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후회하든 타락하든 (89/129)


89화. 후회하든 타락하든
2023.04.06.



“널 죽이러 왔어.”

죽음을 고하는 음성이 상냥했다. 하지만 그건 진심도 감정도 없이 부드럽게 꾸며 낸 목소리에 불과했다.

순전한 살의에 이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그 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엔테도 이비와 기꺼이 눈을 맞추더니 빙그레 웃었다. 하녀인 척할 때처럼 순종적인 미소였다.


“나를? 왜?”

그래서 이비도 가발을 쓰고 있을 때처럼 일부러 당차게 되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음, 성녀가 되려는 거짓말쟁이?”

엔테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피를 뚝뚝 흘리는 몰골만 아니면 꽤 살가운 모습이었다.

그 가벼운 태도에 이비는 더 표독하게 추궁했다.


“그런데 날 죽이겠다고?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이비의 협박 아닌 협박에 엔테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제 팔에 갇힌 이비에게 더 다가갔다.

엔테의 고운 얼굴이 이비의 뺨에 닿을 듯 가까워지며 더 진한 피 냄새를 풍겼다. 이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이 벽에 닿아 있어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비가 도망치지 못하고 이를 악물자 엔테가 이비의 귓가에 다정히 속삭였다.


“알아요. 아주 잘. 아마 세상에서 가장 잘 알 거야.”

“……알면서 왜 날 죽이겠다는 거야?”

“신께서 그걸 바라시니까.”

신이라니, 가장 어처구니없고 골치 아픈 대답이었다.

이비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엔테의 말을 곱씹었다.

저 백발. 하지만 얼굴을 드러냈어.

목적. 날 방해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거였어.

왜? 날 이용할 필요가 없어?

날 죽여서 이익이 될 사람은 누구?

신? 세상을 만든 진짜 신? 그럴 리가. 그게 아니면, 아니면…….

……널 구원한 어떤 변덕쟁이.

이비는 오늘 아침 엔테가 하녀의 모습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당신에겐 변덕이어도 내겐 구원인걸요.

그 말과 함께 이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무수한 추측이 초 단위로 번지다 이내 한 가지 가설에 수렴했다.


“……그렇다면 신앙심이 형편없네.”

그래서 이비는 억지로 웃었다.


“그럼 당장 죽이지 왜 안 죽이고 장난질이야? 신께서 바라신다며.”

이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엔테를 도발하고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엔테는 아까처럼 행복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 와중에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있어요?”

“여유가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끄는 거야.”

엔테의 물음에 이비가 짜증 난다는 듯 대답했다. 그 솔직한 불평에 엔테가 고개를 갸웃댔지만, 이미 늦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한쪽 어깨에 박히며 그를 밀어냈다.

화살에 맞은 충격으로 엔테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이비는 그사이 재빨리 몸을 숙였다. 그러자 이비의 머리 위로 몇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래서 이비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내달렸다.


“어이! 그놈이냐?”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아까 이비가 금화로 꼬드긴 용병들이었다. 혹시 몰라 대기시켜 놓았는데, 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때마침 왔다.

하지만 이비는 그들의 등장에 안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내달리며 경고했다.


“도망쳐, 밤의 일족이야!”

이비는 용병들에게 소리친 후 정신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가면을 빼앗긴 상태지만 얼굴을 가릴 겨를도 없었다.


‘몬트라 후작에게 가야 해.’

지금은 저 뱀으로부터 살아남는 게 먼저다. 그러려면 카셀에게 정체를 밝히고 보호받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이용해 뱀을 붙잡아야 한다.

이비가 숨이 차오르는 것을 견디며 내달릴 때였다.

외성과 내성을 잇는 통로에 들어서는 순간, 이비는 웬 남자와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남자 때문에 뒤로 주저앉은 이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곤 제 앞에 선 남자를 보고 덜컥 굳었다.

그는 아까 엔테에게 화살을 날린 용병 무리 중 하나였다.

