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온 세상에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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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온 세상에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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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온 세상에 죄송
2023.04.20.
“싫은데.”
이비의 목소리가 상쾌했다. 그래서 카셀은 귀를 의심했다.
이비는 살려 달라는 애원을 무시한 채 아주 예쁘게 웃고 있었다.
카셀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 이비를 멀거니 바라보았고, 그 멍청한 얼굴에 이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탑의 허락 없이 노래하는 건 금기예요.”
이비가 가르치듯 말하자 카셀은 설핏 굳었다. 그러더니 이내 온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음했다.
“장난하지 마,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요?”
이비가 놀랍다는 듯 묻자 카셀의 눈초리가 가여워졌다.
설마 이런 상황인데 아직도 화를 내는 거야? 나 죽어 가고 있단 말이야. 일단은 살려 주고 얘기해야지, 어?
카셀은 이비의 냉정함이 당황스러웠다.
싸울 순 있지만, 서로 엿 먹일 수도, 궁지에 몰 수도 있지만 상대의 죽음을 방관하는 건 논외였다.
대귀족인 카셀 몬트라의 최저선은 지극히 높았고, 그가 상정하는 패배도 주위의 비난, 금전적 손실, 입지의 축소나 굴욕감 같은 것이지 죽음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열 일 제쳐 놓고 나부터 살리는 게 카셀 몬트라의 상식이었다.
“본인 입으로 그랬잖아요. 나설 데랑 나서지 않을 데를 알아야 한다고. 못 배워서 금기가 왜 금기인지를 모른다고. 평민에게 성녀는 너무 과분하다고.”
하지만 이비는 그 안일한 상식에 어울려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조심하려고요. 명색이 성녀 후보인데, 적어도 못 배웠다는 얘긴 듣지 말아야죠.”
“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당연히 무사하죠. 누가 날 탓하겠어요, 여기서 벌어진 일은 아무도 모를 텐데.”
이비의 잔혹한 말에 카셀은 아파하며 기침을 토했다. 이비의 염장 때문인지 무뎌졌던 고통이 다시 느껴졌다. 그래서 카셀은 괴로움에 헐떡이며 악을 썼다.
“알겠어, 알겠다고! 내가 잘못했으니까 살려줘. 탑의 징계는 내가 무마할 테니까, 널 성녀로 만들어 줄 테니까,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테니까 제발 좀 살려 줘!”
카셀은 통렬히 항복했다. 이 말이 또 어떻게 변할진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진심이었다. 그는 이토록 절박했다.
하지만 이비는 이마저도 간단히 무시했다.
“못 믿겠어요. 거짓말을 워낙 자주 하셔서.”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겠냐고……!”
“지금은 진심이어도 나중엔 아닐 수 있잖아요. 한두 번이어야지?”
“그럼 뭘 어쩌란 거야!”
“그건 신뢰받고 싶은 사람이 직접 생각해야죠,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라.”
이비의 고압적인 태도에 카셀은 연거푸 탄식했다. 당장 죽어 가는 사람한테 비위를 맞추라니, 이게 인간이 할 소리인가 싶었다.
그래서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이비가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정 믿음을 주고 싶으면 담보라도 내놔요.”
“담보……?”
“가지고 있잖아요, 몬트라의 인장 반지.”
이비의 요구는 해맑았다. 그래서 카셀은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그는 여전히 비를 맞으며 이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가까스로 날숨을 토했고, 그와 함께 억장이 무너졌다.
더러운 망치로 영혼을 깨부수는 것 같았다. 심장과 이어진 혈관이 낱낱이 끊긴 듯 괴로웠다.
그건 괘씸함이나 노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 훨씬 더 날것의 고통을 떠넘기는 이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이토록 절박한데, 이 와중에 느긋하게 잇속을 챙기는 이비 아리아테가 악마처럼 느껴졌다. 검게 썩어 가는 내 생명과 제 사리사욕을 태연히 저울질하는 저 여자가 미치도록 징그러웠다.
이 악독한, 비열하고 역겹고 추악하기 짝이 없는 계집.
온갖 욕이 명치 부근에 맺혔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목구멍을 넘지는 못했다. 울분이 밀어닥쳐 미칠 것 같지만 그럼에도 카셀은 이비의 자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말 한마디 못 하고 그저 쳐다보는데, 이비가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왜, 내가 네 목숨을 가지고 노니까 억울해? 너는 절박한데 내가 장난치니까 서러워?”
이비의 조롱 섞인 물음에 카셀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비는 눈도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도 그랬잖아, 내가 절박할 때 잘만 가지고 놀았잖아.”
