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계획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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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0.
“내려와서 밥 먹어.”
그 소년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썼다.
“자, 거기 앉으면 돼.”
그리고 이상할 만큼 거리감이 없었다.
시온은 주방의 문간에 서서 자신을 위해 식탁 의자까지 빼 준 소년, 유비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유비아도 시온을 멀뚱히 마주보기 시작했다. 경계하지도 위축되지도 않은 채, 무슨 문제 있냐는 듯 태평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길 한참, 결국 묘한 패배감을 느낀 건 시온 쪽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디에스 심부름. 세입자가 오면 식사를 챙겨 주라고 했어.”
시온이 어쩐지 지는 기분으로 입을 떼자 유비아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약 한 달 전, 이비는 시온의 평화로운 거처를 덜컥 사 버렸다. 그리고 이전 집주인인 마르소 부인은 아쉬운 얼굴로 뒤도 안 돌아보며 떠났다.
친지가 사는 도시로 간다던데, 그 부인은 정말 아쉬워하면서도 부리나케 가 버렸다. 정든 이웃들과 헤어지는 건 슬프지만 저주 때문에 마음 졸이는 건 이제 지긋지긋한 탓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자신의 생활이 한층 척박해질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마르소 부인은 소정의 사례를 받고 세입자의 식사와 세탁을 맡아 줬지만, 새 집주인에겐 그런 걸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새 집주인은 이전 집주인의 역할을 알아서 이어받았다.
다만 제대로 할 생각은 별로 없고 어쩐지 엿 먹일 의도만 짙게 느껴졌다.
식탁에 올라온 검은 음식과 그걸 당당히 내놓은 하얀 소년을 보면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시온이 식량 반 숯 반의 접시를 쳐다보자 유비아가 침착하게 변명했다.
“그래도 먹을 수는 있어.”
그러더니 제 말을 증명하려는 듯 반쯤 탄 빵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시온은 식탁이 왜 재투성이인지 알게 되었다.
소년은 빵의 탄 부분을 털다가 그걸 식탁 밑으로 떨어트렸다. 나이프로 잼을 들 때도 절반 이상을 식탁에 뭉텅 흘렸고, 우유가 든 컵도 어김없이 엎질렀다. 그걸 닦으려다가 수프가 든 접시마저 쳤지만, 낮은 접시가 뒤집히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소년은 표정만 침착할 뿐 모든 게 서툴렀고, 그런 주제에 자신의 실수에 절대 굴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서툰 면이 부성애 및 모성애를 자극하는 아이고, 나쁘게 말하면 모자라서 속 터지는 놈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이면 태연히 사고를 치는 그 녀석을 돕든 막든 하겠지만, 시온은 문간에 선 채 그 모습을 계속 지켜만 보았다.
그러다가 나직이 물었다.
“밤의 일족이라고 했나?”
“응.”
“누굴 죽이고 밤의 일족이 됐지?”
그 물음은 심문에 가까웠다.
시온은 유비아의 겉모습을 믿지 않았다. 이비가 안전하다고 보증했지만, 그 역시 전부 신뢰하지 않았다.
노체의 저주는 오직 생명을 거두기 위해 그믐마다 나타난다. 그리고 밤의 일족은 그 저주를 받아들인 자들이다.
때문에 시온은 여전히 유비아의 위험성을 의심했고, 이 녀석이 집에 혼자 있는 걸 알았을 땐 이비의 집사에게 꽤 화가 났다. 마을에 밤의 일족을 들인 걸로 모자라 제대로 감시도 안 하고 방치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시온의 태도는 여느 때보다 더 냉랭했지만, 유비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만 저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죽였어.”
“밤의 일족이 되려면 숙원이 필요할 텐데.”
“너는 아는 게 많구나.”
유비아가 칭찬하듯 말했다. 그래서 시온은 왠지 또 한 번 지는 느낌이었다.
“맞아, 밤의 일족이 되려면 숙원이 필요해. 간절한 살의가 있어야 저주와 섞일 수 있어.”
소년의 인정에 시온은 미간을 더 좁혔다.
유비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이 내용은 바옌 군에서도 상급자만 아는 기밀이다.
