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기다리느라 혼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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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기다리느라 혼났어
2023.03.27.
“가면을 벗겨라.”
카셀이 검은 머리의 하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저 노파심이었다. 카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고, 호위들은 곧장 나섰다.
거구의 사내들이 다가오자 주저앉아 있던 하녀는 기듯이 도망쳤다. 그러더니 가면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호위들의 손길을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왜 저렇게 필사적이지?’
그저 가면을 벗으라는 것뿐인데.
카셀이 의심하듯 노려보자 옆에 있던 하인이 돌연 소리쳤다.
“가면은 안 돼요!”
여리여리한 체구에 어울리는 앳된 목소리였다.
그 애송이 하인이 하녀를 지키려는 듯 호위들을 막아섰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악!”
호위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 가녀린 소년을 밀어 넘어트렸다. 그러곤 주저앉은 하녀의 가면을 단숨에 벗겼다.
“아아…….”
얼굴이 드러난 하녀가 흐느끼듯 신음했다.
그래서 카셀은 더 의아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검은 머리 하녀는 이비가 아니었다. 카셀은 처음 보는, 모로 보나 밑 대륙 출신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의 얼굴은 직전의 소란 때문에 눈물범벅에다 초췌했다. 그걸 빼면 아무 특징 없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카셀은 이 여자가 가면을 절박하게 붙잡고 버틴 이유가 또 궁금해졌다.
“너희는 왜 가면을 쓰고 있지?”
“남작님의 명령이에요…….”
카셀이 묻자, 겁에 질린 하녀 대신 소년이 대답했다.
“용병들이 누나들을 끌고 가는 일이 많아서 가면을 쓰게 했어요.”
“가면을 쓰면 뭐가 달라?”
“가면을 쓰면 누나들이 더 많이 참아요.”
카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자 소년이 힘없이 대답했다.
“가면이 벗겨지면 누나들이 처벌받거든요. 그래서 나쁜 일을 당해도 말을 못 해요.”
“하…….”
카셀은 그제야 저 가면의 의미를 깨닫고 신경질 섞인 웃음을 흘렸다.
상황은 알만했다. 이곳엔 규율도 도덕도 없고 사내들은 내일이 없는 야만인이며 여인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
때문에 용병들이 하녀를 무작정 끌고 가는 일도 흔했다. 나아가 아름다운 하녀를 두고 저들끼리 싸우거나, 하녀 한 명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다가 결국 해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렇듯 저열한 잡음이 끊이지 않자, 브릭 남작은 모든 종에게 가면을 쓰게 했다.
그런다고 용병들의 더러운 행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문제를 덮을 수는 있었다.
우선 용병들이 특정 하녀를 찾아 난동을 피우는 일은 확실히 줄었다. 하녀들은 변을 당해도 침묵했다. 가면을 간수 못 한 책임이 무거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당하란 소리군.”
“그래야 윗분들이 편하니까요.”
카셀의 혼잣말에 소년이 멋대로 맞장구를 쳤다.
카셀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맹랑한 녀석을 쳐다보다가, 가면을 빼앗기고 어쩔 줄을 모르는 하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너, 오늘부터 내 시중을 들어라.”
이건 카셀 몬트라의 자비였다. 모종의 책임감 때문에 던진 변덕이었다.
그러나 굼뜬 하녀는 영문을 몰라 훌쩍대면서 눈만 껌뻑였고, 카셀은 혀를 차며 자신의 시종에게 재차 말했다.
“저 하녀, 내 방에서 일하게 해.”
카셀은 그 말을 남긴 채 돌아섰다.
‘설마 도와준 건가?’
뜻밖의 상황에 소년이 카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 잘못 먹었나? 안 어울리게 왜 저래?’
소년, 이비는 쓰레기 후작의 착한 척이 어색했다. 그래서 가면을 쓴 채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몇 시간 전, 브릭 남작의 추방령에 이비는 자신이 구해준 하녀와 옷을 바꿔 입었다.
그렇게 하녀를 자기 대신으로 만들어 디에스와 떠나보내고 투기장에 혼자 남았다.
