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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뱀 사냥 (88/129)


88화. 뱀 사냥
2023.04.03.



“그리고 그걸 이해하면 두려워질 거예요. 분명 같은 사람인데, 그럼에도 이렇게 다른 삶을 산다는 게요.”

가면을 쓴 하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카셀은 문득 옛날 일을 떠올렸다.


―티엔다에도 바보가 잔뜩 있는데, 그게 거른 거면 저 밑 대륙은 더 끔찍하겠네요.

아직 배울 것이 많던 어린 시절, 카셀은 온화한 베르데 자작 앞에서 이렇게 말하며 낄낄댄 적이 있다.

그냥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그 노인이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었다.


―아니요, 도련님. 아무리 지고한 자리에 있어도 다른 삶을 비웃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조심하고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두려워하라니, 뭘요.

카셀은 무안해져서 퉁명스럽게 되물었고, 자작은 진지한 목소리로 일렀다.


―아무리 낮은 자라도 마땅히 사람으로 대하고 두려워하십시오. 그 두려움이 없으면 양심을 쉽게 잃고, 양심을 잃은 자는 아무리 뛰어나도 모든 것이 무용합니다.

뻔한 잔소리였다. 게다가 카셀은 갑자기 훈계를 당해 기분도 상한 터였다.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 말인데, 그 말이 지금 와서 다시 생각났다.


“두렵다라…….”

카셀은 턱을 매만지며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카셀은 하녀를 옆에 세워 둔 채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더니, 혼자 뭘 이해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하녀를 향해 건성으로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 그만 나가 봐.”

상전의 변덕에 하녀는 미련 없이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카셀이 다시 그 하녀를 붙잡았다.


“잠깐.”

하녀가 돌아보자 카셀이 엄지로 무언가 튕겨서 날렸다. 그래서 하녀는 자신에게 날아온 것을 얼떨결에 받았다.


“받아라, 네가 떠 온 물값이다.”

하녀가 쥐었던 손을 펴 보니 반짝이는 금화 한 닢이 놓여 있었다.

카셀은 하녀에게 과분한 보수를 건네고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하녀, 이비는 가면 속에서 몰래 혀를 찼다.


‘저건 끝까지 건방이네.’

이비는 카셀의 거만한 등짝을 향해 삐죽이다가 방에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로 눈을 돌렸다.

온종일 부지런히 달린 시계 침이 어느덧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디에스를 만나러 갈 시간이야.’

잘 들어왔으려나? 만약 무사히 성에 들어왔다면 복도에 숨겨 둔 쪽지도 읽었겠지.

이비는 디에스를 생각하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외성 4층, 서쪽 복도, 가장 안쪽 창고.


“저녁 9시부터.”

뱀은 그 어두운 창고에 도사린 채 중얼대며 웃었다.

9시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난 것 같은데, 이 쪽지를 남긴 소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10시가 되면 올까? 아니면 11시? 자정까지 기다리기는 싫은데.

차라리 직접 찾아 나설까. 하지만, 하지만 놀라게 해 주고 싶어.

기다리는 동안 하녀 옷이라도 다시 입어볼까? 그럼 더 재미있을지도.

혹시 그 남자가 잘못된 것 때문에 화를 낼지도 몰라. 물론 그것도 좋아.

아 좋지만, 정말 다 좋지만, 역시 더 기다리는 건 싫어. 이미 너무 많이, 정말 오래 기다렸으니까.

그런데 너는 아직 얼굴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지.


“너무해요.”

뱀은 속삭이듯 푸념하고서 그 비좁은 창고에서 일어났다.

더는 못 기다리겠으니 직접 찾으러 가야겠다.

너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영리한 사람이니까 완벽하게 위장했겠지.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너의 냄새를 기억해요.

뱀은 들뜬 기분으로 창고의 문을 밀었다. 그런데 밖에서 뭐가 막고 있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 열려?”

그럼 부수면 되지.

뱀은 그믐을 앞두고 한층 강해진 저주를 가감 없이 내뱉었다.

그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저주를 날카롭게 벼려 채찍처럼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저주는 모든 것을 매섭게 찢는다. 갑옷도 마차도 말도 사람도.

