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이비 아리아테의 유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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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이비 아리아테의 유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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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이비 아리아테의 유쾌
2023.04.27.
오늘은 정화식이 열리는 날이다.
로블레 투하가 성녀가 된 후 꼭 천 번째로 열린, 현 성녀의 마지막 정화식이었다.
그러니 여느 때보다 주목받아야 마땅한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탑이 텅 비었다.
의례적으로 자리를 지키는 대귀족도 라우렐 대공만 참여했을 뿐, 바옌 공작이나 몬트라 후작은 보이지 않았다.
성녀 발탁을 앞두고 열린 마지막 정화식은 그토록 싸늘한 무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비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빈 호수에 울려 퍼졌지만, 늦게라도 찾아오는 이는 끝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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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초라한 정화식이 끝나고 정화자들은 탑의 최상층에 모였다.
공식적으로 해산하기 전에 그간 함께한 동료끼리 회포를 풀기 위해서였다.
동쪽에서 몰려온 구름으로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하늘 아래 우아한 티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그곳에서 화사한 본 모습으로 돌아온 영애들은 선물을 주고받으며 졸업을 만끽했다.
“마냐냐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오늘로 끝이네요.”
“매주 탑에 모이던 시간이 그리울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화기애애함 속에서 혼자 입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비 아리아테였다.
영애들은 이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서로 건네는 선물도 그쪽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이비가 안 보이는 것처럼 굴었다. 절반은 이 상황을 즐겼고, 나머지 절반은 눈치껏 분위기를 맞추는 중이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두고 저들끼리 도란 대길 한참, 어느 장난기 많은 영애가 이비에게 다가왔다.
“아리아테 양,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살가운 접근에 이비가 놀라자, 영애는 방긋 웃으며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괜찮다면 받아 주시겠어요?”
두 손에 올라가는 납작하고 가벼운 상자였다.
“열어봐요.”
이비가 그 상자를 받고 쳐다만 보자 영애가 부추겼다. 그러자 다른 영애들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노골적인 흥미에 이비는 머뭇대다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엔 곱게 접힌 천이 있었다. 손수건인가 싶어 펼쳐보니 그것의 반투명한 재질이 드러났다. 손수건이 아니라 베일이었다.
“우린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아리아테 양은 계속 탑에서 노래해야 하잖아요. 그러니 필요할 거예요. 모두를 위해서.”
선물한 영애가 애틋하게 말하자 구경하던 영애들은 황급히 부채를 들거나 딴 곳을 보았다. 웃음이나 민망함을 참기 위해서였다.
등꽃제 이후, 귀족들은 이비를 대놓고 역겨워하기 시작했다. 오늘 정화식 자리가 텅 빈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건넨 베일의 의미는 뻔했다. 네 처지를 알고 죽은 듯이 지내라는 노골적인 면박이었다.
“어디 잘 어울리나 보여 줘요.”
영애가 베일을 써 보라며 졸랐다. 하지만 이비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걸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이비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영애가 걱정하는 척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네, 그다지…….”
“어머, 어떤 점이요?”
“날 비웃으려고 준비했다는 점이요.”
이비의 솔직한 대답에 영애가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그렇게 매도하시다니 너무 슬퍼요. 아리아테 양을 응원하려는 것뿐인데…….”
그러곤 속상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해할게요.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아리아테 양일 테니까요. 다만 아리아테 양이 이렇게 솔직한 분인지 몰랐네요. 이게 바로 밑 대륙의 순박함……이군요.”
“순박함이라뇨, 꾸밈없는 사람이랑 들킨 사람이 같나요?”
그때 다른 영애가 덧붙였고 결국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영애들이 실소를 참지 못해 다시 입을 가렸다. 미엘은 그걸 느긋이 관망했고 리오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자신의 찻잔만 노려보았다.
“어쨌든,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이건 아리아테 양이 아니라 티엔다의 모두를 위해 권하는 거니까요. 자, 어서 써 보세요.”
