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엔테의 신
(96/129)
96화. 엔테의 신
(96/129)
96화. 엔테의 신
2023.05.01.
훗.
후훗.
후후훗!
이비는 연회장을 내려다보며 소리 없는 광소를 터트렸다.
이겼노라, 해냈노라, 무너진 발판을 또 일으켜 세웠노라!
이비는 스스로가 대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다 잘됐어. 또 해냈어. 이비야, 사랑해.’
세상의 역경? 이비가 이겨 낼 숙제일 뿐!
몰아치는 위기? 이비의 업적을 위한 소품일 뿐!
잔뜩 고취된 이비는 제 어깨를 꼭 끌어안고 빙그르르 돌았다.
자기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모습은 퍽 기괴했고, 그래서 똑똑한 이비는 진즉에 테라스로 피신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껏 자랑스러워한 후, 이비는 창문 너머 연회장을 향해 다시 눈을 빛냈다.
‘카셀 몬트라는 이제 내 따까리고.’
아직 은근히 반항하고 있지만, 적어도 전처럼 개기지는 못할 거다.
‘디에스는 어쨌든 무사하고.’
엔테에게 공격당했던 집사는 다행히 유비아에게 제때 발견되었고 지금은 요양 중이다.
‘마을도 이제 평화롭고.’
그믐 전날 투기장으로 저주가 왕창 몰려든 탓에 호밀밭이 있는 마을은 오랜만에 평화로운 그믐을 맞이했다.
‘뱀은 결국 놓쳤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유비아가 결국 뱀을 놓쳤다는 건데, 이비는 그래도 충분히 선방했다고 여겼다. 이런 분위기면 조금 솔직해도 성녀가 되는데 딱히 문제가 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후후후……!’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
이제 이비에게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다.
라우렐 백작의 반대.
하지만 이비는 이것도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작님은…….
자길 업어 주던 백작이 떠올라 이비는 괜히 더워졌다. 그래서 손부채질로 상기된 얼굴을 식힐 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다들 주인공을 찾습니다.”
이지적인 분위기의 신사가 테라스에 숨어 있는 이비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바옌 공작의 오른팔인 이슬라 경이었다.
이슬라 경은 이비를 데리러 온 척하더니 자연스럽게 테라스로 나왔다. 그러곤 넌지시 말을 전했다.
“바옌 공작님도 아리아테 양을 직접 지지하고 싶어 하셨는데, 집안일이 다난해 못 오셨습니다. 추후 별도로 연락하실 겁니다.”
“그러시군요, 모쪼록 원만히 해결되셨으면 좋겠네요.”
이슬라 경이 에둘러 한 말에 이비도 모르는 척 화답했다.
그믐 다음 날, 바옌 공작이 비스로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이슬라 경이었다.
이슬라 경은 밤의 일족이 휩쓴 투기장의 참사를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거기서 죽은 채 발견된 비스의 유력 귀족들의 신원도 모두 확인했다.
이 일은 바옌 공작에게 고스란히 보고되었고, 그래서 바옌 공작은 지금 집에서 신나게 칼춤을 추는 중이었다.
“그전에 공작님께서 아리아테 양에게 한 가지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슬라 경이 질문을 예고했지만, 이비는 긴장하지 않고 끄덕였다.
“일전에 끝까지 책임을 물어 달라고 한 대상 중 몬트라 후작도 있었나요?”
“네, 첫 번째였어요.”
“그런데 왜 뜻이 바뀌셨는지요?”
“기회를 줘도 될 것 같아서요.”
이비의 대답은 퍽 건방졌다. 하지만 이비는 자신의 대답에 당황하지 않았고, 이슬라 경도 여상히 웃었다.
이엘 바옌의 최측근이자 모렌 아르코의 남편인 그는 이비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슬라 경의 물음처럼, 나아가 바옌 공작의 의문처럼 원래 이비는 카셀 몬트라를 완전히 실각시킬 작정이었다.
평생에 걸쳐 기회를 얻은 놈이니 새로운 기회가 과분하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이비가 마음을 돌린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가면 쓴 하녀를 구해 줘서, 적어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놈은 아니구나 싶어서.
물론 그 후 불러 세워 놓고 한 말은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을 만큼 가관이었지만, 그것도 열 번 양보하고 세 번 더 용서하면 제 딴에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쓴 걸로 봐줄 수 있었다.
그는 이비처럼 너와 내가 이토록 다른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비는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어서 앞으로 알차게 이용해 먹을 작정이지만.
“자비로우시군요.”
“성녀가 될 거니까요.”
슬쩍 던진 농에 이비가 당차게 대답하자 이슬라 경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렇다면 저 밖의 젊은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죠. 주인공이 사라져서 춤을 못 추고 있어요.”