바옌 군이 오랜 기간 조사해 알아낸 바에 의하면 밤의 일족이 된 자들에겐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저주와 조우했을 때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를 미치도록 증오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지 못해 좌절한 자들에게 저주는 속삭였다.
힘을 주겠노라고, 나와 함께 가자고.
밤의 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건 그걸 받아들인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밤의 일족이 되어 제일 먼저 자신의 숙원을 이룬다. 저주를 받아들이게 만든 그 누군가를 죽이는 것으로.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죽였어.”
“왜지?”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고분고분 대답하던 유비아가 돌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입을 여는 듯 마는 듯 자그마하게 덧붙였다.
“너하고는 아직 안 친하니까.”
“친해질 상대가 아닌 것쯤은 알 텐데.”
“못되게 굴어도 소용없어. 학생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의도가 떳떳하다고 성질부리는 것까지 떳떳한 건 아니야.”
뜻밖의 훈계에 시온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유비아는 다 이해한다는 듯 끄덕이더니, 빵에 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온은 꽤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리 얌전한 척해도 밤의 일족은 그 특유의 광기를 숨기지 못한다. 그런데 시온이 아는 밤의 일족과 달리 저 유비아라는 소년은 확실히 멀쩡해 보였다. 아니, 저주에 홀린 밤의 일족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희한했다.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조숙함도 그렇고, 세상을 통달한 듯한 초연함도 그렇고.
그래서 의혹은 자연히 그 소년의 백발로 향했다. 점성술사도 정확히 저런 백발이었다.
‘혹시 저 녀석도?’
시온은 의심과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유비아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점성술사처럼 섭리를 거스른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애들이 너를 계속 찾았어. 곧 그믐이라서 무섭나 봐.”
제정신인 밤의 일족이라는 기묘한 존재가 빵을 오물대며 말했다.
“재앙을 견디는 건 너무 가혹한 일 같아.”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게 과연 밤의 일족이 할 말인지.
시온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 창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흐린 하늘 때문에 마을의 풍경도 평소보다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아마 마을 사람들의 심정도 비슷할 것이다.
그믐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조금 여유 있는 자들은 이미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그럴 여력이 없는 대부분은 여전히 남아 두려움을 견디고 있었다.
“이비는 어디 있지?”
시온이 다시 물었다.
그는 집에 오면 위에서 도망친 이비를 마주하게 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이비가 그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 주겠다며 호언장담했으니까.
시온이 이비를 찾자 유비아가 곧장 대답했다.
“오늘 밤에 만나러 가야 해.”
다만 썩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시온이 이해를 못 하고 쳐다보자 이비가 주방에 있는 선반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이비가 써 둔 쪽지 있어.”
그런 건 빨리 말해.
시온은 핀잔하고 싶은 걸 참으며 선반에 접혀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이비의 예쁜 필체가 썩 예쁘지 않은 내용으로 담겨 있었다.
친애하는 백작님께.
우리의 계약에 따라 당신을 소환합니다.
제가 있는 곳까지 유비아를 데려오세요. 장소는 유비아가 알아요.
혹시 협조의 순서를 따질 생각이라면 부디 양보와 배려의 마음을 배우시길.
물론 이런다고 없던 이타심이 갑자기 생기진 않겠죠.
본인의 소중한 일상을 위해서니까 따지지 말고 오세요. 그럼 총총.
추신. 위에서 못 한 이야기는 나중에 집에서.
편지를 훑어본 시온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이비의 목소리가 귀에서 쟁쟁 울리는 기분이었다.
위에서 그렇게 도망친 주제에 또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해 먹을 생각 같았다.
상당히 불쾌했지만 시온은 희박한 이타심을 발휘해 한발 양보하기로 했다.
이비를 어서 보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
이토록 서로를 그리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의 재회는 시작도 전에 착실히 어긋나고 있었다.
‘이렇게 순순히 내준다고? 왜?’
이비는 난감한 얼굴로 앞에 놓인 황금과 보석을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정직하게 나오는 거지?’
수작 부리기 좋게 일부러 가면도 써 줬는데.
‘밖에서 처리하고 회수할 생각도 아니었어.’
이비는 이 금화를 보자마자 또 다른 수작을 의심했다.