“그래도 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적당히 혼만 내 주려고 했는데 내가 물고 늘어져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이비가 그의 할 말을 정확히 가로챘다. 그 바람에 카셀은 말문이 막혔고, 이비는 매몰차게 웃었다.
“나는 그게 더 괘씸해. 난 너 때문에 끝장날 뻔했는데 넌 아직도 그걸 모른다는 게.”
카셀은 그제야 눈치챘다.
어스름한 불빛과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이비의 얼굴이 무섭도록 싸늘하다는 걸. 이 서슬에 비하면 직전의 조롱은 차라리 다정했다는 것도.
“이 투기장만 해도 그래. 너도 알지? 여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비의 한숨 섞인 물음에 카셀은 덜컥 굳었다. 그의 동요를 눈치챈 듯 이비가 혀를 찼다.
“네가 만든 거야. 그러니까 지금 네 꼴은 자업자득이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네가 죽인 거야.”
“웃기지 마!”
카셀이 버럭 소리쳤다.
“나는 상관없어! 난 몰랐다고!”
그는 격렬히 부정했다. 마치, 죄를 들킨 사람처럼.
“그게 왜 내 탓이야, 내 호의를 악용한 버러지가 벌인 일인데 왜 내 탓이야! 나는 여기 뭐가 있는지도 몰랐어!”
카셀은 필사적이었다. 살려 달라고 비는 것도 잊은 채 변명할 만큼.
“그래, 넌 몰랐어.”
그래서 이비는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다만 그 안에 위로나 동정은 없었다.
“모르니까 소금이 어디로 쏠리는지 의심 한 번 안 했지. 그게 어떻게 쓰이든 몰라도 되니까. 가난한 남부에서 매달 거금을 내놔도 별로 깊게 생각 안 했을 거야. 어차피 금화는 다 똑같이 생겨서 그게 사람을 사냥해서 번 돈인지 뭔지 굳이 알게 뭐야.”
“아냐, 나는 정말…….”
“그런데 이제 알았으니까 양심도 지키고 싶어?”
이비의 한마디가 카셀을 잔인하게 관통했다.
입을 떼던 카셀은 희게 질려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러곤 떨리는 눈으로 이비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천사로, 그다음엔 악마로 보였던 이비가 또 새로운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두려움을 정확히 꿰뚫어 본 이비는 어느새 두려운 심판자가 되어 있었다.
“더러운 일은 하급 귀족에게 떠넘기고 차려진 밥상만 얻어먹다가 그게 어떻게 차려지는지 아니까 갑자기 역겨웠어? 근데 네가 여기서 새삼 충격받는 게 더 양심 없는 짓이야. 네 주제에 누구를 벌하고 누구의 죄를 사한다는 거야?”
카셀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비의 말처럼 그는 밑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인간을 사고팔고 죽이는 걸 구경하며 논다는 소릴 건너 듣긴 했지만, 자신과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 끔찍한 곳이 자신과 연관된 것을 알았을 땐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내 책임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곳의 귀족들을 경멸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선을 긋고 모든 걸 덮어 책임뿐만 아니라 마음의 짐도 덜 생각이었다.
그 비겁한 속내를 다 들켜 버렸다. 카셀은 수치스럽고 비참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너랑 똑같이 죽어 가고 있었어.”
그런 카셀을 이비가 친히 들쑤셨다.
“지난달, 내가 주제넘게 살린 사람들도. 그런데 네가 감히 나한테 살려 달라는 소릴 해? 미친 거 아냐?”
매몰찬 질책이 비보다 아프게 전신을 내리쳤다.
“넌 물론 그마저도 몰랐을 거야. 사람이 죽는 게 어떤 건지 전혀 모르니까 똑똑하게 큰 그림을 그렸겠지.”
그 순간 카셀의 뇌리에 자신이 했던 말들이 떠올렸다.
―거기서 성녀님 노릇을 톡톡히 하셨다던데, 안 되지 그러면.
―밑 대륙 인간들이 한번 들러붙기 시작하면 얼마나 끈질긴데.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 낸 카셀은 가슴이 미어지고 으깨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려고.”
숨도 잘 못 쉬는 카셀에게 이비가 냉정히 고했다.
“억울해하지 마. 누구나 한 번은 기회가 있어야 하지만, 너는 매 순간이 남에게 없는 기회였잖아. 양심이 있으면 억울해하지 말고 죽어.”
그 말을 끝으로 이비는 돌아섰다.
그대로 몇 걸음을 떼는데, 이비의 발치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굴러 왔다.
반지였다. 몬트라 가의 전권이 담긴, 카셀의 인장 반지.
“한 번만…….”
