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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괜찮아졌어요 (92/129)


92화. 괜찮아졌어요
2023.04.17.


부족한 숨.

목을 죄는 손길.

컴컴하게 점멸하는 시야.

어둠을 뒤집는 섬광, 귀를 찢는 굉음, 그 틈에 파묻힌 갈라진 비명.

다시 폐로 들이치는 산소와 영문 모를 충격, 그리고 밀려오는 아득함까지.

천벌이라도 받는 느낌에 이비는 까무룩 졸도할 것만 같았다.


“이비!”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가쁜 숨을 내쉬며 억지로 눈을 떴다.

이비는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목을 조르던 밤의 일족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신없는 발소리, 다급한 호흡, 그리고 절박한 목소리까지.

이윽고 흐릿한 시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비 맞은 생쥐 꼴로 나타난 시온 라우렐 백작이었다.

아, 저게 뭐라고 이렇게 마음이 놓이지?

이비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기다렸다. 두리번대는 시온 라우렐이 나를 찾아내기를, 그리고 달려오기를.

기대대로 시온은 곧 이비를 발견했다. 황급히 달려왔고, 그다음엔 이비를 보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가 마음을 놓는 모습에 이비는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이비가 가만히 쳐다만 보자 짧게 안심했던 시온이 다시 심각해져서 물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졌어요…….”

이비의 진심뿐인 대답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걸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비는 그런 백작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되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당신의 집사가 알려 줬습니다.”

당신이 여기 혼자 있고 어떤 밤의 일족이 당신을 노린다고.

시온은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지만, 내리 멍하던 이비가 퍼뜩 놀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디에스를 만났어요? 언제, 지금 어디 있어요?”

“근처 여관에 유비아와 함께 있습니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이비가 급히 되묻자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껏 구하러 온 사람은 본체만체하다가 집사만 극성스럽게 챙기는 이비가 얄미워서.

그래서 이비를 잠깐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느라 늦었습니다.”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말에 이비가 한숨을 내쉬자, 시온은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였다. 그러곤 잠시 자괴감에 시달렸다.

네가 고생한 건 다 그놈 때문이야. 시온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자신이 꽤 비참했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돌렸다.


“일단 일어나시죠.”

시온은 주저앉은 이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비는 그 손을 멀뚱히 쳐다만 봤고, 그래서 시온은 또 한 번 후회했다.

그래, 이 도도한 이비 아리아테가 내 손을 잡을 리 없지.

시온이 착잡한 기분으로 손을 거두는데, 이비가 뜻밖의 말을 중얼댔다.


“무릎을 다쳐서 못 일어나겠어요…….”

지금껏 시온이 들은 것 중 가장 불쌍한 목소리였다.

그 처량한 목소리에 시온은 대번에 심각해졌다.


“심하게 다쳤습니까?”

“아뇨, 완전 멀쩡해요.”

앞뒤가 다른 대답에 시온이 미간을 좁히자, 이비는 창피함을 참으며 다시 피력했다.


“하지만 일어나기는 힘들어요.”

이비는 구차한 걸 알면서도 시치미를 뗐다.

이 악물면 일어날 수야 있지만 힘든 건 사실이니까.

이놈과 저놈에게 목이 졸리고 기절하고 묶였다. 한 놈은 손가락을 잘라 먹겠노라 등 뒤에서 협박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애쓰기 싫었다. 버티지 못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몸부림치기도 싫었다. 왠지 약한 소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온을 마냥 쳐다보자 시온도 묘한 눈으로 이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툭 내뱉듯 물었다.


“업힐래요?”

“네.”

“몸이 젖을 텐데?”

“괜찮아요!”

이비가 덥석 받자 시온은 이비를 다시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더니 웬일로, 하고 중얼대며 이비에게 등을 내밀었다.

이비는 냉큼 대답한 주제에 막상 그가 등을 내밀자 잠깐 머뭇댔다.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비는 시온의 목에 팔을 감고 꽉 매달렸다.

비를 다 맞으며 달려왔는지 그는 생각보다 더 많이 젖어 있었다. 그래서 축축한 물기가 이비의 옷에도 금세 스며들었다. 하지만 커다란 등이 그럼에도 따뜻해서, 그리고 반가워서 싫지 않았다.

이비가 업히자 시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비는 이유 없이 들떴다. 추운 겨울, 숨을 크게 들이킨 기분이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정신 차려야 하는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런데 왠지 기분이 멍했다. 마치 따듯한 욕조에 들어가 누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시온의 어깨에 잠자코 이마를 묻고 있는데, 시온이 가볍게 달리며 말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갈 겁니다.”

그 말에 가물가물 졸던 이비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요, 나한테 저주를 건 밤의 일족이 여기 있어요. 잡아야 돼요.”

“우리끼리는 못 합니다.”

왜?

시온의 단언에 이비가 영문을 물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등줄기가 쭈뼛하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시온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짧게 혀를 찼다.

하늘에서 비가 아닌 무언가가 내리고 있었다. 명주로 얇게 짠 베일처럼 희뿌연 조각들, 노체의 저주였다.

한두 개만 있어도 끔찍한 재앙을 일으키는 것이 벌레떼처럼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믐은 내일인데…….”

“달이 없으니까.”

이비가 신음하자 시온이 짧게 대답했다.


“게다가 여기엔 해방된 밤의 일족이 셋이나 있고.”

밤의 일족은 저주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이곳엔 정화의 소금에 둘러 갇힌 밤의 일족이 오랜 시간 갇혀 있었다.

육체를 얻은 분신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찾지 못해 이 근방을 맴돌길 수개월, 비구름이 달을 가리고 소금 감옥이 무너진 오늘, 그것들이 규칙을 깨고 죽음을 빚기 위해 도래했다.

아아악! 으아아!

