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복병 (91/129)


91화. 복병
2023.04.13.



“작작 좀 하지. 역겨워서 못 봐 주겠으니까.”

카셀의 신경질이 무거운 정적을 불러왔다.

비스의 귀족들은 이 노골적인 비난이 그저 낯설었다. 그래서 다들 얼어 있는데, 가면에 맞은 귀족이 시종의 귓속말을 듣고 혀를 크게 찼다.


“에스탄 자작께서 이렇게 경솔한 분인지 몰랐군. 예의도 눈치도 없는 자를 초대하다니, 덕분에 아주 곤란해지시겠어! 안 그래!?”

그 귀족이 카셀을 투기장에 초대한 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소리쳤다.

그 순간 카셀이 있던 객석이 돌연 환해졌다.

어둡던 곳에 등불 여러 개가 켜지며 카셀의 얼굴과 그 옆에 움츠린 브릭 남작, 그리고 펼쳐진 휘장이 드러났다.

귀족들은 카셀의 얼굴을 못 알아봤다. 대신 그 뒤에 있는 백마 문양의 휘장은 바로 알아보았다. 대귀족의 문양을 모를 만큼 무지한 자는 여기 없었다.


“이분은 대 몬트라의 주인이신 카셀 몬트라 후작님이시다. 모두 예를 갖추라!”

카셀의 시종이 소리치자 귀족들이 재차 얼어붙었다.

카셀 몬트라라니, 티엔다의 대귀족이 이런 곳에 올 리가.

다들 반신반의하는데, 카셀의 초상화를 기억해 낸 몇몇이 놀라서 엎드렸다. 그러곤 일행들을 다급히 윽박질렀다.

심상지 않은 분위기에 나머지 귀족들도 서둘러 몸을 낮췄고, 카셀에게 소리친 귀족도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

웅성대던 투기장이 고요해지자 카셀의 시종이 목소리를 높였다.


“티엔다비스의 재상이신 몬트라 후작님께선 가여운 자들을 보살피고자 시찰하시던 중 흉흉한 소문을 듣고 이곳에 이르셨다! 여기서 너희의 악행을 직접 보신 바, 그 잔악함에 크게 노여워하셨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귀족들이 땅을 짚은 채 헛숨을 삼켰다.

악행이라니, 학살자인 밤의 일족과 제값으로 고용한 용병의 싸움을 구경했을 뿐인데, 잔악이라니.

귀족들이 손을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데, 한 줄기 빛과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너희 모두 벌을 받아 마땅하나 자비로운 후작님께서 특별히 선처하시어 너희의 죄를 사하고자 하니, 더는 이런 행태를 반복하지 말고 죄를 뉘우칠 것을 명한다!”

카셀의 자비로움에 귀족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저 쓰레기가 뭐라는 거야?’

그리고 이비는 분통을 터트렸다.


‘네가 원흉이잖아, 이 뻔뻔한 자식아!’

이비가 카셀의 위선에 격분하는데, 카셀이 자신의 시종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네? 아, 네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엄하게 외쳤다.


“그 전에 후작님께 무도하게 굴었던 자는 스스로 처벌하라!”

후작님께 무도하게 굴었던 자. 가면에 맞아 조금 불평하고 약간 화를 냈던 귀족은 바로 사색이 되었다.


“스, 스스로 처벌하라니 어떻게……?”

“거기서 뛰어라!”

카셀의 시종은 그 귀족이 투기장 하인을 밀어 떨어트리려고 한 난간을 가리켰다.

떨어져도 죽지는 않지만, 발모가지는 필히 부러질 높이였다.

그 포악한 명령에 지목된 귀족이 머뭇대자 다른 귀족들이 눈총을 보냈다.

결국 콰당 우지끈 아이고오 하는 소리가 울렸고, 카셀의 굳은 얼굴은 그제야 좀 풀렸다.


‘저 쓰레기…….’

과연 카셀 몬트라. 기분이 나쁘면 반드시 복수한다.


“용병들은 그만 돌려보내라. 그리고 저 소년은 바로 치료해라.”

시종의 명령에 달구경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이대로 파장할 분위기였다.


‘이렇게 덮는다고?’

이비는 카셀의 야비함에 이를 갈다가, 아까부터 너무 조용한 등 뒤를 살폈다.

징그럽게 수다스럽던 엔테가 왠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힐끗 뒤를 돌아봤다가 흠칫 놀랐다.

웃음을 잃은 엔테가 카셀 몬트라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한테 뭔가 보여 주려고 한 것 같은데, 잘 안 된 모양이네.”

이비가 엔테의 분위기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저 새장도 여기선 안 열릴 것 같고.”

이비는 이렇게 덧붙이며 새장 속 소년을 힐끗 쳐다봤다.

우리에 갇힌 채 몰이를 당한, 그래서 피를 뚝뚝 흘리는 그 소년은 어째서인지 카셀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냐, 감동하지 마, 저건 쓰레기야…….’