이비가 반지를 쳐다보는데, 뒤에서 실낱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이제 제대로 할 테니까…….”
돌아보니 카셀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그리고 울고 있었다.
카셀은 무서웠다. 그리고 후회스러웠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런 소린 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내린 게 그 한마디였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결국 카셀은 우는 걸 숨기지 못하고 소리 내어 흐느꼈다.
이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반지를 주웠다. 그러곤 그의 옆으로 돌아가 싸늘히 말했다.
“그럼 나한테 정식으로 사과해.”
“미, 미안해.”
“뭐가 미안해?”
“성녀 자리 가지고 장난쳐서.”
“또.”
“저택에 불 질러서…….”
“또.”
“……반항 못 할 거 알고 괴롭혀서.”
“어떻게 괴롭혔는데?”
“옷 입은 걸 지적하고, 고대어를 모른다고 놀리고, 술잔에 향수 타서 먹인 거랑 신발 뺏어서 개한테 던진 거…….”
“……너는 진짜.”
“정말 미안해…….”
이비의 목소리가 한층 음산해지자 카셀이 질질 짜며 빌었다.
그 모습이 불쌍할 법도 한데, 한 많은 이비는 카셀의 어깨를 툭툭 차며 그를 일으켰다.
“무릎 꿇고 제대로 사과해.”
“미안해…….”
“존댓말로.”
“미안합니다…….”
“온 세상에 사과해.”
“죄송합니다…….”
“돼지한테도 사과해.”
“죄송해요……!”
“짝사랑을 조롱한 것도 사과해!”
“죄? 죄송합니다!”
주섬주섬 무릎 꿇은 카셀이 오열하며 사죄했다. 그러곤 비에 젖은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판결을 기다렸다.
“듣고 보니 새삼 열 받네. 야, 그냥 죽어.”
이비의 모진 타박에 카셀은 세상 잃은 얼굴로 이비를 바라보았다.
그는 퍽 청순한 얼굴로 한동안 눈물만 뚝뚝 흘리더니, 이내 땅에 머리를 박으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비통한 모습에 이비가 심드렁히 말했다.
“장난이야, 정화는 진작에 했으니까 엄살 그만 부려.”
“흑, 흐어엉, 흐으, ……뭐?”
카셀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이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비는 그 멍청이가 참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니까 그렇게 멀쩡히 앉아 있지, 바보.”
생각해 보니 카셀은 어느새 멀쩡히 앉아 있었다. 아까만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는데.
카셀의 일방적인 매도와 달리, 이비는 정말 죽을락 말락 하는 사람을 다그칠 만큼 대범하지 못했다.
게다가 독 안개에 휘말린 다른 사람도 많은데 이놈 하나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정화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내고 회복 중인 놈을 갈군 거였다.
완벽히 농락당한 걸 깨닫자 카셀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 가득 찬 비애가 분노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이, 망할……!”
격분한 카셀이 이비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성한 몸이 아니었고, 이비는 그 허접의 어깨를 발로 밀어 호되게 넘어트렸다.
“이것 봐, 기껏 살려 줬는데 고마워하긴커녕 성질이나 부리지.”
“내 반지 내놔!”
“줄 땐 언제고?”
“너……!”
“아니지.”
이비가 엎드린 채 발악하는 카셀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더니 땅을 짚은 그의 손등을 지그시 밟으며 속삭였다.
“이비 님이라고 불러, 이 돼지 자식아.”
이비의 폭거에 카셀은 충격을 받은 듯 이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어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안하무인의 대명사였으나 저보다 더한 놈을 만나는 바람에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카셀 몬트라는 결국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비는 카셀이 조금 좋아졌다.
돼지 소리를 듣고 비 맞으며 우는 서른 살의 미남이라니.
계속 이렇게 있어 준다면 지난 앙금을 풀고 사이좋게 지내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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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시온은 카셀 못지않게 심경이 복잡했다.
‘……독하다.’
자기보다 열 살 많은 대귀족 남자를 저토록 처참히 울리다니.
점성술사의 마지막 기억 속 활기차고 귀엽던 이비는 대체 어떤 인간으로 성장한 걸까.
시온은 빗속에서 승리를 만끽하는 이비를 떨떠름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가렸다.
아까 이비가 불쌍한 얼굴로 한 말이 생각나서.
―무릎을 다쳐서 못 일어나겠어요.
그런 것 치고는 걷기도 걷어차기도 무척 잘한다.
시온은 저 이비 아리아테가 엄살을 피운 걸 알고 기분이 꽤 좋아졌다.
이 와중에 참 뜬금없지만, 그는 이비와 관련해서 처음으로 상당한 승리감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