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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카셀 몬트라의 갈등 (82/129)


82화. 카셀 몬트라의 갈등
2023.03.13.



“그 가면 쓴 두 사람, 포상금을 대신 내줄 테니까 당장 쫓아내.”

안 그래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지만, 브릭 남작은 성주의 제안이 반갑기보다는 당혹스러웠다.

거액의 포상금을 대신 내주겠다니, 그런 횡재가 아무 이유 없이 굴러들어 올 리 없었다.


“대저 무슨 말씀이신지…….”

브릭 남작은 영문을 묻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가면 사이로 보이는 성주의 두 눈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릭 남작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뒤늦게 깨닫자 성주가 낮게 짓씹었다.


“토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그 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성주의 경고에 브릭 남작은 항변 한번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성주, 카셀은 그 천박한 사내를 노려보다가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의 몸짓엔 저 사내와 이 공간을 향한 환멸이 가득했다.

카셀은 그 가면 남녀가 등장했을 때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저게 혹시 이비가 아닐까 싶어서.

그렇게 의심하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주요한 건 미엘의 한마디였다.


―있지, 이비네 집사가 비스에서 뭘 하는 것 같아.

이비네 집사.

카셀은 그 사소한 표현을 특별히 기억했다. 왜냐하면 작은 탑주가 이비의 집사를 아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겠지.’

보통은 ‘이비가 비스에 사람을 보낸 것 같다’, ‘뭔가 조사하는 것 같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미엘 세드로는 ‘이비네 집사’라고 정확히 한 사람을 지목했다.

그건 미엘이 특별히 기억하는 인물이라는 뜻이고, 그런 자가 절대 시시한 녀석일 리 없다.

어쩌면 비스의 저질 투기장을 놀 듯이 누빌 만큼 강자일 수도.

마냐냐 탑의 자산을 돌보는 집사라면 그 정도 유능한 게 맞기도 했다.

그래서 카셀은 가면 남녀가 연전연승을 이어간다는 소식에 그들이 이비와 그 집사일 수 있다고 더 강하게 의심했다.

혹시 저렇게 명성을 쌓아서 밤의 일족이 있는 곳까지 기어들어 올 생각인가 싶기도 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투기장의 주인이 먼저 움직였다.

그 가면 여자가 음식에 독이 들었다고 난리를 피웠다는 소식은 그쪽을 예의주시하던 카셀에게도 곧장 전해졌고, 카셀은 그 얘길 듣자마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비 아리아테는 탑의 비호를 받는다.

그런데 만약 이런 곳에서 변고가 생기면, 그래서 티엔다로 돌아가지 못하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다.

그건 티엔다비스의 큰 손실이며 카셀 몬트라의 완벽한 파멸이었다.

그래서 카셀은 앞뒤 잴 것 없이 그 가면 남녀를 내쫓기로 했다. 그게 이비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는 이상 일단은 보호해야 했다.


‘저 머저리 같은 놈이 겁도 없이 누굴…….’

카셀은 밑 대륙의 하급 귀족이 이비를 해치려 했다는 사실에 이를 갈았다.

밉살스럽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그 계집애는 티엔다의 일원이고, 특별히 가치 있는 인간이다.

이 시궁창에서 바글대는 무가치한 인간들과 다르게 말이다.

지난 사흘간 카셀은 두 가면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이 투기장의 환경도 세세히 살펴보았다.

얼굴 없는 유모의 등장으로 유례없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지만, 그 떠들썩한 축제 뒤에는 이 투기장에서 벌어지는 참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곳의 인간들은 교양과 지성은커녕 양심도 내팽개친 채 오로지 천박한 쾌락만 좇았다. 그리고 그걸로 돈을 벌고 있었다.

경기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쓰고 있지만 기실 그것은 도박이나 처형이라는 말에 더 가까웠다.

인간을 우리에 몰아넣고 싸우게 하니 개중 일부는 죽는 게 당연했고, 그건 사고나 비극이 아니라 구경꾼들이 주머니를 열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그렇게 죽는 자들이 하루에도 십수 명, 심하게 다치는 자들은 그 몇 배.

화려한 경기장 뒤엔 그늘 속에서 신음하는 자들이 가득했고, 그러다 죽으면 폐허의 구덩이에 버려졌다.

이곳은 그야말로 야만의 온상이었다.

아니, 차라리 야만이 더 나았다. 적어도 그곳에선 먹기 위해 사냥한다.

그러나 이곳에선 보기 위해 죽이고 그건 돈이 된다.

카셀은 처음 이 투기장을 보고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취급하나 경악했다.

하지만 곧 떠올렸다.

본디 밑 대륙이란 인간과 짐승, 그 사이의 미개한 존재가 살아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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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셀이 그걸 처음으로 배운 건 십수 년 전, 아직 소년일 때였다.


“원래 티엔다는 용들의 거처였습니다. 하지만 용들이 잠들며 비스를 다스리던 왕들이 티엔다로 올라오게 되었지요.”

아버지의 친우인 베르데 자작에게 가르침을 받던 시절, 카셀은 열세 살이었다.

그때도 역시 꾸미기를 좋아하는, 아주 세련된 도련님이었다.


“용들이 잠들기 전, 비스엔 네 개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몬트라는 비스 서쪽을 다스리던 왕가였습니다.”

베르데 자작은 교편으로 지도를 가리키다가, 학생이 너무 조용한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카셀 도련님, 제 이야기 듣고 계십니까?”

베르데 자작은 궁금해서가 아니라 지적하려고 물었다.

