때렸다. 잔뜩 찡그린 하늘이 기어이 비를 뿌리는 모양이었다.

말을 잃은 시온을 방치한 채, 이비가 물방울 맺힌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르소 아줌마한테 들었어요. 백작님이 아주 예전에 절 찾은 적이 있다고요.”

지난달, 끔찍한 그믐을 보내고 며칠 후. 이비가 이 집을 사려고 마르소 부인과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이비야, 혹시 선생님이 너한테 별말 안 하시니?

―아니, 생각해 보니까 이상해서. 너무 옛날 일이라 깜빡 잊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여기 처음 왔을 때 널 찾았었어. 그 얘기 따로 안 했니?

조심성 많은 마르소 부인이 이렇게 속닥였고, 그래서 이비는 시온이 언제 이 마을에 왔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제가 이 집을 떠나고 일주일쯤 후에 왔었다고.”

이비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단조롭게 섞였다.


“저는 아저씨가 사라지고 여기서 석 달 넘게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백작님이 더 늦으셨어요.”

이비는 그토록 담담한 어조로 시온을 책망했다.

그래서 시온은 직전에 하던 생각을 다 잊어버렸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비는 궁지에 몰린 남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백작님이 이 마을에 처음 온 건 5년 전이고 지내기 시작한 건 2년 전이라고 들었어요. 그동안 뭐 하셨어요?”

시온이 대답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비가 되물었다.


“혹시 저를 찾아다니셨어요?”

그건 질문이 아닌 확인이었다.

덕분에 시온의 체한 기분은 더 심해졌다.

갈비뼈 안쪽이 술렁대는 감각이 버거웠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만큼 벅차기도 했다.

날 알아봐 줘. 내게 다가오지 마. 나는 그 남자가 아니야. 하지만 너를 기억해.

상반된 감정이 밀려와 그를 괴롭혔다.

이비가 차라리 예전처럼 무심하게, 훼방꾼 보듯이 박대하며 이야기했다면 이런 기분은 안 들었을 거다.

그런데 이비는 놀라서 도망쳤던 주제에 순식간에 혼란을 해결하고 결론까지 내린 채 돌아왔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고 미뤄 둔 시온과 달리, 이비는 그에게 애정을 쏟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전에 틀린 문제, 다시 풀어 볼게요.”

이비가 애써 웃으며 침묵하는 남자에게 말했다.


“혹시 점성술사 아저씨가 라우렐 백작님인가요?”

일전에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정답은 맞지만 과정이 틀려 버린, 시온의 속을 갈가리 찢었던 잔혹한 질문이었다.

시온이 고통을 느낀 듯 미간을 좁히자, 이비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이름이 시온 라우렐인가요?”

“……네.”

시온이 무겁게 대답하자, 창밖으로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