그러니 저 초라한 나무 문도 단숨에 찢겨야 정상인데, 뜻밖에도 그 문에 닿으려는 찰나 뱀의 저주가 덧없이 사라졌다.

마냥 느긋하던 뱀이 그제야 비로소 표정을 굳혔다. 그는 어두운 등불에 의존해 문의 상태를 살폈다.

지극히 평범한 나무 문이지만, 잘 보니 바닥에 무언가 흩뿌려져 있었다. 문틈으로 들어온 듯 점점이 떨어져 있는 그건…….


“마냐냐의 소금.”

뱀이 모래 같은 소금 결정을 발견하고 손을 뻗을 때였다.

어디선가 시작된 달콤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닿았다.


‘노랫소리?’

그걸 깨닫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뱀을 덮쳤다.

뱀이 휘청 무너질 때, 창고 밖에는 그가 그토록 그리던 소녀가 이미 와 있었다.

이비는 문틈에 입을 댄 채, 그 안에 갇힌 뱀을 향해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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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하녀에게 식사를 챙겨 주고 나온 이비는 심장이 너무 뛰어 난감했다.

그래서 그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벽에 등을 기대고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그러고 나서는 디에스에게 가서 필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하녀가 수상해요.

갑작스러운 의심에 디에스가 의아해하자 이비는 다시 펜을 움직였다.

―하녀인데 손이 너무 부드러워요.

이비는 저 하녀가 제 손등에 입을 맞추던 감촉을 떠올렸다. 이비의 손을 조심히 감싸는 하녀의 손은 습진이나 상처 하나 없이 고왔다.

―어제와 달리 침착하고요.

어젠 과하게 떨어서 괜한 의심을 사더니, 오늘은 꼭 다른 사람처럼 차분하다. 마치 어제는 일부러 티를 낸 것처럼.

―그리고 방에서 우리가 하는 얘길 엿듣고 있어요.

엿듣는다는 소리에 디에스가 시선으로 근거를 물었다. 그래서 이비는 종이에다 빠르게 휘갈겼다.

―치마에 구겨진 흔적이 없어요.

이비가 방에 들어갔을 때 하녀는 퇴창에 앉아 있었다.

마치 거기 오래 앉아 있던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그 하녀가 입은 주름 지기 쉬운 하녀 복은 깨끗했다. 누워 있던 흔적도 앉아 있던 흔적도 없었다.

―문가에서 소리를 엿듣다가 내 발소리를 듣고 시치미를 뗀 거예요.

그러니 절대 순진무구한 하녀는 아니다. 그렇다고 브릭 남작의 끄나풀도 아니다. 이 하녀 덕분에 남작은 아주 곤란해졌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머지 유력한 가능성은 하나.

―저 애가 뱀일지도 몰라요.

뱀이 이 투기장에 어떤 형태로 숨어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투기장의 소유물로서 갇혀 있을 수도 있고, 정체를 숨긴 채 천연덕스럽게 활보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자유로운 몸이라면 먼저 접촉해 올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하녀로 위장해서 맴도는 건 지나친 악취미지만.

이비의 주장을 인정하듯 디에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아가 올 때까지 잘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말고요.

뱀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유비아뿐이니까.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디에스에게 작은 꾸러미 하나를 건넸다.

―그전에 혹시 모르니까 이거 항상 가지고 있어요.

이비가 디에스에게 내민 건 위에서 챙겨 온 정화의 소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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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계속 모르는 척하다가 유비아가 이동할 즈음 재워 두려고 했다. 하녀가 뱀이라는 건 의심일 뿐 확정은 아니니까.

그런데 브릭 남작이 추방령을 내리며 일이 심히 어긋났다.

이 투기장에서 해결할 일이 많은 이비는 이대로 쫓겨날 수 없었고, 뱀으로 의심되는 하녀를 자기 대신으로 디에스와 내보냈다. 정화의 소금이 있으니 디에스라면 밤의 일족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비가 저렇게 억수같이 퍼부은 건 예상 밖이었다.

그럼에도 이비에겐 만약을 위한 대비책이 하나 더 있었다.

