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역습
(85/129)
85화.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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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역습
2023.03.23.
“그 두 사람이 성을 떠났습니다.”
카셀은 시종의 보고를 받으며 소파에 등을 깊이 파묻었다.
“말씀대로 호위 스무 명을 동행시켰습니다. 다만 염려하시는 것처럼 용병들이 괜한 마음을 품고 따라붙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 두 사람이 떠날 때 상당량의 금화를 길에다 뿌렸습니다. 상인이든 용병이든 가릴 것 없이 금화를 줍느라 난리가 났었고 아직도 서로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욕심 많은 용병들은 힘들게 마차를 쫓는 대신 이웃들의 주머니를 먼저 노릴 것이다.
시종의 보고에 카셀은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찼다.
그 수전노 남작을 갈궈서 기껏 포상금을 내줬건만, 그걸 길바닥에 뿌리고 가다니.
폐허에서 불청객을 만나지 않으려고 머리를 쓴 건지, 처음부터 돈이 목적이 아니었던 건지, 그래서 그 가면 여자가 이비 아리아테인지 아닌지.
모든 게 의문이지만 카셀은 결국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호위들에게 기회를 봐서 여자의 가면을 벗겨 보라고 했었는데, 여자가 생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시도는 실패해 버렸다.
그래서 아예 호위들을 몽땅 내보내 그 남녀의 사지를 붙잡고 얼굴을 확인해 볼까도 했지만, 그러다가 이비가 혼자 도망쳐서 위험해지면 그 역시 문제였다.
때문에 카셀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를 포기하고 일단 그 수상한 이인조를 쫓아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 달구경이라는 건 오늘인가?”
“네, 자정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카셀은 가만히 인상을 썼다.
그는 그 전에 갇혀 있는 밤의 일족들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쓸데없는 짓을 해 버린 터라 더는 괜한 짓을 할 수가 없었다.
포상금을 대신 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데, 여기서 더 나섰다간 투기장의 주인이 괜한 낌새를 챌지도 몰랐다.
카셀은 답답해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가면을 찾아 쓰며 무작정 방을 나섰다.
지금 카셀 몬트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이번 그믐을 안전히 넘기고 다음 그믐 전까지 이 투기장을 폐쇄하는 것이다.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는 다시 쾌적한 티엔다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이젠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왜인지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규율도 도덕도 없는 최하층의 시궁창에서 굴러다니는 인생들이 딱히 안타까운 건 아니었다. 카셀이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측은지심보다는 혐오감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이렇게 굳이 내다보러 가는 이유를 카셀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은 알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가면을 쓴 카셀은 시종과 호위 몇을 대동한 채 귀빈들이 머무는 내성에서 잡배들이 드나드는 외성으로 이동했다.
두 성을 잇는 다리를 넘기 무섭게, 복도 저편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 파열음에 호위들이 반사적으로 카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셀은 성가시다는 듯 그들을 쳐내고 복도를 돌아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곳엔 이 시궁창과 아주 잘 어울리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복도의 바닥엔 깨진 항아리의 파편이 가득했다.
그 위에서 가면 쓴 하녀가 지저분한 용병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하녀는 끌려가지 않으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텼고, 용병은 뜻대로 되지 않는 하녀를 후려치려는 듯 팔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소년으로 보이는 여리여리한 하인이 그걸 말리던 중이었는지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카셀은 그 뻔하디뻔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동정하지 않기를 잘했다. 여기 있는 태반은 불쌍해하기보다는 경멸해야 하는 작자들이 맞았다.
카셀이 가만히 쳐다보자 용병은 언제 포악하게 굴었냐는 듯 팔을 내리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카셀이 침묵하는 동안 알아서 도망쳐 버렸다.
그 지저분한 자가 사라지자 그 자리엔 봉변당할 뻔한 하녀와 지켜보던 하인, 그리고 사금파리들만 남았다.
용병에게 끌려갈 뻔한 하녀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카셀은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눈을 돌리려다가, 그 하녀의 머리카락을 보고 멈췄다.
가면을 쓴 하녀는 공교롭게도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검은 머리카락을 질끈 올려묶고 있었다.
그래서 카셀은 그 하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시종에게 나직이 명령했다.
“저 가면 벗겨 봐.”
***
그 시각,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마차 한 대가 폐허를 지나고 있었다.
저 악명높은 투기장의 전설이 된 ‘얼굴 없는 유모님’을 태운 마차였다.
그 마차에는 유모님만이 아니라 노을빛 머리카락의 여인도 함께 타고 있었다.
하녀를 학대하고 브릭 남작의 비서에게 대거리하고 길바닥에 금화를 뿌려 댄 일로 ‘얼굴 없는 계모님’이라는 편견 가득한 별명을 가지게 된, 유모님의 파트너였다.
마차엔 둘 뿐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투기장에서 거금을 벌었으니 잔뜩 들떠 있을 법도 한데 오가는 대화조차 없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정적만 이어지길 한참, 계모가 돌연 빈 수첩에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분은 혼자 괜찮을까요?
계모의 물음에 유모, 디에스는 가면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디에스와 마주 앉은 가면의 여인은 이비가 아니라 이비가 구해 준 투기장의 하녀였다.
브릭 남작의 변덕으로 투기장에서 쫓겨나게 되자, 그 성녀 후보는 감하게 계획을 수정했다.
자신의 계획을 어떻게든 성공시키기 위해 그 투기장에 혼자 남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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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투기장에 오기 전, 이비에겐 세 가지 과업이 있었다.
“하나는 뱀을 잡는 것, 또 하나는 백작님의 일상을 지켜 내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카셀 몬트라의 약점을 잡는 거예요.”
