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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왜 그러고 살아? (87/129)


87화. 왜 그러고 살아?
2023.03.30.


이비가 혼자 비구경을 할 때였다.

벽 너머로 고성이 들려왔다. 언뜻 들어도 카셀 몬트라가 성질을 부리는 소리였다.


‘뭐지?’

이비는 벽에 귀를 대고 엿듣다가,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복도를 살펴보니, 막 쫓겨난 카셀의 시종이 다른 수행원들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안 드세요?”

“말도 마라, 물에서 먼지 냄새가 난다고 역정을 내신다.”

“이런…….”

물? 먼지 냄새?

이비는 시종과 수행원들의 말에 고개를 갸웃댔다.


“차로 우려 볼까요?”

“아서라, 괜히 또 호통만 들을라.”

“그럼 어떡합니까, 이젠 과즙도 싫다고 하시는데.”

엿듣던 이비는 비로소 상황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보아하니 저 대귀족께서 비스의 물을 못 마셔서 고생 중인가 보다.


‘깨끗한 윗물만 마시다가 아랫물을 마시려니 역한 모양이지?’

그래서 수행원들이 과일 따위를 짜서 목만 축여 줬는데 그런들 갈증이 가실 리가 없고, 카셀의 성질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서 궁여지책으로 빗물을 받아다 준 거다.

하지만 저 까탈스러운 후작님은 폐허의 흙먼지 냄새를 곧장 알아챘고, 더러운 빗물을 먹이려 했다며 난리를 피워 이 상황인 듯싶다.


‘넌 진짜 이비 귀한 줄 좀 알아라.’

이비는 카셀이 물을 못 마셔 괴로워한다는 사실에 몹시 고소해졌다. 그래서 그의 고생이 지속되기를 기원하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씨익 웃었다.

이비는 두리번대다가 화분에서 조약돌 하나를 챙겼다. 그러곤 조심히 복도로 나갔다.


“저, 우연히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비가 나서자, 전전긍긍하던 시종과 수행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에 이비는 평소보다 음침한 목소리로 고했다.


“주제넘지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화분의 조약돌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지?”

“돌멩이요.”

이비는 우선 솔직히 대답한 후 침착하게 사기를 쳤다.


“물을 깨끗하게 해 주는 돌이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직접 보여 드릴게요.”

이비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잔에 빗물을 받았다. 그 후 아주 비장하게 빗물에다 돌을 떨어트렸다. 마냐냐의 노래를 슬쩍 웅얼댄 건 비밀이었다.


“드셔 보세요.”

가면 쓴 하녀가 돌과 빗물을 한데 담아 내밀었다.

시종이 그걸 영 마뜩잖게 쳐다보자, 호기심이 생긴 수행원이 대신 잔을 받아 냄새부터 맡았다.


“어?”

수행원은 고개를 갸웃대더니 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눈을 크게 떴다.


“먼지 냄새가 전혀 안 나는데요? 티엔다에서 마시는 물 같아요!”

수행원의 말에 시종이 설마 하며 잔을 가로챘다. 그러더니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거라면 드시겠어! 빗물 좀 더 가져와!”

“아, 그 돌을 다시 쓰려면 볕에 말려야 해요. 젖은 채로는 아무 소용 없어요.”

기뻐하던 시종과 수행원들은 덜컥 놀라 이비를 쳐다봤다. 그들이 이비에게 받은 물잔은 서로 맛을 보느라 거의 비어 있었다.


“그, 그런 건 미리 말할 것이지……!”

“제 방에 돌이 하나 더 있어요. 허락하시면 가져올게요.”

“당장 다녀와라, 빨리!”

시종은 놀라고 당황하고 안심하면서도 자신이 농락당하는 줄 까맣게 몰랐다.

그래서 이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족스럽게 복도를 나섰다.

.
.
.

―저녁 9시부터 자정까지 정시마다. 외성 4층, 서쪽 복도, 가장 안쪽 창고.

이비는 이런 쪽지를 써서 성 복도의 장식물 밑에 숨겨 두었다.