그래서 금화를 가져온 비서에게 이 돈을 용병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허세도 부려 보았다.
―모처럼 큰돈 벌었으니 패배자들한테 적선이라도 하고 가야겠네. 금화를 나눠 줄 테니까 모이라고 좀 전해 줘.
밖에서 강도질할 생각이라면 여기서 금화를 탕진하는 걸 극구 말리겠지.
이런 생각으로 시험해 봤지만 그 비서의 대꾸는 건조했다.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정오까지 떠나지 않으면 퇴거 조치할 예정이니 유념하시길.
‘대체 왜?’
이비는 남작의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돈 버는 데 혈안이 된 귀족이 용병 나부랭이에게 피 같은 돈을 넘기다니.
이비는 고민 끝에 나직이 읊조렸다.
“……미엘 세드로.”
“미엘?”
이비가 중얼대는 소리에 곁에 있던 디에스가 되물었다. 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으득 이를 갈았다.
“그게 부추긴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카셀 몬트라가 여기 직접 올 리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카셀 몬트라가 이비를 바로 알아볼 리 없고,
그러지 않고서야 브릭 남작이 이비를 이렇게 다급히 내쫓을 리도 없었다.
“미엘이 후작한테 뭐라고 한 거야,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카셀 혼자서는 이 강력한 유모가 성녀 후보와 한패라는 짐작을 절대 할 수 없다. 그 인간은 마지막까지 이비를 우습게 봤으니까.
게다가 비스를 밑 대륙이라고 부르며 경멸하는 카셀이 여기 내려온 것도 스스로 할만한 결정이 아니다. 아마 등이 떠밀려 왔을 것이고, 그 안하무인한 작자를 떠밀 수 있는 건 라우렐과 세드로, 이 둘 뿐이다.
“탑에서도 괜히 시비 걸더니, 그건 대체 나랑 무슨 원수를 져서……!”
“원수진 건 많죠. 여러모로.”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디에스의 눈치 없는 딴지에 이비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더니 초조한 얼굴로 엄지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여기서 쫓겨나면 끝이야.’
그믐이 되면 투기장의 문은 굳게 닫힌다. 그 문은 그믐이 끝날 때까지 열리지 않고, 그동안은 아무도 성문을 드나들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쫓겨나면 이비와 디에스는 다음 그믐까지 여기 갇힌 밤의 일족을 구경도 할 수 없다.
“백작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떻게? 여길 때려 부수라고?”
디에스의 제안에 이비는 고개를 저었다.
밤이 되면 백작과 유비아가 온다.
아마 그 백작은 성문이 잠기든 용병들이 다 함께 농성하든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거다. 이 투기장 때문에 남동부의 저주가 심해진 걸 알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여길 알아서 조질 확률도 높다.
하지만 그건 이비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럼 뱀은요. 소금을 쓴 증거도 남겨야 돼요.”
상황을 다 공유하면 백작이 과연 거기까지 협조할까? 잠시 대립을 멈췄을 뿐, 그는 이비가 성녀가 되는 걸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백작은 마무리를 위해 밖에 남겨 두고 투기장 안에는 이비와 디에스와 유비아, 이 셋이 일을 처리해야 한다.
“……디에스는 성문이 닫혀도 성벽을 타고 들어올 수 있죠?”
골똘히 생각하던 이비가 불현듯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을 들고 넘는 것도 가능해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유비아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는?”
“불가능해요.”
이비가 분한 얼굴로 노려보자 디에스는 급히 부연했다.
“발각이나 추락의 위험을 감수하면 넘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다시 성벽을 넘어 유비아를 데려오고 다 함께 투기장 안쪽까지 들키지 않게 이동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무모한 계획이에요.”
“밖에서 유비아만 데리고 오는 건 괜찮아요?”
“그것만이라면 그럭저럭.”
“그럼 됐네요.”
이비가 대뜸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디에스는 꽤 당황했다.
됐다니, 갑자기?
디에스의 의문에 이비가 방 안쪽을 가리켰고, 디에스는 그제야 이비의 의중을 깨닫고 탄식했다.
이비는 가리킨 건 하녀가 갇혀 있는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