이비가 디에스와 유비아를 앞에 앉혀 두고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투기장 한 곳에서 이 세 가지를 다 해결할 수 있다니, 우린 참 운이 좋아요.”
“본인이 엮어 놓고서 운이 좋다뇨, 위험한 일을 벌였다는 자각 정도는 하시죠…….”
“후후후…….”
그 위풍당당한 이비는 디에스의 핀잔에도 음산하게 웃을 뿐이었고, 디에스는 잔소리가 통하지 않는 아가씨를 보며 그저 한숨을 삼켰다.
노심초사하는 집사의 말마따나, 단지 운이 좋다는 말로 퉁 치기에 이 일은 지극히 작위적이었다. 그 세 가지 일은 투기장에서 우연히 겹친 게 아니라 이비가 엮어 낸 쪽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 큰일을 한 번에 처리하려는 이비의 과격함 내지 대범함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별수 있나요, 시간이 이렇게 없는데. 이번 그믐 안에 모두 마무리해야 해요.”
하지만 이비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비스 남동부에 저주가 심화된 건 투기장에 갇힌 밤의 일족 때문이라고 했죠. 원래는 그쪽으로 저주가 몰려야 하는데 정화의 소금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어서 인근에 퍼진 거라면, 저주를 폐허로 끌어들이면 되겠죠.”
“그 투기장에서 매달 브릭 자작에게 거액의 상납금을 내는 걸 보니, 브릭 남작은 투기장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자작의 대리인으로 투기장을 관리하는 사람일 거예요. 그러니 처남에게 상납금을 내지 못할 상황이 오면 목숨 걸고 해결하려고 할 거예요.”
“뱀이 그 투기장에 어떻게 숨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뱀을 특정하려면 유비아가 같이 가야 하는데, 유비아가 미리부터 와 있으면 위험해요. 유비아가 그 뱀을 느끼듯 그 뱀이나 다른 밤의 일족들도 유비아를 느낄 테니까요. 그러니까 유비아는 비밀 투기장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백작과 함께 와야 해요.”
이비는 먼저 투기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의 해야 할 일을 정했다.
“유비아가 뱀의 위치를 알아내면 디에스가 길을 찾고 내가 방해꾼들을 재우면서 뱀을 잡을 거예요.”
“그 후 유비아가 폐허로 나가서 소금을 버리면 이번 그믐의 저주는 유비아에게 몰리겠죠. 혹시 저주가 형태를 갖추면 백작이 처리해 주면 되고요.”
“중요한 건 마지막이에요. 저주를 폐허로 불러들인 다음엔 투기장으로 유인해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대피하면 성문을 걸어 잠그는 거예요. 그 후 바옌 군이 올 때까지 버티다가 소금과 밤의 일족을 넘겨주면 끝이에요.”
위풍당당 이비 아리아테는 자신의 세 가지 과업을 정말로 한 번에 처리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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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야심 찬 계획은 갑작스러운 추방령으로 크게 틀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비는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었고, 결국 하녀와 옷을 바꿔 입고 혼자 그 투기장에 남기로 했다. 디에스가 유비아를 데리고 성벽을 넘을 때까지 안에서 기다릴 요량이었다.
디에스는 물론 반대했다. 그는 이 험악한 곳에 이비를 혼자 둘 수 없었다.
하지만 이비는 이번에도 디에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요.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따를게요.
이비의 당찬 목소리가 다시 떠올라, 디에스는 연거푸 한숨만 삼켰다.
그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이비인 척 가면과 가발을 쓴 하녀가 수첩에 다시 끄적였다.
―그분은 정말 용감하신 것 같아요. 존경스러워요.
디에스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실제로 이비는 존경스러울 만큼 용감한 녀석이었다.
그는 기억한다. 탑의 지하에 갇혀 있던 시절, 이비가 침대에 웅크려 몰래 흐느끼던 모습을. 낮에는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굴던 그 아이는 밤이 되면 그렇게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다시 용기를 냈다.
이비는 언제나 그렇게 몸부림쳐 온 용감한 겁쟁이였다.
그런 이비를 혼자 두고 온 디에스의 마음을 대변하듯, 잔뜩 흐리던 하늘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마차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툭툭 울리는데 하녀가 수첩으로 다시 말했다.
―그런 분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뻐요.
디에스가 고개를 끄덕여 주려고 할 때였다.
후드득하는 소리가 마차의 지붕이 아니라 옆면을 후려쳤다.
일순 빗소리로 착각했으나, 뒤이어 풍기는 진한 피 냄새에 디에스는 눈을 홉떴다.
“습격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한 후에야 호위들이 고함쳤다. 마차가 멈춰 서고 그 주변을 호위들이 분주하게 에워쌌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아아악!”
호위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거의 동시에 디에스는 맞은 편에 앉은 하녀에게 팔을 뻗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벌이 내리듯 디에스가 탄 마차가 반파되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천천히 젖어 들던 폐허 위로 마차의 파편이 튀었다.
폐허로 튕겨 나온 디에스는 몸을 굴리며 일어났다. 아찔한 충격과 함께 참극이 펼쳐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마차 주변엔 시체가 가득했다. 사람도 말도 처참히 찢겨 죽어 있었다.
상황을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이, 디에스는 다시 몸을 굴렸다. 동시에 그가 서 있던 땅이 보이지 않는 공격으로 난자당했다. 카가각 소리와 함께 돌이 튀었다.
또 한 번 공격을 피한 디에스는 욱신대는 통증을 느끼고 자신의 허리를 짚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번지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이 허리를 베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디에스는 통증을 참으며 부서진 마차 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나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디에스의 귓전에 울렸다.
“너 감이 좋구나.”
처음 듣는 목소리지만 디에스는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