그 영애는 퍽 얄밉게 이비를 괴롭혔다. 이비가 베일을 쓸 때까지 계속 이럴 작정 같았다.
“적당히 하시죠.”
그걸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리오 투하였다.
“로블레 투하가 마냐냐의 은총을 높이기 위해 베일을 쓴 걸 알면서 그런 선물을 고른 건가요? 그게 오랜 시간 헌신한 성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리오의 화난 목소리에 베일을 선물한 영애가 크게 당황했다.
“그런 의도는 없었어요.”
“그렇다면 부디 의도를 갖고 행동하길 바라요. 생각이 못 미치는 게 아니라면요.”
리오의 혹독한 비판에 영애의 낯이 붉어졌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영애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몬트라 후작님께서 예정에 없던 연회를 여신다죠?”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기엔 창피한지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무슨 중대 발표를 하신다는데, 정화식 날 급히 초대장을 보내신 걸 보면 정말 중요한 사안인가 봐요.”
영애는 그렇게 말하며 이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얼굴엔 각오하라는 으름이 가득했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있지만, 그 영애는 이비를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장난기가 많아 먹잇감이 나타나면 물어뜯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 영애는 자리가 파할 때까지 이비를 실컷 걸고넘어졌고, 이비는 우울한 얼굴로 견뎠다.
그로써 그 영애는 아주 유쾌해졌다.
하지만 그 기분은 딱 반나절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
그날 저녁, 이비에게 베일을 선물한 장난꾸러기 영애는 아득한 기분으로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 선 아리아테는 다 죽어 가던 오전과 달리, 자애가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몬트라 후작님의 바로 곁에서.
이곳은 몬트라 후작저. 그 화려한 홀에는 티엔다 귀족들이 중대 발표를 듣기 위해 잔뜩 모여 있었다.
하지만 이비가 단상 위에서 등장할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성녀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몬트라 후작의 에스코트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지난 등꽃제에 나와 아리아테가 일으킨 물의로 등꽃 향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여러분께 유감의 말을 전합니다.”
카셀이 여느 때처럼 유려하게 입을 뗐다.
하지만 귀족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왜인지 몬트라 후작과 이비 아리아테가 화해하는 분위기인데, 갑자기 이래 봤자 공감이 되지 않기 떄문이다.
아리아테가 후작님께 빌기라도 했나? 무슨 소용이야, 이미 속을 다 들켰는데.
귀족들이 미심쩍게 바라보았지만 카셀은 의연히 말했다.
“지난 그믐, 나와 아리아테는 비스에서 마냐냐의 은총을 악용하고 치세를 어지럽히던 세력을 소탕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브릭령에서 벌이던 대대적인 악업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선 아리아테입니다.”
귀족들은 카셀의 이야기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리아테가 이 사태를 알렸지만, 내가 바로 움직이면 브릭 자작 일당이 증거를 인멸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일부러 소란을 피우고 근신하는 척 잠행에 나섰고, 비스에서 브릭 자작의 만행을 확인했습니다. 이 내용은 이슬라 경이 설명할 것입니다.”
이어진 말에 귀족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바쁘게 눈을 굴리며 수군대는데, 날렵하게 생긴 남자가 단상 앞으로 나왔다. 바옌 공작의 오른팔인 이슬라 경이었다.
그가 비스의 폐허에서 벌어진 참극을 귀족들에게 소상히 알렸다. 그 설명에 귀족들은 경악하고 탄식하더니 이내 치를 떨었다.
“바옌 공작님께서는 이 상황을 엄중히 여기시고 티엔다의 영광과 비스의 평화를 위해 책임 있는 자를 엄히 처벌하기로 하셨습니다. 또한 바옌 군의 해이가 일으킨 사태임을 통감하는바, 바옌 또한 뿌리부터 쇄신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슬라 경이 보고를 마칠 때쯤, 귀족들은 태풍이 휩쓸고 간 충격에 시달렸다.
대귀족이 통감이나 쇄신 같은 말을 입에 담는 건 평화로운 티엔다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다들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카셀이 다시 나섰다.