애초에 디에스와 합류할 장소는 추후 쪽지에 써서 숨겨 두기로 했다. 이비가 이 성에서 얼마나 활보할 수 있을지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이 쉽게 풀렸어.’

카셀 몬트라의 옆에 있게 된 건 이비에게 꽤 이득이었다.

게다가 목마른 놈에게 물을 줬으니, 어지간하면 내치지 않고 잘 데리고 있을 거다. 적어도 내일까진.


‘이제 디에스와 유비아만 오면 되는데…….’

그런데 밖에선 여전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비는 이비를 조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비가 한숨을 삼킬 때였다. 어슬렁대는 발소리와 함께 질리지도 않고 시비가 붙어 왔다.


“이런 데서 혼자 뭐 해?”

“도둑질 준비.”

“뭐라는 거야, 쟤.”

할 일이 없어 건들대는 용병 서넛이 이비의 대답에 웃음을 터트렸다.

낮에 본 용병처럼 막무가내로 끌고 갈 막장은 아니지만, 꽤 귀찮게 추근댈 분위기였다.

이비는 망설이지 않고 카셀의 시종이 준 인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용병들은 곧장 알아보고 혀를 차며 돌아섰다.


“잠깐.”

그런데 이비가 돌연 놈들을 불러 세웠다.


“너희 지금 한가하지?”

이비의 물음에 용병들이 떨떠름하게 눈을 흘겼다. 하녀 주제에 인장을 믿고 까분다는 투였다.

그래서 이비는 금화 한 닢을 꺼내며 덧붙였다.


“별일 없으면 용돈 좀 벌어 볼래?”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이비는 디에스가 영 걱정이었다.

***

합류 준비를 마친 이비는 계속 하녀인 척하며 디에스와 합류할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카셀 몬트라의 옆은 안전하지만 굉장히 짜증 나는 장소였다.


“아, 됐어. 치워.”

“조금만 더 드시지요. 그렇게 안 드시면 몸이 상합니다.”

그 이유는 서른 먹은 후작 놈의 끝 없는 밥투정 때문이었다.

짜다, 달다, 비리다, 흙냄새가 난다. 놈은 온갖 트집을 잡으며 식탁의 음식을 까 내렸다.

이비는 그 꼴을 보면서 혀 차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사람이 먹을 걸 내놔야 먹지.”

‘집돼지 주제에 뭐라는 거야.’

“다 안 맞으니까 치워. 입맛만 버렸어.”

‘그래, 그냥 먹지 말고 굶어, 굶다 죽어.’

이비는 저 배부른 돼지 놈을 속으로 욕하며 이 지겨운 저녁 식사가 속히 끝나길 기다렸다.

버릇없게 음식을 뒤적이던 카셀이 드디어 손을 놨다. 그러더니 싹 다 치우라고 명령했다.

이비는 다른 하인들과 함께 그 거창한 식탁을 치우려고 다가갔다. 그런데 냅킨으로 입을 닦던 카셀이 이비를 콕 찍어 붙잡았다.


“너는 잠깐 남아.”

갑작스러운 지명이었다.


‘뭐지? 돌이 어디서 났는지 물어보려는 건가?’

물어보면 화분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이비는 자신이 애먼 대답을 할까 봐 잠시 긴장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걸리면 재워 버리지, 뭐.’

어차피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파멸할 운명. 그러니 뒤를 생각할 필요 뭐 있나.

마음이 가벼워진 이비는 카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방에는 이비와 카셀 둘만 남았다. 그러자 카셀이 돌연 물었다.


“아까 같은 일은 자주 있나?”

이비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위에서 백작이 한 질문이랑 너무 똑같아서, 게다가 그때 그 질문의 이유가 바로 이 카셀 몬트라였어서.

그래서 이비는 무척 공교로우면서도 띠꺼워졌다. 마치 자기에게 일러 보라는 듯한 저 태도는 두 번째라도 참 재수 없었다.


“자주 있을 거예요. 저녁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기분과 별개로 이비는 착실히 대답했다. 그러자 카셀이 되물었다.


“여기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됐지?”

“여기서 일한 적 없어요. ……그저 노예로 지낼 뿐.”

“흠…….”