그의 말대로 밖에선 무도회를 시작하지 못해 젊은 귀족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이비가 테라스에서 나오자 이비를 찾아다니던 카셀이 성큼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이비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고, 귀족들은 사교계의 황제와 차기 성녀에게 기꺼이 무대를 양보해 주었다.
연주가 달콤하게 바뀌었고, 이비와 카셀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청초한 여자는 의외로 잘 어울렸다. 분위기만 다를 뿐 그들의 스텝은 똑같이 능숙해서, 귀족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사정은 겉보기와 조금 달랐다.
“웃어, 반지도 돌려줬잖아.”
이비가 생글생글 웃으며 카셀의 무표정을 지적했다. 그래서 카셀도 그윽이 미소 지으며 이를 갈았다.
“곱게 돌려준 척하지 마라…….”
“어디서 이를 갈아, 이 돼지가.”
“크윽…….”
그들은 목소리를 낮춘 채 싸우는 것으로 모자라 서로의 발을 걸고 발등을 밟으며 신경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밤이 깊어지자, 이비와 카셀은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 후 몬트라 저택의 어느 방으로 향했다.
그 방에선 하인들이 침대에 누운 누군가를 보살피고 있었다.
“상태는?”
“상처에 비해 양호합니다. 잘 자다가 방금 막 깨어났습니다.”
카셀의 물음에 하인이 옆으로 비켜서며 대답했다. 그러자 침대에 누운 소년이 등불 아래 드러났다.
붕대를 칭칭 감은 소년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카셀을 보고 눈을 빛냈다. 그가 자길 구해 준 걸 아는 모양이었다.
카셀의 손짓에 하인들이 물러나자, 이비가 작게 중얼댔다.
“당신이 이 애를 데려갈 줄은 몰랐어.”
“……알아서 할 거니까 상관 마.”
“퍽이나.”
카셀의 반항에 이비는 코웃음을 쳤다.
몬트라의 저택에서 치료받는 이 소년은 다름 아닌 밤의 일족, 새장에 갇혀 화살 세례를 받던 바로 그 꼬마였다.
그날 소년은 크게 다친 채 살아남았다. 그래서 카셀은 그를 티엔다로 데려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밟히기도 했고, 가면 쓴 밤의 일족으로부터 목숨을 구한 게 이 아이 덕분이기도 해서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카셀의 연민과 별개로, 이비는 이 소년에게 따로 볼일이 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비가 카셀을 밀며 소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비가 다가오자 소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소년은 이비를 대놓고 경계했다. 이비가 카셀을 괴롭히고 막 대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년이 입을 다문 채 이비를 노려보자 카셀이 끼어들었다.
“이름 말해 봐.”
카셀의 말에 소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엔테.”
그렇게 속삭인 소년의 두 눈은 신비로운 보랏빛이었다.
“하…….”
이비는 소년, 엔테의 대답에 탄식을 뱉었다.
지난 그믐, 엉망이 된 투기장에서 이비는 이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이 뱀과 똑 닮았다는 걸 곧장 알아챘다.
그래서 설마 했는데 이름도 같다니.
같은 얼굴에 같은 이름, 게다가 밤의 일족이라는 특성까지. 이게 우연일 리는 없겠지.
뱀과 이 소년의 차이는 나이대와 머리 색깔뿐인데, 심지어 이 소년의 연갈색 머리카락도 뱀처럼 부드럽게 곱슬댔다.
“누가 지어 준 이름인지 물어봐.”
“아, 그냥 얘가 묻는 말에도 대답해.”
카셀은 이비의 채근에 짜증을 내며 소년을 다그쳤다. 그러자 소년이 눈치를 보다가 중얼댔다.
“엄마가…….”
엄마가 지어 준 이름. 그럼 원래 이름이라는 뜻이다.
이비는 내친김에 더 캐물었다.
“너, 투기장에서 다른 밤의 일족을 만난 적 있어? 가면 쓴 사람 말고, 또 다른 사람.”
엔테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없어? 그 가면 쓴 밤의 일족은 그쪽이랑 한패던데, 너한텐 접근 안 했어?”
이비가 재차 추궁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비는 끈질겼다.
“밤의 일족 둘이 너 빼고 접촉했던 건 알았지? 그런데 알면서 가만히 있었던 거야? 정말?”
“으……!”
고개를 젓던 엔테가 돌연 귀를 막으며 칭얼댔다. 동시에 이비의 머리 옆으로 무언가 스쳤다.
챙강!
동시에 이비의 뒤에 있던 창문이 깨졌다. 그리고 이비의 머리를 장식한 리본 하나가 툭 끊어져 나풀나풀 추락했다.
‘……나 방금 공격당한 거야?’
