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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이비 아리아테의 이상 (83/129)


83화. 이비 아리아테의 이상
2023.03.16.


아침에 눈을 떠 보니 하늘이 흐렸다.


‘비가 오려나 보네.’

그래서 이비는 구름이 켜켜이 쌓인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티엔다비스엔 비가 잘 내리지 않았다. 대륙의 고도가 높아 비구름이 오르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래도 해에 서너 번은 저렇게 비구름이 밀려와 땅을 적셔 주었다. 물이 귀한 이곳에서 비는 늘 반가운 손님이었다.

이비는 곧 들려올 빗소리를 상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서 빵 몇 개와 물 한 잔을 챙긴 후 안쪽 방으로 향했다. 그러곤 문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노크하는 건 좀 이상한가?’

어제 화풀이하겠다며 억지로 붙잡아 둔 하녀가 이 안에 있다.

도와줄 생각으로 빼돌리긴 했지만, 이비는 이 하녀에게 친절하게 굴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노크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들어간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마자 이비는 창가에 있던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하녀는 가면과 앞치마를 벗고 퇴창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드문 비구름을 구경하던 것도 같고 창문으로 뛰어내려 달아날 궁리를 하는 것도 같았다.

이비는 그 하녀의 낯빛부터 살폈다.

하녀는 서럽게 울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차분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이비를 보고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먹어. 독은 안 들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이비는 테이블에 들고 온 것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섰다.

그런데 하녀가 급히 다가와 이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이비는 그 손을 뿌리치고 하녀를 돌아봤다.

이비가 날카롭게 경계하자, 하녀는 두 손을 들고 허둥대다가 테이블에 놓인 물컵에 손을 담갔다.

그러더니 그 물로 테이블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때리지 않으신 거요.

이비는 테이블의 문장과 하녀의 얼굴을 잠깐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흥미 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고 돌아섰다.


“어, 그래.”

그러자 하녀가 다시 이비를 붙잡았다.


“뭐야, 또?”

이비가 짜증을 내며 돌아보자 하녀가 다시 물을 찍어 바쁘게 글을 썼다.

―왜 저를 도와주셨어요?

이비는 착각하지 말라며 코웃음 치려고 했다. 그런데 입이 먼저 움직였다.


“네가 너인 게 이상해서.”

이비는 저절로 튀어나온 대답에 짐짓 놀랐다.

저주는 글로 된 질문도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이비가 아차 싶어 하녀에게서 물컵을 빼앗으려는데, 그 하녀가 먼저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

물음표.

설마 이런 데까지 저주가 반응하진 않겠지.

이비는 제발 아니길 바랐지만, 저주는 철저했다. 그래서 이비의 입은 또 한 번 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나인데 너는 너인 게 이상했어. 같은 공간에 있는데 너 혼자만 곤란한 게, 그게 내가 아니라 너인 것도 전부 다 이상해서 못 본 척할 수가 없었어.”

이비는 저도 모르게 말해 버리고 자신이 한 말에 당황했다.

저주에 걸린 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저주가 말로 풀어낸 본심에 오히려 정곡을 찔리는 기분.

자기 마음에 자기가 찔리다니, 언뜻 이상한 소리 같지만 세상엔 자기 진짜 마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특히 많은 것을 선택해야 했던 이비는 복잡한 계산 끝에 항상 자기 마음부터 포기했었다.

그래서 이비는 이따금 저주가 끄집어 내는 날것의 본심이 정말 난감했다. 바로 지금처럼.

잠시 굳어 있던 이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혀를 찼다.

혼자만 하던 생각을 입 밖에 낸 게 적잖이 민망했지만, 가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이런 술주정 같은 소리는 어차피 알아듣지 못했을 거다.

이비는 이렇게 생각하며 하녀가 잉크병으로 쓰는 물컵부터 빼앗았다. 그러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예상하며 그 하녀의 얼굴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녀는 웃고 있었다.

이미 다 이해한 것처럼, 기쁜 듯이.

