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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더러워지라고 (90/129)


90화. 더러워지라고
2023.04.10.


밤하늘 아래, 그리고 비를 막기 위한 천막 아래 마련된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비의 저택 정원 정도의 규모. 하지만 초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빛을 받아 무섭게 번쩍이는 소금 결정이 주변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수정으로 지은 듯 찬란한 궁전엔 이비와 엔테를 제외하고도 상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맞은 편으로 보이는 객석은 손님들의 예민함을 고려한 듯 칸칸이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인기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객석 안에는 불을 켜지 않았고, 손님들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이비의 초라한 옷차림과 묶여 있는 손목을 눈치챈 자들도 없었다.


‘몬트라 후작은?’

이비가 카셀을 찾아 눈을 돌리는데, 뒤에서 뻗어 온 손이 이비의 턱을 붙잡았다.


“아는 사람이 있어도 찾지 마세요. 아까 그 용병들처럼 될 거예요.”

뒤에 선 엔테가 이비의 생각을 읽은 양 속삭였다.

이비는 놀란 듯 아, 낮게 탄식하며 엔테의 얼음장 같은 손을 뿌리쳤다.


“노래도 하지 마세요. 안 통하잖아요.”

“어차피 안 통하는데 왜 하지 말래?”

“저기 집중해 줬으면 하거든요.”

아아. 엔테의 허튼소리에 이비가 어련하시겠냐는 듯 빈정댔다. 하지만 엔테는 너그러웠다.


“봐요, 엄청 많이 구경 왔어.”

엔테가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즐겁게 가리켰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마치 파티에 온 것처럼 들떠 보였다. 아니, 그들에게 이곳은 파티장이 맞았다.

이비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저 밑엔 예쁜 새장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힌 건 연약한 뒷모습을 가진 소년이었다.

소년은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얌전했다. 무기를 든 용병들이 우르르 등장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용병들은 흥분한 듯 보였다. 두려운 기색 없이 잔뜩 고양된 모습을 보니, 저들은 눈앞의 소년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비는 또 한 번 기이한 괴리감을 느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처지는 너무나 다르다.

즐기는 손님.

앉아서 돈을 버는 주인.

자신이 사냥감인 걸 모르는 사냥꾼.

철창에 갇혀 이용당하는 살아 있는 저주.

그리고 웬 미친놈에게 붙잡혀 고요히 위협당하는 나.

이 상황이 참 기괴하고도 지겨워 이비는 아, 힘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엔테가 몸을 숙이며 이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살고 싶어요?”

“살고 싶어.”

“그럼 살려 줄게요.”

“……왜 이랬다 저랬다야?”

“어제 날 구해 준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엔테가 이비가 전에 한 말을 흉내 내며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손을 뻗어 이비의 목을 감쌌다.

뒤에서부터 목을 휘감는 손가락이 마치 여러 가닥의 뱀 같았다.

이비가 냉기에 놀라 앗 하고 작게 소리를 지르자 엔테가 웃으며 말했다.


“내 편이 되면 살려 줄게요.”

“편만 들어 주면 돼?”

“아뇨, 내가 할 일도 도와줘요.”

아? 이비가 의아한 듯 소리를 내자 엔테가 친절히 덧붙였다.


“저기 있는 귀족들을 죽이세요. 그럼 살려 줄게요.”

살인을 종용하는 목소리가 평화로웠다.

그 현실감 없는 요구에 이비는 소리 내는 것도 잊은 채 얼이 빠졌고, 그 사이 엔테가 물었다.


“할 수 있죠?”

“할 수 있지만 싫어.”

“안 하면 내가 할 거예요. 어차피 다 죽을 사람들인데 너라도 살면 좋잖아요.”

엔테의 논리는 가관이었다. 그는 말만 예쁘게 할 뿐 제정신이 아니었고, 이비는 미친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엔테가 달래듯 말했다.


“살고 싶다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죠.”

친절하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저 사람들도 그런 거 없으니까.”

다정하게.


“아, 생각해 보니까 이미 본인 살자고 그 용병들을 죽였잖아. 그런데 왜 깨끗한 척이에요.”

그리고 잔혹하게.

