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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죽음의 아버지 (94/129)


94화. 죽음의 아버지
2023.04.24.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그쳤다.

하지만 짙은 먹구름 때문에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엔테는 아무도 없는 폐허에 앉아 일렁이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뭐…… 하고 있어……?”

“읍! 으읍!”

가면 속에서 웅얼대는 목소리와 틀어막힌 호소가 함께 들려왔다.

가면을 쓴 밤의 일족과 그에게 끌려온 브릭 남작이었다.

엔테는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그건 왜 가지고 왔어?”

“나도…… 가둘 거야…….”

키히힉. 가면이 소름 끼치게 웃었다.

겁에 질린 브릭 남작은 거센 고갯짓으로 입을 막은 천을 겨우 뱉어 냈다. 그러더니 숨도 돌리지 않고 소리쳤다.


“사, 살려다오. 제발 살려 줘, 다시 전처럼 대우해 줄 테니까……!”

브릭 남작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가면이 자갈을 움큼 쥐어 그의 입에 처박았기 때문이다.

브릭 남작이 피를 흘리며 흐느끼자 가면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커다란 돌을 주워 들었다.

브릭 남작이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그가 돌로 내리친 건 남작이 아니라 제 얼굴을 덮은 가면이었다.

쾅! 쾅! 쾅! 그는 거침없이 가면을 돌로 찍었고, 그 충격에 가면 틈으로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물쇠로 잠긴 가면을 기어이 부숴 버렸다.


“아……. 겨우 벗었어…….”

더는 가면이라 부를 수 없게 된 밤의 일족이 후련한 듯 중얼댔다.

긴 시간 가면을 쓰고 있던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머리와 수염은 뒤엉켜 덥수룩했고 씻지 못한 얼굴은 껍질이 다 일어나 있었다. 그래서 언뜻 노인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직 서른 살이 안 된 젊은이였다. 그리고 파야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지…… 가면이 얼마나 괴로운지…….”

“사, 사여 줘! 아아악!”

파야소가 애원하는 브릭 남작을 발로 으깼다. 물론 죽지 않을 만큼.

브릭 남작의 염려와 달리 파야소는 그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설령 죽여 달라고 빌어도 오래오래 살려 둘 예정이었다.

황망한 폐허에 비명과 웃음이 뒤섞였다. 사색에 잠긴 자에게 그 소음은 명백한 방해였고, 결국 엔테가 피로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좀 봐줘, 너희 동업자였잖아.”

“너…… 아는 게 많네…….”

파야소가 히죽 웃었다.

엔테의 말대로 파야소와 브릭 남작은 원래 동업자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브릭 자작 가가 밤의 일족을 이용할 생각을 하게 만든 발단이 파야소였다.

이들의 악연은 2년 전에 시작됐다.

2년 전 어느 날, 바옌 군 남부 브릭 령 소속 조사단장인 오르키 브릭은 어떤 밤의 일족을 조사하게 되었다.

그는 밤의 일족이 된 지 고작 두 달 만에 포획된 별 볼 일 없는 머저리였는데, 문제는 밤의 일족이 된 이유가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른 일이면 부하들에게 떠넘기겠지만, 밤의 일족과 그들의 숙원은 바옌 군 내에서도 고위직만 다룰 수 있는 정보였다. 그래서 오르키 브릭은 신물을 내며 직접 놈을 조사하게 되었다.

그로써 마주한 파야소는 지저분한 몰골을 가진 젊은 놈이었다.

그는 원래 떠돌이였는데 운 좋게 어느 인심 좋은 마을로 흘러가 거기서 여러 도움을 받다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후엔 마을의 허드렛일을 거들며 근근이 지냈는데, 그렇게 3년을 지내며 문제 한 번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을에 신월의 저주가 깃들며 모든 것이 변했다.

그 얌전한 청년이 밤의 일족이 되어 자신을 보살펴 준 마을 사람 열일곱 명과 죄 없는 소년 한 명을 학살하고 달아난 것이다.

그 일로 마을 사람들은 비통에 빠졌다. 어떻게 그 착한 사람을 악마로 만들어 은인들을 해치게 하냐며 하늘이 무심하다고 울었다.

하지만 바옌 군 상층부의 견해는 좀 달랐다.

밤의 일족이 되려면 우선 살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밤의 일족이 되면 가장 먼저 그 대상을 죽이는 것으로 숙원을 이룬다.