순한 얼굴을 가진 그 소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숙였다. 그렇게 무릎을 꿇더니 이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조심스러운 경애의 표시였다.


“……그냥 변덕이야. 나하고 친해질 생각하지 마. 이런 요행이 또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난감해진 이비는 그 하녀를 향해 일부러 차게 말했다.

이비는 이 하녀에게 친절하게 굴 마음이 없었다.

어린 양의 구원자인 양 거만을 떨기 싫었다. 착하고 만만한 사람처럼 보여서 뒤통수를 맞기도 싫었다. 이 애가 이 일로 아무나 믿게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이 하녀는 이미 마음을 뺏긴 것 같았다.

―당신에겐 변덕이어도 내게는 구원인걸요.

물컵을 빼앗긴 하녀가 테이블의 물기를 모아 어렵게 대답했다.

그게 마치 눈물 자국 같아 이비는 말문이 막혔다.

대신 묘한 기시감이 찾아왔다.

아, 또 그 기분이다. 나는 왜 나이고 너는 왜 너인지 헷갈리는, 그 기분.

너와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인데 그럼에도 같은 것을 공유하고, 너와 나는 어쩌면 같은 사람인데 지독히 멀게만 느껴지는 이 기묘한 느낌.

나도 너처럼 누군가를 향해 그렇게 웃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린 이비는 그 하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술렁이는 마음을 안은 채 그 방을 빠져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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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자들은 이렇게 작은 일로도 구원받는다. 그리고 거기 간절히 매달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녀의 방에서 나온 이비는 마구 널뛰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좀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늘을 가둔 잿빛 구름이 어둡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이비의 여러 갈림길 중 이곳에 팔려 올 운명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비는 여기 도착한 순간부터 기분이 묘했다.

비스의 천애 고아들이 갈 곳은 대개 뻔하고, 이런 투기장은 그중 흔하게 거론되는 곳이었다.

이비처럼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지 않고서야 그들의 운명은 정말 뻔하다.

아니, 설령 신의 가호를 독점했어도 그걸 드러낼 기회가 없다면 마찬가지다. 발견되지 못한 원석은 평범한 돌멩이니까.

그러니 어쩌면 이비도 여기에 있을 수 있었다. 저 애처럼. 이러나저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참으로 저렴하게 처분되는 이곳의 무수한 사람들처럼.


‘하지만 나는 만났어.’

정말 운 좋게, 나를 발견해 준 사람을 만났다.

이비는 가슴에 조심히 손을 얹었다. 그러곤 그 하녀가 마지막에 한 말을 떠올렸다.

―당신에겐 변덕이어도 내게는 구원인걸요.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그 애는 나보다 훨씬 나았다.

나는 아저씨의 선의가 동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 괴로워했는데.

단순한 변덕으로 구원받고 매달리는 거라고 생각해서 늘 비참했는데.

이비는 그 애를 보며 자신이 참 옹졸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옹졸함을 고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새로운 희망이 생겼으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있던 이비는 손바닥을 치는 거센 박동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의 운명은 정말 이상하다. 모든 장소에서 너와 나로 분리된다. 그게 정말 이상하지만, 그게 이상하다고 느낄수록 가슴이 무겁게 뛰었다.

생명은 곧 연결이라는 유비아의 주장이 무색하게, 우린 모두 낱낱이 분리되어 타인으로 살아간다.

이따금 찾아오는 구원도 내게만 간절할 뿐 손 내미는 자에겐 변덕이나 여흥, 혹은 자기만족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는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변덕이 아니라면?

당신이 날 위해 나만을 찾아온 사람이라면.

이비는 아픈 가슴을 꾹 움켜쥐었다. 그러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뻐서 터질 것 같은 심장의 박동이.

이비의 가슴은 정말 아프도록 세게 뛰고 있었다. 차가운 가면 아래 얼굴도 열이라도 난 듯 뜨거웠다.

이비도 이젠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유비아와 함께 라우렐 백작이 이곳으로 온다. 그러니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이비는 한시라도 빨리 그 백작님을 만나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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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비의 들뜬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약속한 포상금입니다. 8할은 금화고, 모자란 2할은 상응하는 가치의 보석으로 담았습니다.”