나른하게 턱을 괸 카셀은 앞에 세워 둔 지도가 아니라 엉뚱한 책을 보고 있었다. 그건 이 수업과 아무 관련이 없는 책이었다.

베르데 자작의 물음에 소년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해가 안 돼요.”

“그렇다고 귀한 시간에 딴짓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비스에 왜 왕국이 세워졌죠? 군주제는 원시적인 정치체제잖아요.”

예상치 못한 말에 베르데 자작은 의아한 눈으로 카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셀이 뺀질대는 얼굴로 되물었다.


“고대엔 인간이 평등하다는 합의가 있었다면서요. 그래서 신분제를 없애고 만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줬다는데, 비스에선 왜 다시 왕이 나왔나요? 고대 문명이 바다에 다 가라앉았어도 사상은 남아야 하잖아요.”

베르데 자작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진도는 다르지만 좋은 질문이군요.”

베르데 자작은 못 당하겠다는 듯 말하며 카셀이 보던 책을 확인했다.

노는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몬트라 후작가의 영특한 후계자는 벌써 고대 철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고대 막바지엔 만인이 평등하다는 게 주된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없는 나라가 대부분이었죠.”

“그런데요?”

“하지만 시대를 통틀어 인간은 단 한 번도 평등한 적이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가치대로 차등을 받았죠.”

카셀이 드디어 책에서 눈을 떼고 베르데 자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고대의 기준으로 논하자면, 왕가 역시 나라를 세울 정도로 우월한 자가 있기에 탄생했습니다. 그 왕가가 쇠한 것도 백성들이 지배받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영리해졌기 때문이죠. 이처럼 모든 것은 능력으로 좌우됩니다. 울타리를 치는 것도 인간이고 그 울타리를 부수는 것도 인간이죠.”

“그럼 왜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이 나왔죠?”

“그건 인간이 각자의 능력대로 어울리는 자리에 앉기를 바랐기 때문이죠. 왕족이나 귀족이라서 무능함에도 요직에 앉는 건 부당할 뿐만 아니라 만인에게 악영향을 끼치니까요.”

카셀이 흐음, 소리를 내며 스승의 말을 곱씹었다.

소년에게 소화할 시간을 주며 베르데 자작이 그의 첫 질문에도 찬찬히 답했다.


“그래서 맨몸으로 비스에 도달한 선조들은 받아들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우월한 자에게 의탁하는 것을 말입니다. 군주제는 무엇보다 강력하고, 왕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라 왕이 될 만한 자에게 복종하는 건 문제가 아니니까요.”

카셀은 베르데 자작의 관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고개를 주억이다 말했다.


“용들이 잠들지 않았으면 비스의 왕조들도 언젠가 몰락했겠네요.”

“글쎄요, 역사는 단지 반복되는 게 아니라 발전해나가는 법입니다. 비스의 왕가들 무능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혈통만으로는 권력을 지속할 수 없는 걸 고대의 역사를 통해 배웠으니 말입니다.”

결국 세상을 좌우하는 건 혈통이 아니라 능력.


“티엔다에 도달한 것도 그렇게 거르고 걸러진 자들뿐입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도 몬트라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쉬지 않고 정진하셔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대로 자신의 위치를 정한다.

그건 어디서 태어났든 마찬가지. 천하게 태어났어도 오를 수 있고 귀하게 태어났어도 추락할 수 있다.

티엔다비스에서 가장 부유한 몬트라의 후계자가 이토록 쉼 없이 공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카셀은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턱을 괸 채 불손하게 웃었다.


“티엔다에도 바보가 잔뜩 있는데, 그게 거른 거면 저 밑 대륙은 더 끔찍하겠네요.”

카셀은 영리한 만큼 건방진 소년이었다.

그래서 베르데 자작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하지만 카셀은 그 말이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지 않은 걸 보면, 아마 썩 와 닿는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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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셀은 이 축사의 인간들을 보며 베르데 자작에게 배운 걸 새삼 떠올렸다.

처음엔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취급하나 경악지만, 다시 살펴보니 그들에겐 동정이 과분했다.

인간은 제 능력대로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다.

이 시궁창으로 흘러들어온 자들 역시 그게 어울리는 자들이었다.

물론 무능하다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도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카셀이 티엔다비스의 재상으로서 배운 상식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이 투기장에 기어들어 온 자들은 단지 무능할 뿐 아니라 나태하고 탐욕스러운, 그래서 스스로를 진창에 처박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일확천금에 눈이 먼 바보들.

제대로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목숨을 판 머저리들.

허영만 가득해 기어이 함정에 빠진, 그러니까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들이었다.


‘본인이 선택했으니 본인이 책임져야지.’

무능하다고 다 이런 투기장에 들어와 도축되지 않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 그러니 각자가 감당할 몫이다.

이 믿음으로 카셀의 내내 불편하던 마음이 겨우 편해졌다.

하지만 그 평안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 꼬마.

철장 속에 앉은, 밤의 일족이라는 꼬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연한 얼굴을 가진 꼬마였다. 순한 눈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양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던.

그 녀석은?

철창에 갇힌 게 과연 자신의 책임인가?

그 자리가 과연 그 애한테 마땅한 자리였나?

카셀은 답할 수 없었다.

복도를 가로지르던 걸음을 뚝 멈췄다.

카셀은 폐허의 성 복도에 멈춰 선 채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느덧 먹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이 기울면 별이 가득 보여야 하는데, 그날은 하늘을 뒤덮은 구름 때문에 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그 흐린 하늘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마치 돌을 삼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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