이비는 놀라서 귀를 막고 씩씩대는 엔테와 깨진 창문을 번갈아 보았다.
아, 순한 앤 줄 알았는데 수틀리면 공격하는 애였구나. 하긴 큰 엔테도 제정신이 아니었지, 내가 깜빡했네!
겁이 난 이비는 직접 묻는 대신 카셀에게 속닥였다.
“뭐?”
“물어봐, 빨리.”
카셀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쳐다봤지만, 이비는 그의 어깨를 내리치며 채근했다. 그 무례한 손찌검에 카셀은 짜증스레 입을 뗐다.
“신이 누구야?”
“신……?”
카셀의 목소리에 엔테가 고개를 들었다.
이비가 카셀에게 다시 속삭였고, 카셀은 마지못해 말을 전했다.
“네가 아는 신은 어떤 신이야?”
“……신은, 엄마가 기도하는…… 신.”
엔테의 대답은 모호했다. 비스의 평범한 아이들이 할 법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비는 이 엔테의 말과 다른 엔테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널 죽이러 왔어.
―신께서 그걸 바라시니까.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릿속에서 이어져, 이비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
이비는 혼자 심각해져서 탑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카셀은 이비 아리아테의 마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아, 젠장…….”
녹초가 된 카셀은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졌다.
입장 정리에 연회 준비에 원로들의 잔소리까지, 정녕 긴 하루였다. 문제는 이런 나날이 앞으로 계속될 예정이라는 거였다.
이비에게 저택도 새로 지어 줘야 하고, 이비가 성녀가 되는 날엔 이비 탄신제까지 열어 줘야 한다.
굉장히 아니꼽지만 반항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비를 적대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뼛속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고, 지금은 그럴 힘도 없기 때문…….
“헉!”
침대에 늘어져 있던 카셀이 돌연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고 식은땀이 흘렀다.
비스에 다녀온 후 카셀은 이따금 이렇게 호흡곤란을 겪었다. 그 후엔 어김없이 그날의 죽음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종잇장처럼 찢기던 인간들, 그 위에서 웃는 가면.
그날 목격한 지옥의 단면은 카셀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망막에 달라붙은 것처럼 눈을 감아도 떠올랐고, 잠으로 도망쳐도 악몽이 되어 쫓아왔다.
티엔다에 돌아온 후에도 카셀은 이따금 그날로 끌려갔다.
그래서 이비에게 설욕을 시도하는 대신, 오히려 묻고 싶었다.
왜 너는 아무렇지 않냐고, 정말 괜찮은 거냐고. 그렇다면 나도, 도와 달라고.
헐떡이던 카셀은 겨우 진정하며 다시 널브러졌다. 그러곤 흐느끼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문밖에서 두런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그 아이가 와서…….”
카셀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가 호위의 대답에 미간을 좁혔다.
그 아이라니, 저렇게 칭할 녀석은 하나뿐이다.
“……들여보내.”
카셀은 얼굴을 쓸어내리는 사이 문이 열렸다.
이윽고 붕대를 칭칭 감은 엔테가 방으로 살그머니 들어왔다.
어린 엔테는 어쩐지 주눅 든 얼굴로 카셀에게 눈인사하더니, 멋대로 방을 가로질러 의자에 앉았다.
카셀은 의아해하다가, 녀석에게 예의나 상식이 모자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무슨 일이야?”
“지켜 줄게요.”
“뭐?”
“내가, 지켜 줄게요…….”
소년이 중얼대는 소리에 카셀은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이건 무슨 개도 아니고,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으려고 하네.
카셀은 됐으니 나가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아까 등 뒤를 덮친 두려움이 퍼뜩 떠올랐다.
“……별로 필요 없지만, 정 원한다면 거기 있지 말고 저쪽 소파에서 자.”
잠시 갈등하던 카셀은 소년을 배려하는 척 소파를 가리켰다. 그러곤 설렁줄을 당겨 이불과 베개도 안겨 주었다.
소년이 제 몸에 딱 맞는 소파에 파묻히듯 눕자 카셀은 왠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이 안도를 들키기는 싫어 일부러 소년을 등지고 잠을 청했다.
자신을 구한 소년이 등 뒤를 지키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간만에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한편 카셀이 잠드는 동안 엔테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엔테의 엄마는 늘 기도했다. 구해 달라고, 제발 구해 달라고.
그러나 신은 끝내 엄마를 구해 주지 않았고, 그래서 엔테는 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엔테는 이제 신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때, 당신이 찾아왔으니까.
엔테는 눈이 감기는 걸 억지로 참으며 카셀의 등을 바라보았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다른 사람이 날 지켜 준 건 처음이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지켜 줄게요, 나의 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