이비는 당황한 채 엔테의 말을 곱씹다가 냉랭히 되물었다.


“나한테 그런 걸 시키는 이유가 뭐야?”

“더러워지라고.”

이비의 짓눌린 목소리와 달리 엔테의 대답은 느긋했다.


“망가져서 쓸모없어지면 죽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요.”

엔테는 꽤 친절했다. 다만 그의 배려는 몽둥이와 채찍 중 네가 좋아하는 것으로 때려 주겠다는 식이었다.

이비가 대답을 못 하자 엔테가 되물었다.


“싫어요?”

“싫어.”

“왜?”

“기분 나쁘니까.”

“기분을 챙길 여유가 있다니, 내 말이 농담처럼 들리나 봐요.”

엔테가 낮게 웃으며 이비의 목을 감싼 손을 움직였다. 그 손은 이비의 어깨를 스치더니 팔을 타고 내려왔다.

이윽고 이비의 손등에 손을 포갠 엔테가 다정하게 짜증을 냈다.


“손가락 하나 잘라 주면 태도가 바뀌려나?”

하녀인 척할 때와 달리, 지금 엔테의 손은 살아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손톱도 모조리 검게 죽어 있었다.


 
엔테가 그 시체 같은 손으로 이비의 새끼손가락을 건드리며 속삭였다.


“먹기 좋게 두 조각으로.”

엔테가 이비의 손가락을 천천히 뒤로 꺾기 시작했다. 마치 부러트릴 듯이. 아니, 정말 부러트릴 작정으로.


“잠깐, 기다려!”

섬뜩한 진심을 느낀 이비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엔테가 한계 직전까지 넘어간 이비의 손가락을 그대로 쥔 채 되물었다.


“죽일 거예요?”

“그건 싫어.”

“흠…….”

“아, 기다리라고! 잠깐만, 아, 아! 생각할 시간을 줘!”

시간을 달라는 말에 엔테가 다시 우뚝 멈췄다.

정말 아팠던 이비는 숨을 헐떡이며 제 등에 상체를 드리운 엔테의 대답을 기다렸다.

엔테는 이비의 손가락을 잡은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이비의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알겠어요. 저 새장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줄게요.”

엔테가 그렇게 말하며 가리킨 건 소년이 갇혀 있는 철창이었다.

그때 마침 종소리가 울렸다. 자정을 알리는 소리였다.


“이제 시작하네요.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잘 봐요, 마음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방금 전까지 남의 손가락을 뽑으려 든 주제에, 엔테는 퍽 자상하게 말하며 이비의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면서 새장과 용병들이 대치한 경기장을 가리켰다.

이비는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철창에 갇힌 아이를 다시 포위한 용병들이라니. 마치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지만, 잠시 후 용병들이 들어 올린 건 장난도 농담도 아닌 진짜 석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겨냥한 것은 당연히 철창 속의 소년이었다.

이비가 미간을 좁히는 순간 석궁 한 발이 쏘아졌다. 그런데 신중히 날린 화살이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창살에 부딪혔어?’

이비는 긴장한 채 상황을 살폈다.

용병들도 비슷한 판단인지 다시 소년에게 석궁을 겨누었다. 그러곤 별로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다시 창살 사이로 소년을 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리고 이번엔 다들 보았다. 화살이 창살 안으로 분명히 들어간 것을, 그런데 소년에게 닿기 전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충돌해 부러지고 튕겨 나오는걸.

그 기이한 광경에 용병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분위기가 심상찮은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물러날 곳은 없었고, 잠시 수군대더니 일시에 석궁을 들었다. 그러곤 연이어 쏘기 시작했다.

그들은 틈이 생기지 않게 돌아가며 화살을 퍼부었고, 그것은 도망치지도 숨지도 못하는 소년에게 빗발쳤다.

처음엔 모두 튕겨 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화살이 튕겨 나오지 않고 궤도만 어긋나더니, 결국 화살 하나가 소년의 어깨에 박혔다.

아이가 비틀대는 모습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엔테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눈 돌리지 말고 봐요, 우리 빼고 다들 즐기고 있잖아.”

엔테가 이비의 얼굴을 붙들어 고정했다.