저주가 내리는 걸 깨닫기 무섭게, 어디선가 절규가 울려 퍼졌다. 성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밤의 일족은 유비아가 쫓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복도를 내달렸다. 잠시 후 그가 밖으로 나가는 문 하나를 박찼다. 그곳에 타르데스의 따님 한 분이 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온이 등에 업은 이비를 내려 다시 앞으로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좀 뜬금없는 소릴 했다.


“안 뭅니다.”

“네?”

“안 무니까 괜찮다고.”

시온은 대충 덧붙이며 이비와 함께 타르데스의 따님에게 올라탔고, 이비는 잠시 얼이 빠졌다.

타르데스의 따님이 날아올랐고, 빗줄기가 아프게 내리쳤다. 하지만 시온에게 파묻힌 이비는 그리 괴롭지 않았다.

이비는 그의 어깨에 얌전히 숨은 채 성 쪽을 내려다보았다.

성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높은 창에서 사람이 떨어지고 불이 치솟았다. 저주가 불어넣은 광기가 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멸망의 단편이 찾아왔지만 이비와 시온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은 저기 휩쓸리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자, 잠깐만요!”

그런데 이비가 무언가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주가 한 곳으로 모이고 있어요!”

시온은 이비가 가리킨 쪽을 돌아보았다.

비구름이 점령한 음침한 밤하늘로 하얗게 내렸던 저주들이 다시 떠오르며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들은 어느 한점을 향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뒤엉켰고, 거센 폭풍 속에서 이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지난 그믐, 호밀밭 너머로 본 죽은 용의 모습이었다.


“얌전히 도망이나 칠 것이지.”

그 흉측한 몰골에 시온이 혀를 찼다. 하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저거라면 부숴 버릴 수 있으니까.

시온이 직선으로 날던 용의 고삐를 잡아 우회했다. 그러더니 처마가 있는 첨탑에 이비를 내려놓았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시온이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데, 이비가 그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시온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지만 할 말은 없었다.

그가 금방 돌아올 것도 알고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도 안다. 하지만 이비는 왠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냥 붙잡고 있자, 시온이 한쪽 눈썹을 들며 말했다.


“……아까부터 안 어울리게 왜 이러시는지.”

그 못돼먹은 말투에 이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놔 버렸다.

시온은 헛웃음 비슷한 걸 흘리며 훌쩍 가 버렸고, 이비는 저놈이 무척 재수 없는 자식인 걸 뒤늦게 떠올렸다.

하지만 예전처럼 마냥 싫지도 않았다. 싫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곱지 않은 투로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안 무니까 괜찮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큰 짐승을 무서워하는 걸 알아.’

알려 준 적도 없는데, 본 적도 없을 텐데. 이비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렸다.

낙뢰가 내리치고 되살아난 용의 주검이 포효했다.

세상이 당장에라도 끝날 것 같지만 이비는 정말 괜찮았다.

.
.
.

격돌 끝에 용의 형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악몽이 끝났지만 기뻐하긴 어려웠다. 악몽이 지나간 자리엔 상처가 가득했다.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이대로 영영 묻힐지도.

이비는 홀로 저주를 피한 첨탑 위에서 엉망으로 허물어진 성을 바라보았다.

비가 쏟아지는데 성은 자욱한 안개에 묻혀 있었다. 용이 죽기 전에 토해 낸 저주였다.

저번과 다를 바 없는 광경에 이비는 눈을 감았다.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다가 퍼뜩 놀라 눈을 다시 떴다.

아,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기서 설치던…….


“카셀 몬트라…….”

쓰레기, 설마 죽었니?

***

카셀은 죽지 않았다. 다만 빠르게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했다.

뭐지? 대체 무슨 상황이지?

몸이 타는 것 같아.

차가운 빗방울이 몸을 적시고 있는데도 열이 식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카셀은 이 무용한 비를 차라리 막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격통이 밀려오는 탓에 꼼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카셀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모든 게 거짓말 같다고.

멀쩡한 인간들이 눈앞에서 너무 쉽게 죽었다. 사람이 아니라 나뭇가지처럼 뚝뚝 끊어져 죽어 버렸다.

그나마 카셀이 목숨을 부지한 건 새장에 갇혀 있던 소년 때문이다.

그 가면 쓴 악마가 객석의 인간들을 도륙할 때, 새장에서 탈출한 소년이 카셀을 구했다.

그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한 건지, 녀석은 카셀을 공격하던 가면을 막아섰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인 소년은 도리어 반격당해 쓰러졌고, 카셀은 그사이 겨우 도망쳤다.

그런데 얼토당토않은 괴물이 나타나더니 희뿌연 안개가 밀어닥쳤다. 거기 잠시 파묻혔을 뿐인데 이 꼴이 되었다.


‘은혜를 갚으려면 제대로 갚던가…….’

카셀은 이미 시체가 되었을 소년을 떠올리며 중얼댔다. 그러곤 고통마저 무뎌지는 느낌에 신음했다. 죽음이 지척까지 다가온 게 분명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내가, 카셀 몬트라가? 말도 안 돼, 절대 싫어. 누가 좀 살려 줘.

카셀이 홀로 괴로워할 때였다.


“살아 있어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눈앞이 밝아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녀가 망막에 비쳤다.

천사? 아니, 아니야. 이건…….


“이비……?”

카셀은 신음하며 홀연히 나타난 이비를 바라보았다.

환상인가? 하지만,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이비는 그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비를 맞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도와줘…….”

카셀은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애써 손을 뻗었다.

마냐냐의 총아, 고귀한 예비 성녀, 너는 이 저주를 정화할 수 있지. 저번에도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살려 줘.

카셀의 간절한 시선을 읽었는지, 이비가 검게 물든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러더니 성녀처럼 자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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