이비는 카셀을 우러러보는 소년이 안타까워 탄식을 삼켰다.

그때 엔테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네요, 저 먼지 같은 인간.”

엔테의 목소리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그는 그 서슬을 억지로 누그러트리며 이비를 채근했다.


“기다리는 건 끝. 그만 정해요. 죽을지 죽일지.”

“그전에 할 말이 있어.”

“짧게 해 주세요.”

“알겠어.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딱 두 가지만 분명히 할게. 우선, 더러워진 건 씻으면 돼.”

뜬금없는 소리에 엔테가 이비를 차갑게 주시했다. 그러나 이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쓸모는 안 없어질 거야. 왜냐하면 나 진짜 잘났거든.”

엔테가 돌연 피를 토한 건 그 직후였다.


“쿨럭!”

왈칵 피를 뱉은 엔테가 가슴을 움켜쥔 채 허물어졌다.

그는 괴로워하며 이비를 쳐다봤고, 이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숨을 못 쉬겠지? 폐가 말라서 그래.”

빈혈 따위에 굴하지 않는 몸이라면, 좀 더 본격적인 손상을 줄 수밖에.


“언제……?”

“기회 있을 때 틈틈이.”

네가 허튼소리를 할 때마다 아아, 탄식도 하고 앗, 비명도 지르면서.


“하…….”

엔테가 이비를 쳐다보며 피가 흥건한 입으로 웃었다.

겁먹은 척하면서 이런 짓을 꾸미다니. 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이비는 팔이 묶여 있고, 이 정도 손상은 곧 회복된다.

낙엽처럼 말라서 찢어진 폐가 끔찍이 아팠지만, 죽지 못하는 엔테는 다시 천천히 소생했다.

폐가 회복되길 기다리며 엔테는 아까보다 사나워진 눈으로 이비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비는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지 엔테를 태연히 마주 보았다.


“죽을지 죽일지 꼭 골라야 한다면 물론 죽이고 살아남을 거야. 하지만 그 대상은 날 죽이려고 하는 너지 다른 사람이 아니야.”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비의 손목을 묶은 끈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엔테가 놀라서 쳐다봤지만, 이비는 의기양양해하는 대신 그 끈을 내던지며 짓씹었다.


“그리고 우리 집사 건드린 놈도 전부 죽일 거야.”

그 말과 함께 기둥과 천장이 무너져 엔테 위로 떨어졌다.

쿵! 묵직한 암석이 사람을 덮치는 모습에 이비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무너진 기둥과 천장은 산산이 부서져 엔테 위에 수북한 돌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죽진 않았겠지?”

정당방위라고는 하지만, 저런 놈 때문에 마음의 짐을 얻고 싶진 않다.


‘살아 있어도 저 돌엔 소금이 박혀 있으니까 혼자 못 치울 거야.’

겨우 해방된 이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느 쪽부터 처리하지?’

이비는 묶인 걸 억지로 푸느라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돌무더기에 갇힌 엔테와 저편의 카셀을 번갈아 보았다.

카셀이 이곳의 증거를 없애게 둘 순 없다. 하지만 엔테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도 위험하다.


‘저 새장은 밤의 일족이 못 빠져나오는 건가? 그럼 저런 걸 구해서…….’

이비는 소년이 갇혀 있는 새장을 내려다보다가 덜컥 굳었다.

싸늘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고, 직후 이비는 뒤도 안 돌아보고 엔테가 있는 방에서 빠져나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비는 그대로 복도를 내달리며 생각했다.

밤의 일족은 서로를 신체의 일부처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투기장엔 세 명의 밤의 일족이 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한 명.

그는 저 소년처럼 철창에 갇혀 있을 수도 있고, 뱀처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야, 왜냐하면…….’

저 뱀이 브릭 남작의 눈을 피해 이 성에서 하녀인 척했으니까.

그건 여기 있는 밤의 일족들이 뱀의 존재를 함구했다는 의미다.


‘물론 끔찍한 취급을 받으면서 브릭 남작에게 좋은 얘길 해 줄 이유는 없어. 하지만…….’

하지만 각자의 이유와 사정으로 정보를 넘길 가능성은 얼마든 있다. 그건 당사자 외엔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

그러니까, 내가 뱀이라면…….


‘여기 오자마자 다른 밤의 일족에게 접촉했겠지!’

접촉했을 뿐 아니라 이미 한패일 거다.

그게 아니면 엔테가 정화의 소금으로 범벅된 이곳까지 제 발로 들어올 리 없다.

섬뜩한 가설에 이비가 정신없이 도망칠 때였다.

찌이익.

빗소리를 뚫고 무언가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헛숨을 삼켰다.

위에 드리운 천막이 혼자서 찢어지고 있었다.

아. 저 천막.

티엔다비스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을 대비하는 사람도 드물다.