하지만 하녀 옷은 바로 갈아입었다. 분위기로 보아 이러고 돌아다니면 온갖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쉬운 인간의 상징이지.’
이비는 씁쓸하게 중얼대며 성을 기웃대다가 적당한 곳에서 하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동여매듯이 입고 짧은 가발까지 쓰니 이비는 영락없는 소년이 되었다.
‘여분 가발을 가져오기 잘했네.’
이비는 이 위장에 만족하며 디에스와 유비아가 올 때까지 안전하게 숨어 있을 곳을 찾았다.
그러던 중 가냘픈 목소리를 들었다.
“놔, 놔 주세요…….”
소리를 따라 복도로 나가 보니, 참 지긋지긋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 용병과 애꿎은 하녀.
이비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마음먹었다. 저 용병의 방에서 잠시 신세를 지기로. 물론 그 전에 저 남자는 아주 창백해질 것이다. 적어도 며칠은 고생하며 침대 신세를 져야 할 만큼.
이비가 하녀 대신 끌려가기 위해 그 용병을 도발하려고 할 때였다.
거기 카셀 몬트라가 등장한 건 참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옷을 제대로 입고 검은 성주님의 방으로 와라. 누가 다른 일을 시키거나 끌고 가려고 하면 이 인장을 보여라.”
카셀의 시종이 하녀에게 인장을 건네며 돌아섰다.
하녀는 이게 호의인지 새로운 시련인지 헷갈려 덜덜 떨었다. 그러면서도 명령을 듣기 위해 애써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비는 그 하녀를 돕는 척 방까지 따라갔다.
“도와줘서 고마워, 너는 누구니?”
방에 도착하자 겨우 정신을 차린 하녀가 이비에게 물었다.
“나는 이비 아리아테야.”
“성이 있어?”
“신경 쓰지 마, 성녀가 되려고 만든 가짜 성이야.”
“그게 무슨…….”
이비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하녀에게 빙그레 웃어 주었다.
물론 가면 때문에 하녀는 이비의 미소를 볼 수 없었다. 대신 이비의 낮은 노랫소리는 들을 수 있었고, 직후 잠이 들 듯 쓰러져 버렸다.
“그런 짓을 당했는데 또 일하라니, 양심도 없는 놈들.”
이비는 쯧쯧 혀를 차며 하녀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푹 쉬세요, 일은 내가 대신 할게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옷장에서 하녀 옷을 꺼내 입었다. 그러곤 가발을 벗고 이 하녀를 흉내 내듯 머리를 질끈 묶었다.
하녀의 가면도 벗겨 방 안에 꼭꼭 숨겨 버렸다.
“이러면 깨어나도 한동안 밖에 못 나오겠지.”
준비를 마친 이비는 파리한 얼굴로 잠든 하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음, 조금 미안하니까 금화 하나 넣어주자.”
하녀의 주머니에 금화를 주섬주섬 넣어주는 걸로 양심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그래도 도와준답시고 일을 시킨 쪽보단 이용해 먹으려고 쉬게 하는 쪽이 낫잖아. 그치?”
자기 합리화에 성공한 이비는 인장을 들고 하녀의 방을 나섰다. 그러곤 검은 성주님의 방으로 향했다.
시종에게 받은 인장을 보여 주자 호위들은 이비를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카셀이 있는 방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 옆의 하인 대기실에서 부를 때까지 기다리게 되었다.
그 안에는 귀빈을 위한 다과나 술, 장기판, 장식용 칼 등의 잡다한 사치품이 가득했다.
‘나름 보호 조치인가?’
이비는 혼자 있게 된 대기실을 둘러보다 이내 코웃음을 쳤다.
‘카셀 몬트라 주제에 웃기고 있네. 쓰레기면 쓰레기답게 굴 것이지.’
참으로 아니꼽지만, 이비는 이 호의를 기꺼이 가로채기로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디에스와 유비아가 올 때까지 안전하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를 들키지만 않으면 카셀 몬트라의 옆만큼 안전한 곳도 없다.