그렇다는 건 그 파야소라는 자가 착하고 얌전하다는 평판 뒤로 자길 도와준 이웃들을 지독히 증오했다는 뜻이다.

바옌 군은 이 내막을 알고자 했고, 오르키 브릭은 놈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로써 알아낸 사건의 전말은 기가 찼다.

우선 파야소는 친절한 마을 사람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불운하게 말려든 것에 불과했고, 파야소가 정말 죽이고 싶었던 건 마을의 부랑아 한 명뿐이었다.

그 소년은 열네 살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일고여덟 살 정도로 밖에 행동하지 못했다.

마음씨 착한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도 돌아가며 먹이고 돌봐 주었다.

파야소가 놈을 죽이고 싶어진 건 이것 때문이었다.

나는, 나는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먹고사는데 너는 뭔데, 네가 뭔데.

파야소는 이토록 고생하는 자신보다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잘 먹고 예쁨 받는 소년이 증오스러웠다.

그래서 매일 매일 죽이는 상상을 했고, 결국 밤의 일족이 되어 죽였다.

채찍에 맞은 파야소가 울부짖으며 자백했을 때 오르키 브릭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모질게 심문했고 파야소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 후에야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거지가 더 동정받는 거지를 질투해 밤의 일족이 되었다니, 그래서 열여덟 명이나 학살했다니. 가소롭고 같잖아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짜증이 난 오르키 브릭은 이 한심한 내용을 보고하기 전에 놈을 더 걸레짝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채찍을 휘두르던 중 엄청난 생각이 떠올랐다.

평소 사교장에서 여성들을 만나면 그가 어김없이 듣는 질문이 있었다.


―브릭 경은 밤의 일족을 직접 만난 적이 있으세요?

―저주는 어떻게 생겼나요?

―무섭지만 한 번은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죠?

잠깐, 이렇게 모자란 놈이면 구경거리로 써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몬트라 후작이 소금 구매 한도 얘길 꺼내던데…….

오르키 브릭은 파야소를 감옥에 처박아 두고 사촌인 브릭 자작에게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전했다. 브릭 자작은 이를 마음에 들어 했고, 매제인 브릭 남작에게 이 일을 위임했다.

파야소를 빼돌리는 건 쉬웠다. 빈 마차를 절벽에서 굴리고 이송 중 탈출한 것으로 처리했다.

파야소를 구슬리는 건 더 쉬웠다. 벌벌 떨던 시골뜨기는 향신료를 쓴 고기에 자신을 값싸게 넘겼다.

이후 소수를 대상으로 공개된 달구경은 성공적이었다.

이때만 해도 파야소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온갖 호사를 누렸다. 다만 문제는 그가 여전히 수배 중이라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거였다.

그가 계속 가면을 쓰고 나오자 몇몇 귀족이 이의를 제기했다. 왜 굳이 얼굴을 가리는지, 혹시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고심하던 중, 브릭 남작은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밤의 일족을 얻게 되었다. 눈동자에 밤하늘을 담은 아주 예쁜 소년이었다.

이쪽이 파야소보다 잘 팔릴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브릭 남작은 그 소년을 곧장 폐허의 투기장으로 데려왔다. 서로를 느끼는 밤의 일족의 특성을 모르고 한 일이었다.

파야소는 다른 밤의 일족을 느끼자마자 이 기척이 역겹다며 발광했다. 실은 예전처럼 웬 놈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는 것 같아 두려웠다.

결국 파야소는 몇 번이고 그 소년을 죽이려 들었고, 한 번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리고 아까운 실패를 끝으로 그는 자유가 박탈당한 채 자물쇠가 달린 가면을 쓰게 되었다.

몇 달 전, 엔테가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동업자인데…… 배신했지…….”

파야소가 낄낄댔다.

새장에 갇혀 있는 건 정말 지옥 같았다. 하지만 드디어 풀려났고, 증오스러운 브릭 남작도 수중에 놓였다.

하지만 파야소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브릭 자작도, 오르키 브릭도, 브릭이란 브릭은 모조리 잡아 조각내고 싶었다.

물론 브릭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파야소도 2년 전과는 달랐다. 그동안 투기장에서 충분히 죽였고, 이젠 동료도 있다.