이비가 급히 덧붙인 말에 분위기가 어째 숙연해졌다.


“가족은?”

“없어요.”

“언제 헤어졌는데?”

“아주 어릴 때여서 모르겠어요.”

카셀이 연이어 질문을 던졌고, 이비는 태연히 대답하면서도 이놈이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가면이 얼굴 반절을 가리고 있지만, 카셀의 흥미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는 성이 풀릴 때까지 이것저것 물어볼 기세였고, 그래서 이비는 질문을 끊기 위해 선수를 쳤다.


“제가, 불쌍하신가요?”

“어.”

 

 
카셀은 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금세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불쌍하다기보다는…….”

카셀은 잠시 할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아주 진지하게 중얼댔다.


“왜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어.”

‘……진짜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열심히 생각하고 한 말이 저따위라니.

이비는 어이가 없어서 카셀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아주 대놓고 불손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면 덕분에 들키진 않았다.


“인간적으로, 좀 비참하지 않나? 그렇게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사는 건. 애써 버틴들 그 형편이 나아질 기미도 안 보이는데 넌 그걸 바꿀 생각도 안 하고 그럴 능력도 없잖아.”

카셀의 폭언은 진지했다. 심지어 정말 궁금하다는 듯 악의 없이 하는 말이었다.


“결국 가축이나 다를 바 없는 처지인데, 그 인생이 굳이 견딜 의미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이 무례하고 무신경한 말에 이비는 기분이 굉장히 더러워졌다. 만약 이 질문을 받는 진짜 당사자였으면 분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정말 상종도 못 할 놈이구나 싶었지만, 그럼에도 이비는 저주 때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의미도 가치도 아예 없진 않을 거예요.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기니까요.”

“무슨 좋은 일?”

“그리운 사람이 생긴다거나.”

“애인?”

“아뇨, 그러길 희망했으나 기회조차 없었던 생판 남이요.”

“그 와중에 짝사랑.”

카셀이 딱하다는 듯 중얼댔고, 이비는 화가 나서 가면을 집어 던질 뻔했다.

이비가 카셀을 살해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카셀이 한숨을 쉬며 중얼댔다.


“역시 이해를 못 하겠어. 대체 뭐야?”

카셀의 무지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고귀한 삶이 너무 당연해, 그에 한참 못 미치는 타인의 삶을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 가치를 함부로 평가하고 의미를 논했다.

이비는 저런 발상이 가능한 카셀 몬트라의 면면이 모조리 얄미웠다. 그러나 저주에 걸린 죄로 다시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먼 곳에서 보니까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가까이 오면 알 수 있어요. 위에 있든 밑에 있든 결국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이비는 저도 모르게 나온 대답을 잠시 곱씹었다.

그러곤 매우 굴욕적인 기분으로 인정했다.

다소 거칠긴 하지만, 카셀의 의문이 이비의 오랜 고민과 비슷하다는 걸.

나는 누가 봐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데, 왜 너는 누가 봐도 비참하고 삶을 사는가.

나는 이토록 고귀한데 왜 너는 그다지 비천한가.

나는 나인데 왜 너는 너일까.

결국 같은 결을 가진 그 물음에, 이비는 약간의 친절을 베풀어 덧붙였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면 두려워질 거예요.”

“뭐가 두렵다는 거지?”

“분명 같은 사람인데, 그럼에도 이렇게 다른 삶을 산다는 게요.”

이게 이비가 오랜 시간에 걸쳐 찾아낸 답이었다.

***

그 시각, 빗소리만 가득한 어두운 복도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적막한 복도를 경쾌하게 가로지르는 남자.

그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뱀이었다.

투기장으로 돌아온 뱀은 자연스럽게 복도를 거닐다, 복도에 진열된 커다란 항아리를 보고 씩 웃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항아리 밑을 들쳐 그 아래 놓인 쪽지를 찾아냈다.

―저녁 9시부터 자정까지 정시마다. 외성 4층, 서쪽 복도, 가장 안쪽 창고.

뱀은 그 쪽지에 담긴 예쁜 글씨를 보고 기쁜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곧 있을 만남을 고대하며, 그 종이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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