헤어지기 전, 이비는 일부러 하녀 앞에서 쪽지를 어디에 숨길지 이야기했다. 그러곤 나중에 디에스에게만 따로 귀띔해 놓았다. 쪽지에 적힌 장소의 왼쪽 방으로 오라고.

그러니 쪽지에 적어 둔 장소로 누군가 찾아왔다면, 게다가 잠깐 드나드는 게 아니라 내리 한 시간을 기다렸다면 그건 분명 뱀일 것이다.


‘디에스는 어떻게 된 거지?’

예상이 적중했지만 이비는 기쁘기보다는 초조했다. 왜인지 보이지 않는 디에스 때문에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저 뱀은 왜 안 쓰러지는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진작에 졸도했을 정도의 피를 정화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쓰러지지 않고 지독하게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 더 하면 죽을지도 몰라.’

이비는 계속 노래하며 바쁘게 생각했다.

뱀이 죽는다고 저주가 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가 죽으면 저주를 풀 단서도 사라진다. 아니, 다 떠나서 이비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비가 목소리를 더 높일지 말지 갈등할 때였다.


‘피 냄새?’

어디선가 비릿한 철 냄새가 풍겼다.

이비는 냄새를 쫓아 두리번대다가 눈을 크게 떴다. 창고의 문 위쪽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저주가 통하지 않게 정화의 소금을 가득 뿌려 놓은 문 위로, 흥건하게.

이비가 그걸 깨닫기 무섭게, 새하얀 손이 문을 뚫고 밖으로 뻗어 나왔다.

콰드득!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그 사이로 튀어나온 손이 이비의 목을 단번에 움켜쥐었다.


“윽……!”

순식간에 목이 잡힌 이비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노래는커녕 숨을 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비가 괴로워하며 벗어나려 하는데, 문 위에서 쏟아진 피 때문에 소금이 다 녹았는지 문이 조각조각 쪼개져 무너졌다.

그와 함께 이비의 목을 잡은 자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이러기예요? 나오느라 두 번 정도 죽었잖아요.”

천진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아니나 다를까 이비가 기억하는 하녀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눈망울은 여전히 사슴처럼 선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더는 가련해 보이지 않았다. 소금을 녹이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낸 그는 피를 흥건히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언제 눈치챈 거예요? 알면서 다른 사람한테 떠넘긴 거예요? 응? 왜 대답을 안 하지?”

뱀은 이비에게 대답을 채근하다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웃었다.


“아, 목소리가 안 나오는구나.”

목을 이렇게 조르는데 목소리가 나올 리가.

하지만 뱀은 그 사실을 알고도 손을 좀체 풀지 않았다. 이비가 손등을 아무리 할퀴어도 마찬가지였다.


“투기장에서 싸우는 거 봤어요. 아하하, 정화력을 그렇게 쓸 줄은 상상도 했어.”

그 뱀은 손을 놓으면 이비가 무슨 짓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대단하긴 한데, 무모한 짓은 마세요. 이렇게 목만 살짝 졸라도 속수무책인걸.”

그래서 여전히 다정하게 숨통을 조인 채, 반대편 손으로 이비의 가면을 벗겼다.

가면이 떨어지고 괴로워하는 이비의 얼굴이 드러났다. 뱀은 이비의 얼굴을 보고 활짝 웃더니, 비로소 손을 놓아주었다.

겨우 풀려난 이비는 거세게 기침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빠져나갈 틈을 찾았지만 어느새 이비는 뱀의 두 팔과 벽 사이에 갇혀 있었다.


“미안해요, 아팠어요?”

“죽는 줄 알았어, 이 망할 새X야…….”

이비는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러자 뱀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성녀님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뱀의 살가운 대답에 이비는 소름이 끼쳤다.

피로 범벅되어 있지만 알 수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깨끗한 백발이라는 걸.


“너 대체 뭐야……?”

“나는 엔테예요.”

이비의 신음 섞인 물음에 뱀, 엔테가 대답했다.

엔테는 피를 잔뜩 뒤집어쓴 주제에 아주 해맑게 웃으며 덧붙였다.


“널 죽이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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