내 뒤에 있던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이비가 상황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그 용병이 말했다.


“날 미끼로 쓰다니, 용서 못 해.”

이비는 소름이 쭉 끼쳤다.

이비의 앞을 가로막은 건 거구의 용병이지만, 그 뒤에서 들려온 건 가느다란 미성이었다.

이어 그 목소리가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괜찮아요, 이미 죽어서 복수는 못 할 거야.”

동시에 용병의 몸이 젖은 이불처럼 구겨지며 쓰러졌다.

그 뒤로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이 나타났다. 엔테였다. 직전에 화살을 몇 발이나 맞았는데, 그는 끔찍하게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비가 숨을 몰아쉬며 엔테의 몸을 훑자, 엔테는 기꺼이 망토를 펼쳐 보였다. 그 망토엔 화살 구멍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꽤 아팠어요. 제대로 맞았거든요.”

말도 안 돼…….

아무리 찢겨도 악몽처럼 다시 이어지는 엔테의 모습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달음박질로 이미 바쁘던 심장에 두려움이 쏟아지자 온몸의 맥박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이비가 하얗게 얼어붙자 엔테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도망치느라 고생했어요.”

마치 그림자처럼 드리우는 손길에 이비는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테가 더 빨랐다.

엔테는 한 손으로 이비의 뒷목을 감싸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이비의 눈을 덮었다.

뱀이 이비의 시야를 가린 채 속삭였다.


“잠깐 자요. 다시 일어났을 때, 내가 재미있는 걸 보여 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이비는 정신을 잃었다.


 

***

이비는 디에스를 보고 있었다.

정장이 아주 잘 어울리는, 단정하지만 항상 피곤해 보이는 내 집사.

이비는 그가 무척 반가웠지만, 속지 않고 물었다.


“디에스, 설마 죽었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꿈이라도 꿨나요? 또 왜 이러는 거예요. 어디 아파?

진짜 디에스라면 이렇게 핀잔했을 텐데, 저 허상은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꿈이니까.

꿈을 자각한 이비는 괴로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곤 자신이 그려 낸 디에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죽지 마.”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버거웠다. 상상하기 싫은 두려움이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처럼 등을 마구 떠미는 것 같았다.


“네가 괜찮다고 해도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비는 이를 악물고 견뎠다. 무너지면 편하겠지만 다시 버텼다. 늘 그렇듯 홀로 절박하게 이겨 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살아 있어. 혼자 죽어버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읊조림을 끝으로 이비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허상을 힘껏 밀었다.

그는 어둠에 먹히듯 사라졌고, 칠흑 속에 혼자 남은 이비는 생각을 시작했다.


‘아무리 밤의 일족이라지만 너무 강해.’

디에스도 강하다. 게다가 그는 로히카의 명령으로 밤의 일족을 사냥하러 나선 적도 있다. 비록 스스로 풀어 줬지만.

그래서 그 하녀가 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디에스와 함께 내보냈다. 디에스라면 뱀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합류 장소에 나타난 건 디에스가 아닌 뱀. 그러니 디에스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죽질 않아. 밤의 일족이라고 불사는 아닌데. 그건 대체 뭐지?’

그렇다고 다치지 않는 건 아니다. 죽지 않고 회복할 뿐.

회복. 재생. 어쩌면 결합.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심장? 뇌? 어쩌면 저주.


‘……그래 봤자 한 명분의 인간이야.’

이비는 정화한다. 신의 수반이라 불리는 티엔다의 광활한 호수를, 그 안에 담긴 방대한 양의 해수를.

그에 비하면 인간은 한 줌도 아닌 티끌.

계산을 마친 이비는 뱀에게 잡혔을 때의 기분을 다시 떠올렸다.


‘무서웠어.’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지냈나 보다. 목숨을 위협받는 정도로 몸이 굳을 만큼 겁먹다니.


‘하지만 두 번은 안 당해.’