이 투기장이라고 다를까. 생긴 지 1년이 채 안 된 곳. 아마 비를 맞기는 처음일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둘러놓은 저 조악한 천막은 어디까지나 임시 조치.

그런데 그게, 비로부터 소금을 지켜주는 유일한 천장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찢기고 있었다.

천천히 찢기던 천막이 기어이 반으로 갈라졌다.

촤아악! 천막에 고여 있던 물이 사방으로 쏟아졌고, 물벼락을 맞은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엇!”

“뭐야, 갑자기!”

지금 중요한 건 몸이 젖는 게 아니라 소금이 녹는 거다.

하지만 그걸 미처 모르는 귀족들은 비를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때, 어디선가 스멀대며 나타난 새카만 것이 그들의 몸을 가볍게 동강 냈다.

절명한 자들은 말이 없었고, 그걸 본 자의 절규는 잠시 틈을 두고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귀족들도 용병들도 급히 두리번댔다. 그러나 순식간에 난자되어 쓰러진 몇몇 귀족들을 발견하기엔 주변이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네모난 객석에 갇혀 차례차례 도살되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어도 거센 빗소리에 파묻혔다.

이따금 번지는 가냘픈 신음만 옆 칸으로 전해져 죽음을 예고했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이렇게 묻는 자부터 어김없이 목이 날아갔다.

죽음은 적막으로 자신을 과시했고, 비가 씻어 내지 못한 피비린내가 진동할 즈음에야 아직 죽지 않은 귀족들은 비로소 심판이 시작된 걸 깨달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저, 저도 모르겠…….”

카셀의 다그침에 브릭 남작이 신음했다. 그때 객석의 난간 쪽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찾았다, 주인님…….”

섬뜩한 목소리에 카셀과 브릭 남작은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비로 번들대는 난간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잔뜩 젖어 물귀신 같은 몰골을 한, 가면을 쓴 사람.

카셀은 그를 기억했다. 저 소년처럼 철창에 갇혀 있던 밤의 일족이었다.

카셀이 그를 알아본 순간, 살의가 가득한 저주가 그를 베었다.

.
.
.



‘역시 한 명 더 있었어!’

이비는 입을 틀어막은 채 비명을 삼켰다.

밖에서 참극이 한창일 때, 이비는 객석 뒤편의 통로에 숨어 있었다.

틈을 노려 저 밤의 일족을 쓰러트릴까도 했지만 불가능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건 위치를 잡을 수가 없다.

심지어 비도 계속 쏟아졌다. 소금이 녹으면 엔테도 곧 풀려날 거다.

총체적 난국에 이비는 웅크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떨지 마, 정신 차려.’

이비가 자신을 다그치는데, 낯선 목소리가 이비의 신경을 길게 긁었다.


“이……비……?”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질질 끄는 목소리였다.


“어디……야?”

이비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더 꾹 틀어막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겁먹었어……? 심장 소리가 커…….”

낄낄대는 소리에 이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 누군가가 이비의 심장박동을 흉내 냈다.

소름이 끼쳤지만 이비는 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동요하지 마, 그냥 하는 말일 거야. 숨 참아, 지나가게 해.

하지만 그 간절함은 덜컹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덧없이 무너졌다.


“찾았다, 이비…….”

문이 열렸지만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낮은 목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온 건 느낄 수 있었다.

이비가 그 소리에 놀랄 겨를도 없이 거친 손이 이비의 발목을 붙잡았다.


“악!”

이비는 주르륵 끌려갔다. 돌바닥에 밀린 몸이 아팠지만 이비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렇게 붙잡고 있어. 그 사이에…….


“아, 참…….”

이비가 끌려가면서 몰래 노래하려고 하는데, 이비를 낚아챈 자가 우뚝 멈췄다.

그러더니 돌연 이비의 목을 움켜쥐었다.


“잡으면 목을 조르라고 했지…….”

“윽!”

“음, 얼마나…….”

졸라야 하지……?

갈고리 같은 손이 이비의 목을 무자비하게 옥죄었다. 이비는 몸부림쳤지만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숨이 막힌 채 시간이 흐르자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기절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고 눈을 뜨면 지옥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고통과 함께 억울함이 밀려왔다.

아, 싫어. 살고 싶어.

집사, 디에스.

아저씨……!

그 순간 거짓말처럼 섬광이 내리쳤다.

이윽고 울려 퍼진 굉음은 이비가 아는 소리였다.

라우렐 백작이 낙뢰를 떨어트리는 소리.

설마 환청은 아니겠지.

세상을 불신하는 이비가 자신의 청력마저 의심할 때였다.


“이비!”

더는 의심할 수 없는 목소리가 이비의 귀에 꽂혔다.

시온 라우렐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이비는 정신이 아득한 와중에 불평했다.

야, 다시 해.

아저씨 목소리는 더 친절하단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