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귀엽게 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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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귀엽게 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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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귀엽게 굴고 있었다
2023.05.04.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온 라우렐의 세상은 시온 라우렐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건 자신이 용을 추락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용에게 던져진 장난감인 걸 알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라우렐로 나고 자란 시온은 고고한 긍지를 가진 소년이었고, 그 드높은 자긍심은 진창 속에서도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아니, 꺾을 수 없었다. 그건 시온 라우렐이 시온 라우렐로 남기 위한 마지막 끈이었다.
하지만 냉혹한 세상은 그 마지막 끈마저 기어이 빼앗았다.
계기는 한 소녀의 실종이었다.
“이비를 찾아왔다고요?”
5년 전, 아담한 이층집에서 마르소 부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댔다.
부인은 시온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들은 초면이었다.
다만 시온은 그 남자가 남긴 기억 때문에 부인이 수년간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했다.
그래서 부인의 심각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비는 여기 없어요.”
이어진 말이 사실인 것도 알 수밖에 없었다.
“편지 한 장 남기고 떠났어요. 같이 지내던 양반을 찾으러 간다며…….”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이비가 사라졌다는 말은 그의 모든 감각을 아득하게 만들었고, 둔해진 머리는 아주 천천히 움직여 이해했다.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후 시온은 미친 사람처럼 이비를 찾아다녔다.
어떡하지?
잘못됐으면 어떡하지?
이대로 못 찾으면 어떡하지?
시온은 겁에 질려 닥치는 대로 헤맸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구석으로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이비를 모른다.
아직 만난 적도 없고 어떠한 유대도 쌓은 적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릿속에 가득한지. 이게 정말 내 것인지, 혹시 나를 속이는 또 다른 허상은 아닌지.
너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리도 절박한지.
왜 너를 만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지.
왜 이런 절망에 시달려야 하는지.
의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시온은 멈추지 못하고 이비를 찾았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시온 라우렐의 세상이 자기 자신에서 아직 만나 본 적도 없는 소녀에게 축을 옮긴 것은, 시온의 세상이 이비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혼자서 비스 전역을 헤집고 다니길 3년.
점점 지쳐가면서도 포기하지 못한 채 몸부림치던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마냐냐의 현신이 티엔다에 나타났다는 괴로운 소식이었다.
그때 시온이 느낀 건 깊은 안도와 아득한 절망이었다.
네가 살아 있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결국 탑에 널 빼앗긴 사실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찾던 이비의 모습도 귀여운 소녀가 아니라 차가운 여인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국면에 갈등하던 시온은 이비를 탑에 맡기기로 했다. 탑을 무너트릴 힘을 기를 때까지.
그렇게 또 두 해, 시온은 이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견뎠다.
그가 오랜 준비 끝에 이비를 만나기로 한 건 성녀 발탁식이 가까워진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이비를 마주하게 된 시온은 어쩔 수 없이 긴장했다.
수년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그의 세상을 지배해 온 이를 처음으로 만난다.
시온은 많은 것을 각오한 채 이비가 있는 연회장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드디어 발견한 이비는 거짓말처럼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엔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이비가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생긴 대로 버르장머리가 없으시네요!”
.
.
.
시온 라우렐이 무려 5년간 죽도록 찾아 헤맨 여자의 첫마디가 버르장머리 없다는 훈계인 것에 강렬한 패배감을 느낀 게 어언, 아니. 불과 두 달 전.
불현듯 그때를 떠올린 시온은, 자신의 품에서 잠든 이비를 보며 또 다른 번뇌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조로운 빗소리가 울리는 새벽, 풀냄새가 짙은 숲속의 외딴 오두막.
모포 속에서 곤히 잠든 이비는 시온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시온은 먼저 깨어난 죄로 혼란과 공포 속에서 이 상황을 해석하려 애썼다.
왜 꿈이 아니지?
왜 이비가 내 옆에서 자고 있지?
이미 돌이 된 시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근새근 자던 이비가 꼭 끌어안은 시온의 팔에 뺨을 기대왔다.
그 파괴적인 행동에 시온의 동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대체 왜 이렇게 됐지?
매우 한심하고 비겁한 소리 같지만, 하늘에 맹세코 고의는 아니었다.
***
어제 아침만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질 조짐은 없었다.
“선생님, 저 이거 맞는데요!”
“과정이 틀렸잖아.”
“정답은 맞잖아요.”
“과정이 틀렸는데 계산도 틀려서 우연히 맞춘 건 정답이 아니지.”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니에요!?”
그때 시온은 아주 오랜만에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폐허의 투기장이 박살 나고 나흘이 지난 날이었다.
정답만이 아니라 과정도 꼼꼼히 살피는 시온 선생님은 요행으로 답을 맞힌 녀석에게 더 어려운 문제를 내주었다. 또한 정석으로 답을 맞힌 녀석에게도 더 어려운 문제를 내주어 어린 영혼들을 모조리 시험에 빠트리고 있었다.
모처럼 평화로운 날이었다.
마을에 활기가 돌아온 건 지난 그믐을 무사히 넘긴 덕분이었다.
게다가 바옌 군의 높은 분이 찾아와 마을 이주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소식도 직접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 전부 아리아테 님의 노고라 밝혔고, 마을 사람들은 성녀님의 은혜에 흠뻑 젖게 되었다.
온갖 생색을 내는 이비가 은근히 얄밉긴 하지만, 시온도 마음이 놓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이곳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걸 굳이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선생 노릇을 하게 된 계기 역시 이비였기 때문이다.