죽일까 봐 무서워 살살 다뤘지만, 저쪽에서 이쪽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면 나도 네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다.

마음을 정한 이비는 숨을 깊게 마셨다.

동시에 얼마 전 디에스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후회할까?

―후회하면 다행이고.

―그럼?

―못 멈춰.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턴 쉬우니까.

이 와중에 찾아와 잔소리하는 디에스 때문에 이비는 쓰게 웃었다.

사냥개로 길러진 내 집사.

사냥에 실패하고 주인에게 버려진 바보.

내가 널 주운 건, 버림받은 처지가 나처럼 불쌍해서.

그러니까 난 살아남을 거야. 내가 죽으면 넌 또 버려질 테니까.

후회하든 타락하든, 그건 살아남은 다음 일이야.

.
.
.

빗소리가 들렸다.

이비가 그걸 깨닫기 무섭게 옆에서 엔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어요?”

“응.”

이비가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엔테가 웃었다.

하지만 이비는 개의치 않고 상황부터 살폈다.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로 눈을 가린 것 같다.

몸은 앉아 있다. 등받이가 있는 푹신한 의자. 손목이 팔걸이에 묶여 있다. 하지만 다리는 자유롭다.

바람이 느껴진다. 야외? 하지만 비가 떨어지진 않는다.

타닥, 탁, 탁. 빗방울이 광물을 치고 튀어 오르는 소리. 툭, 투둑, 툭. 두꺼운 직물이 젖는 소리.

흙냄새는 나지 않는다. 아직 성 안, 그리고 높은 곳이다.


“아직 안 죽였네.”

“재미있는 걸 보여 준다고 했잖아요.”

이비가 태연히 중얼대자 엔테도 비슷한 투로 대꾸했다. 그래서 이비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하녀 행세는 왜 했어?”

“음, 왜 그랬을까요?”

“약한 척 남의 반응을 떠보는 X자식이라서.”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물어봐요.”

이비의 독설에 엔테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신 나간 밤의 일족은 이비에게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말과 행동도 제법 정중한 축에 속했다.

그래서 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놈은 저렇게 웃는 낯으로 이비의 목을 졸랐었다.


“이 저주 너무 재미있지 않아요?”

“하나도 재미없어.”

엔테가 맑게 웃으며 묻자 이비는 매몰차게 대답했다. 그러곤 신물 난다는 듯 덧붙였다.


“날 죽이러 왔다며. 그럼 제대로 된 저주를 걸지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건데.”

“맞아요, 원래는 조용히 죽이려고 했어요. 아무도 모르게, 왜 죽었는지도 모르게. 그다음 시체나 훔칠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엔테는 죽여서 시체를 갖겠다는 소릴 하면서도 여상히 명랑했다. 그 태도에 소름이 끼칠 만도 한데, 이비는 그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제멋대로 굴면 신께서 노여워하실 거야.”

“괜찮아요. 벌은 이미 실컷 받고 있으니까.”

이비가 엔테의 말에 미간을 좁히는데, 돌연 눈에 감긴 검은 천이 흘러내렸다.


“이제 시작할 시간이에요.”

이비는 흐린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살폈다.

사방은 어두웠다. 밤이었고, 기둥 사이에 드문드문 불빛이 걸려 있었다.

이비가 앉은 곳은 탑의 정화식 때 고위 귀족들이 앉아서 지켜보는 장소와 비슷했다.

무언가 구경할 수 있게 전망이 트인 상자 형태의 테라스. 그런데 어딘지 평범치 않았다. 난간이 매끄러운 대리석이 아니라 투박한 결정으로 가득했다.

수정? 아니, 소금이다.


“여기 들어오고 싶어 했잖아요.”

이비가 그 소금을 알아보자 엔테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공연이에요.”

이비는 조용히 밑을 내려다보았다. 불빛을 환하게 밝힌 그곳엔 커다란 새장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단정한 차림의 어린아이가.

멀어서 형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비는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밤의 일족을 구경하는 비밀 투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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