“나 또한 티엔다비스의 재상으로서 부덕하였습니다. 내게도 이 일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는바, 과오를 뉘우치고 잘못을 바로잡을 것을 몬트라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카셀이 음울한 얼굴로 몸을 낮추자 귀족들이 또 한차례 술렁였다.
그들은 몬트라 후작과 이슬라 경이 한 말을 절반도 소화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등꽃제 때 이비와 카셀이 벌인 난장과 이후 이비의 저택 방화 사건, 카셀 몬트라의 원수 집결 등이 전부 의도했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이 믿건 말건, 카셀 몬트라는 폭력적으로 주장을 펼쳤다.
“더하여 내 과오를 깨닫게 해 준 아리아테를 이전과 변함없이 차기 성녀로 지지함을 밝힙니다. 나를 위해 비난을 감수한 아리아테를, 여러분 또한 걸맞게 존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카셀이 한 발 뒤에 있던 이비를 앞으로 불러냈다.
이비가 화려한 드레스를 끌고 나오자, 이슬라 경도 엄중히 덧붙였다.
“바옌 공작님 또한 아리아테 외에 다음 성녀는 없음을 정히 하셨습니다.”
두 대귀족이 지지를 표하자 이비가 기품 있게 허리를 숙였다.
그게 지난 소란에 대한 사죄인지 성녀로서 잘 부탁한다는 인사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귀족들은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누군가 낸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다들 열렬히 손뼉 치게 되었다.
‘후후후…….’
그리고 이비는 쏟아지는 갈채 속에서 남몰래 웃었다.
다들 잘 속아 넘어간 모양이다. 카셀의 허랑방탕한 친구들조차 그게 다 계획이었다니, 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티엔다 귀족들도 바보는 아니다. 그러니 평소 같으면 이런 껴맞추기식의 해명은 통하지 않지만, 같이 터진 일이 워낙 컸다.
비스 귀족의 무분별한 작태는 물론이고 몬트라와 바옌의 잘못까지 각각 드러난 탓에 사안은 엄중했고, 설마 이 일이 이비의 치부를 가리는 데 이용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들 시원하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 연회는 아리아테가 정화자로서 마지막으로 참여한 정화식을 기념하는 것이니 다들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카셀의 확언과 함께 단상 뒤편의 문이 열렸다. 그 뒤로 아름다운 메인 홀이 드러났다.
놀라운 소식 후 물 흐르듯 이어진 만찬과 음악에 귀족들은 거듭 감탄했다.
그들은 연회장으로 향하며 지난 등꽃제를 시급히 재평가했다.
하긴 이상했지, 이비가 후작님의 사생활을 어떻게 다 알겠어. 알더라도 자기를 드러내고 투서를 돌리는 건 말이 안 되지.
후작님도 참 대단하셔. 암행을 위해 자기 약점을 이용하다니, 저런 면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
아무래도 아리아테가 설득한 것 같아. 징계도 불사하고 비난도 감수하고 아리아테는…… 정말…….
차기 성녀님을 향한 찬사가 끝없이 이어지는 한편, 연회장 구석에선 또 새로운 씹을 거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아리아테를 욕하던 사람들은 난처하겠군.”
“이비한테 베일을 선물한 영애도 있다는데요?”
“이야, 무섭네. 그게 누구예요?”
아까부터 안색이 파리하던 어느 영애는 자기 얘기가 나오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영애는 좌불안석 눈치를 보던 중, 묘한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향해 잔잔히 미소 짓는 이비였다.
이비는 그 영애를 향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서 잠깐 천지 분간을 못 했다는 이유로 영영 고달파지게 생긴 아가씨는 한없이 슬퍼졌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함정에 빠트렸지만, 이비는 그 영애를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물어뜯으러 오는 녀석이 있다면 똑같이 물어뜯어 줄 뿐이었다.
그로써 이비는 아주 유쾌해졌다.
그리고 그 기분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