5년 전, 이비가 사라진 걸 알게 된 시온은 점성술사가 그랬던 것처럼 이층집의 2층을 통째로 빌렸다. 혹여 이비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 비워 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비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3년 후 티엔다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미친 듯이 비스를 헤매던 시온은 이비의 소식을 듣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살아 있다는 것에 긴장이 풀린 건지, 결국 티엔다로 간 것에 허망해진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정말 몰랐던 걸 수도 있다. 그의 몇 년은 오직 이비를 찾는 것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마네세르를 잠재우고 이제 뭘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온은, 그 남자와 이비가 살던 이층집으로 홀린 듯 향했다.
그리고 경계로 돌아가야 할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수상한 외지인이 들락댄다는 소문은 상당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어른들은 당연히 그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래서 아이들은 냉큼 호기심을 가졌다.
수상한 외지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동네 꼬마들은, 마르소 부인이 집을 비운 어느 날 모험을 감행했다.
―우와, 진짜 있어!
시온이 매달 이층집에 틀어박힌 지 석 달째 되던 날이었다.
―키 되게 크다.
―귀족 맞나 봐.
차마 2층 복도까진 올라오지 못하고 계단 마지막 칸에 선 꼬마들이 시온을 대놓고 구경하며 쑥덕댔다.
순진한 꼬마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동물처럼 겁이 없었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시온은 모든 게 성가셔서 그냥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정말 성가셨다면 초장에 따끔하게 내쫓는 편이 나았다.
꼬마들은 그의 침묵에 힘입어 슬금슬금 접근했다. 정확히 계단 마지막 칸까지만 올라와서 이것저것 공물을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꼬마들은 나무 열매나 버섯, 납작한 돌 같은 걸 2층 복도에 두고 외지인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길 바랐다. 뚜렷한 목적이나 계산 따윈 없었다. 그냥 이상한 사람이 있으니 친해지고 싶다는 게 다였다.
하지만 시온에겐 그들의 행동을 귀여워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본체만체 무시하길 한참, 지켜보던 마르소 부인이 제안했다.
―혹시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줄 수 있나요?
그건 아이들보다는 이 피폐한 청년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시온은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르소 부인이 먼저 말했다.
―이 위에 교실로 쓰던 방이 있어요. 다락에 가면 책도 많은데 한번 보세요.
그 말에 시온은 떠올리고 말았다.
그 남자가 어린 이비에게 글을 가르쳐 주던 순간을, 책을 읽어 주던 기억을.
시온은 그 기억을 꼬박 사흘 동안 멍하니 되짚었다.
그리고 다시 마을 아이들이 찾아왔을 때 글을 배우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놈들은 다 도망쳤다. 으악, 말한다, 라고 소리치면서. 그런 주제에 다음날 다시 찾아왔고 결국 학생이 되었다.
누굴 가르치는 건 처음이지만, 시온은 생각보다 잘할 수 있었다. 어린 이비를 가르치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탓이었다.
“어? 성녀님이다!”
아직 수업이 한창인데, 한 녀석이 창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너나 할 것 없이 일어나 창가로 몰려들었다.
안 그래도 밖이 소란하다 싶더니, 마을 사람들이 한 여자와 바옌 군인 몇 명을 따라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이비와 그의 임시 호위들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꼬마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시온을 애절하게 쳐다봤다.
마을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성녀님이 오신 탓에 다들 안달이 나서 수업은 뒷전이었다.
“……오늘 못 한 거 숙제로 해 와.”
미친 용은 떨어트릴 수 있지만 이놈들을 의자에 다시 앉힐 엄두는 나지 않았다.
시온이 결국 수업을 접자,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우당탕 한바탕 소란이 일고 빠르게 정적이 찾아왔다. 그 빈 교실에서, 시온은 이비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이비가 티엔다에서 돌아왔다. 이제 드디어 미뤄 둔 이야기를 할 시간이었다.
.
.
.
해야 할 말이 많지만, 시온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왠지 먼저 찾아가기 싫었다. 어쩌면 이비가 2층으로 찾아오길 기다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비는 집에 들어오고, 바래다 준 군인들과 환호하던 마을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은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와서도 이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예전에 마르소 부인이 쓰던 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이비의 다친 집사가 사용 중인 방이었다.
며칠 전 크게 다친 이비의 집사는 이 집에 눌러앉았다. 티엔다에 있는 이비의 저택이 타서 없어진 탓이었다.
덕분에 꽤 불편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비 아리아테는 오자마자 집사부터 찾아간 모양이다.
괜히 짜증이 난 시온이 다시 올라가려 할 때였다.
방문이 덜컥 열리며 안에서 이비와 유비아가 함께 나왔다.
이비와 준비 없이 마주친 시온은 자기가 기다린 것처럼 보일까 봐 덜컥 굳었다.
그런데 뭐라고 시치미를 떼기도 전에 이비가, 영문을 알 수 없게도,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여기 계셨네요.”
‘……뭐지?’
이비가 시온을 보며 반갑게 말했다. 이제껏 본 중에 가장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 낯선 모습에 시온이 반사적으로 경계했지만, 이비의 목소리는 여상히 상냥했다.
“식사하셨어요?”
“아뇨.”
“그럼 같이 먹어요. 금방 준비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왜?’
이비가 친절하다. 가식인지 진짜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어쨌든 분명한 건 이비의 태도가 친절하다는 거였다.
이비의 갑작스러운 친절에 당황했던 시온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불신과 의심을 키웠다.
설마 시간을 끄는 건가? 이래 놓고 또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시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평소라면 발끈했을 이비가 예쁘게 생긋 웃었다.
“할 얘기 많은 거 알아요, 그러니까 식사 먼저 해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앞치마를 둘렀다.
이때 이상한 걸 눈치채야 했다.
다시 만난 이비는 왜인지 지나칠 정도로 귀엽게 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