‘앗, 이 찻잔 예쁘다.’
진열장을 들여다보던 이비가 찻잔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디에스한테 갖다줘야지.’
찻잔은 찻잔으로 잊는 법.
성녀 후보는 히히 웃으며 망설임 없이 남의 재산을 훔쳤다.
그때 창문이 덜컹 흔들렸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내내 어둡던 하늘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비를 뿌리는 모양이었다.
귀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이비는 마음 놓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소금에 비가 닿으면 녹을 텐데.’
마냐냐의 소금도 어쨌든 소금이다. 물에 닿으면 당연히 녹고, 녹으면 저주를 막지 못한다.
그래서 이비는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며 잠시 걱정했다.
‘디에스는 괜찮겠지?’
이비는 창가에 서서 성 밖의 폐허를 멀리 내다보았다.
한참 전에 떠난 마차는 물론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잿빛으로 가라앉은 폐허만 시야에 가득했다.
***
거센 빗줄기가 세상을 공평하게 적셨다.
처참히 살해된 인간들의 주검도, 형편없이 부서진 마차의 잔해도, 그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진 금화도.
그리고 이 참극을 일으킨 뱀도 내리는 비에 속절없이 젖어 들고 있었다.
뱀이 걸친 화사한 가발이나 몸에 달라붙는 드레스, 하얀 가면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한때는 하녀였고 한때는 이비의 대역이었던 뱀이 가면을 벗으며 속삭였다.
뱀의 얼굴은 여전히 순하고 예뻤다. 비로소 드러낸 목소리도 성별을 구분하기 어렵게 부드러웠다.
“사실 더 일찍 올 줄 알았는데, 기다리느라 혼났어.”
가면을 벗은 뱀이 하늘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떨어지는 비를 맨얼굴로 느끼며 푸념했다.
“정말 한참 기다렸다고요. 다 죽이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으면서. 차라리 깨끗하게 치워 놓고 기다릴까도 했지만, 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마치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어리광 섞인 목소리였다.
“저기요, 내 말 듣고 있어요?”
기분 좋게 속삭이던 뱀이 고개를 내리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피투성이로 쓰러진 적발의 남자, 디에스였다.
그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난자당한 듯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그의 가면도 반 토막이 나서 저 멀리 나뒹굴었다.
그래서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선 핏빛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뱀은 그 만신창이의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제 안 들리는구나.”
뱀은 고개를 저으며 넝마가 된 남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치 개울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양새였다.
“그 여자가 만든 사냥개라기에 내심 기대했는데, 썩 대단치 않네요.”
뱀이 가볍게 푸념하며 손끝으로 디에스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디에스가 왈칵 피를 토했고, 뱀은 화들짝 물러섰다. 그러더니 울상을 지으며 중얼댔다.
“아, 불쌍해. 아프게 살아 있어.”
그는 떨어진 새를 발견한 아이처럼 다시 조심스레 다가갔다.
“미안해요, 편하게 해 줄 테니까 그만 쉬어요.”
뱀은 안타까운 얼굴로 디에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거기가 천국인지 지옥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가 원래 있을 곳은 거기니까.”
적막한 폐허 위로 또 한 번 굉음이 일었다.
폐허의 파편이 비와 함께 쏟아지는 가운데, 피를 뒤집어쓴 뱀이 몸을 일으켰다.
“흐음…….”
뱀은 피를 흥건하게 뒤집어쓴 제 몸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거추장스러운 가발과 옷을 벗었다.
“충분히 죽였으니까 이만 돌아갈까?”
뱀이 옷을 벗자 청년과 소년 그 사이의 몸이 드러났다. 그는 희고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비에 젖어 늘어진 곱슬머리는 그의 선한 외모에 어울리는 순백색이었다.
뱀은 눈부신 피부를 드러낸 채 비를 맞았다.
이윽고 피가 씻겨 나가자,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댔다.
“이비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뱀의 순진한 두 눈에 환희가 섞였다.
그때 뱀의 뇌리에는 어느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