이비는 그 친절한 듯 포악한 손길을 견디며 밑쪽의 경기장이 아니라 위쪽의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엔테의 말대로 다들 즐기고 있었다. 난간 앞까지 나와 구경하는 사람, 옆 사람과 쉼 없이 떠드는 사람, 그리고 와인 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었다.

이비의 눈에는 그들의 우아한 모습이 저 아래쪽 풍경보다 더 잔혹해 보였다.


“나는 여기가 좋아요. 여긴 신도 구원도 없이 죽음만 가득해서 다들 솔직하거든요.”

신물이 올라오는 걸 애써 누르는 이비에게 엔테가 다시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이비의 혐오감을 부추겼지만, 엔테는 까맣게 모르는 듯 말을 이었다.


“특권을 과시하며 욕심을 부리는 건 저 귀족들이나 티엔다나 마찬가지고,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건 저 용병들이나 비스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선 적어도 위선은 안 부리니까.”

이비는 엔테의 말을 허튼소리로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부정하려니 크게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런 이비에게 엔테가 돌연 물었다.


“저 귀족들이 왜 죽음을 구경하는지 알아요?”

“가능하니까. 치러야 할 대가가 없으니까. 그리고, 본인들은 아프지 않으니까.”

“맞아요, 이유는 그게 다예요.”

엔테가 이비의 대답에 만족한 듯 웃었다. 그러더니 이비의 고개를 움직여, 다시 경기장 쪽을 보게 만들었다.

새장 주변에 혈흔이 가득했다. 화살을 다 쓴 용병들이 창과 검을 들고 새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서 안에 갇힌 소년은 어디에도 등을 기대지 못한 채 비좁은 새장 한가운데서 자신을 죽이려 드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멸스럽지 않아요? 저 위에 남의 고통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는 게.”

“……환멸스러워.”

“만약 내가 저들에게 같은 제안을 하면 저들은 널 죽이지 않으려고 고민할까요?”

“아니.”

“다들 살아남으려고 애쓰는데 저들만 편히 구경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그런데 뭘 망설여요, 그냥 죽여 버려요. 살고 싶다며.”

엔테의 회유에 이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맞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했다.

그리고 이곳에선 누구도 상대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저 제 몫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빼앗겨야 하는 자는 서글피 동정을 구하지만, 빼앗는 자는 그 우월한 자리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내 즐거움이 너의 목숨보다 앞서고, 내 이익이 너의 삶보다 우선인 게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은 세상을 공유하지만 완벽히 분리되어 끝도 없이 멀어진다.

하지만 이건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어디서나 통하는 이야기.

그렇다면 차라리 나도?

이비가 흔들리는 눈으로 평화롭고도 포악한 위아래의 광경을 번갈아 볼 때였다.

돌연 종이 울렸다. 그와 함께 브릭 남작의 하인들이 경기장으로 올라가 용병들을 불러들였다.

철창 안으로 창칼을 밀어 넣던 용병들이 주춤대며 행동을 멈췄고, 위에서 지켜보던 귀족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는데, 이비가 묶여 있던 방으로 투기장의 하인이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중대한 사정으로 이번 달구경은 중단되었습니다. 대신 입장료를 두 배로 돌려드릴 테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정?

이비가 영문을 물을 겨를도 없이, 맞은편에서 비명이 울렸다.

소리를 따라 돌아보니, 가면을 쓴 귀족 하나가 투기장의 하인을 난간 밖으로 떨어트릴 듯 밀고 있었다.


“건방지게 누구한테 감히 흥정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계속해!”

그 귀족은 한창 흥이 오르던 차에 방해받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하인을 죽일 듯 몰아붙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 옆 옆 칸에서 뭐가 날아와 그 귀족의 얼굴을 맞췄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얇은 형태와 맞은 귀족이 아파하기보단 화만 내는 걸로 보아 누군가의 가면인 것 같았다.


“이익, 어떤 자식이야!”

그 사나운 귀족이 안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그러자 한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작작 좀 하지.”

그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가장 얼이 빠진 사람은 다름 아닌 이비였다.


“역겨워서 못 봐 주겠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인간쓰레기였다.

아니, 카셀 몬트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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