파야소는 먼 하늘을 보는 엔테를 힐끗댔다.

그가 마음에 들었다. 새하얀 머리카락도 좋지만, 예쁜 얼굴이 왠지 친숙했다. 저렇게 곱상한 얼굴로 저주를 휘둘러 모든 걸 난자하는 모습은 황홀했다.

엔테가 새장에서 꺼내 줄 때, 파야소는 이미 그에게 홀딱 반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엔테는 그에게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파야소는 고심 끝에 중얼댔다.


“이비…….”

그 소리에 엔테가 파야소를 비로소 쳐다봤다.


“내가, 잡아 줄게…….”

파야소의 말에 엔테가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다정히 되물었다.


“네가 왜?”

“동료니까…….”

“다른 밤의 일족과 같이 있는 거 싫잖아.”

“괜찮아……. 익숙해…….”

“그래?”

엔테가 환하게 웃었다. 밤인데도 그가 웃으니 주위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


“잘됐다. 마침 네가 도울 일이 있어.”

파야소는 그 말이 그저 기뻤다. 그렇게 기뻐하는 파야소를 날카로운 저주가 꿰뚫었다.

푹, 푹.

엔테가 휘두른 칼날 같은 저주가 두 사람을 단번에 꿰뚫었다.


“어……?”

파야소는 얼떨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브릭 남작이 죽어 있었다. 다시 고개를 바로 해 밑을 보니 제 몸에선 피가 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상황을 가까스로 이해한 파야소가 괴성을 지르며 반격했다.

뱀처럼 솟구친 저주와 저주가 격돌했다. 모든 걸 잘라 내는 엔테의 저주와 검은 독기를 뿜어내는 파야소의 저주가 폐허를 더 갈아엎었다.

접전을 펼친다 싶더니, 엔테의 날카로운 저주가 파야소의 저주를 절단하고 그의 사지를 난도질했다.

파야소가 쓰러지자 엔테는 그의 머리를 지르밟았다. 그러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와준다고 했지?”

“으…… 극…….”

“그럼 뒤를 부탁해.”

엔테는 그 말을 끝으로 훌쩍 떠나 버렸고, 치명상을 입은 파야소는 그 자리에서 숨만 헐떡였다.


‘왜…….’

겨우 자유인데, 왜? 나만 왜?

파야소가 식어 가는 몸을 끌어안고 신음할 때였다. 낯선 기척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누가 와…….’

밤의 일족이었다.

동족의 기운을 느낀 파야소는 마지막 힘을 짜냈다. 여기서 죽든 어쩌든, 이쪽으로 오는 녀석을 죽일 작정이었다.

이유는 물론, 억울하니까.

파야소는 기척의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 역시 파야소의 기척을 느낀 듯 거리를 정확히 좁혀 오고 있었다.

한참 후, 드디어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체구로 보아 어린 소년 같았다.

혹시 그 녀석인가? 내 자릴 빼앗은 혐오스러운 꼬마.

파야소는 울화가 치밀어 소년을 매섭게 공격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 소년에겐 공격이 닿지 않았다.


“도망친 쪽이 뱀이었구나. 너는 미끼고.”

대신 단조로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소년은 앞선 공격에도 개의치 않고 파야소에게 걸어왔다. 그래서 파야소는 저 소년이 코앞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 충분히 가까이 오면 목을 비틀 생각이었다.

이윽고 소년이 파야소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고, 파야소는 소년을 덮치기 위해 팔을 치켜들었다.

그때 구름이 걷히며 별빛이 비쳤다. 그리고 소년의 모습이 하얗게 드러났다.

그 어린 소년은 새하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내려 묶고 밤처럼 깊은 눈으로 파야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야소는 그 소년, 유비아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를 보는 순간 몸이 덜컥 멈추며 입술이 절로 움직였다.


“아버지.”

아버지?

파야소는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을 멍청히 바라보는데, 소년이 그를 동정하듯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은 다정해 보였다. 그러나 그 손이 이마에 닿았을 때 파야소가 느낀 건 온기가 아니라 끔찍한 고통이었다.

파야소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소년은 멈추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마치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 모든 게 끝났다.

그리고 파야소는 스스로 깨달았다. 이것이 죽음인 것을.

이미 죽었는데 앞이 보였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은 모양이었다.

그가 자길 보는 걸 아는지, 소년이 말했다.

수고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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