남작의 비서가 아침부터 찾아와 금화와 보석을 궤짝으로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그럼 바로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

절대 내줄 리 없다고 생각한 상금을 덜컥 내주며 비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소동으로 남작님께서 크게 노여워하셨습니다. 투사의 긍지를 모르는 손님은 더 이상 두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말 같지도 않은 핑계로 쐐기를 박으면서.


“여기서 당장 나가주십시오.”

이건 이비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

비슷한 시각, 시온은 베개 밑에 머리를 파묻은 채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방에 있어요?”

“아직도 자요? 이제 점심이에요!”

문밖에서 시온을 애타게 부르는 건 그가 지난 한 달간 본의 아니게 방치한 제자들이었다.


 
시온이 집에 돌아온 건 불과 몇 시간 전, 늦은 새벽이었다.

원래 시온은 한 달 중 반은 타르데스 전당에서, 나머지 반은 이 작은 마을에서 지냈다. 그런데 지난 두 달간은 사사건건 티엔다로 불려 가느라 양쪽 모두에 소홀했다.

그래서 그는 깨어난 아마네세르를 떨어트리고도 전당에 며칠 더 머물며 밀린 업무를 정리했다. 실은 일이 약간 남았지만, 그믐이 다가와서 일단 대충 덮어 놓고 귀가했다.

이렇듯 부업이 많은 선생님은 피곤했고, 잠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놈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죽은 척했다.


“없나 봐.”

“아냐, 있어. 문 잠겨 있잖아.”

“그럼 자나 보다. 나중에 다시 오자.”

복도에서 티격태격하던 녀석들이 이내 조용해졌다.

놈들이 사라지자 시온은 안심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살금살금 찾아오던 단잠은 잠시 후 몽땅 달아나 버렸다.


“선생님 있다!”

“선생님, 잠옷 입고 자요! 감기 걸려요!”

“앗, 선생님 등은 왜 그렇게 다쳤어요?”

문밖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온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옆을 보니 창문에 달라붙은 꼬마 셋이 보였다. 그리고 여기는 2층이었다.

따질 게 많았지만, 놈들과 눈이 마주친 시온은 커튼부터 쳐 버렸다.

이 교사는 불성실할 뿐 아니라 파렴치하기도 해서 잘 때는 옷을 잘 안 입는 버릇이 있었다.

덕분에 상처로 가득한 등판을 꼬마 놈들에게 보여 주고 만 시온은 바닥을 더듬어 어젯밤 내던진 셔츠를 찾아 걸쳤다.

그렇게 대충 사람 꼴을 갖추고 커튼을 열자, 예의는 없지만 해맑은 제자들이 그를 반겼다.

그리고 수면도 사생활도 파괴된 선생님의 기분은 평소보다 더 저조했다.


“내려가라…….”

“선생님, 이럴 땐 위험하다고 걱정부터 해야죠! 아아악!”

시온은 실랑이하기도 귀찮아 건방진 제자의 안면을 잡고 손끝에 지그시 힘을 줬다.


“선생님 화났다!”

“야, 빨리 내려가!”

한 놈이 응징당하자 나머지 두 놈은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어디로 도망치나 싶어 내려다보니, 웬 사다리가 시온의 방 창문까지 놓여 있었다. 이걸로 여기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시온은 기가 차서 아직 고문당하는 제자에게 물었다.


“사다리 누가 가져왔어?”

“우, 우리가 가져온 거 아니에요……!”

“그럼 누구야.”

선생님의 추궁에 제자가 이층집의 아담한 안뜰을 가리켰다.

시온은 잠에서 깬 직후라 평소보다 더 흐린 눈으로 안뜰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한 소년이 있었다. 시온의 학생도 이 마을에 사는 아이도 아니었다.

긴 백발을 땋아 내린 이질적인 복식의 소년.

이비 아리아테가 두고 간 유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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