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비 아리아테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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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이비 아리아테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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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이비 아리아테의 모순
2023.03.09.
“왜 그렇게 긴장해? 거기 독이라도 탔어?”
이비의 날 선 추궁에 가면 쓴 하녀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그 하녀에겐 가련한 분위기가 절절 흘렀다.
마른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떠는 모습이 마치 굶주린 개처럼 처량했다.
이비는 그 비루한 몰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녀의 옷을 잡아끌고 복도로 나갔다. 그러곤 그 하녀를 거칠게 패대기쳤다.
“너희 윗사람 불러와, 당장!”
이비가 하녀를 발치에 쓰러트린 채 복도에 있던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그 패악에 남작의 비서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게 무슨 소동입니까!”
“너, 내가 먹을 음식에 장난쳤지?”
“무슨 소립니까, 장난이라니요?”
“이 여자를 시켜서 뭘 탔잖아! 다 아니까 발뺌할 생각하지 마!”
이비가 고래고래 소리치자 복도의 문이 하나둘 열렸다. 이곳은 투기장의 방문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렇게 보는 눈이 많아지자 비서가 난감하다는 듯 이비를 달랬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비서는 당장 치받을 것처럼 성을 내는 이비와 주저앉은 하녀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러곤 방문을 닫자마자 정말 난감하다는 듯 되물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곳은 브릭 남작님께서 직접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런 저열한 짓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비서는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는 정말 결백해 보였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혹시 자기가 착각했는지 의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가면의 악녀는 녹록지 않았다.
“아니라고? 그럼 네가 한번 먹어봐.”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이건 브릭 남작님을 향한 모욕입니다.”
“어, 그렇게까지 할 거야. 너희 남작님이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면 네가 먹어서 증명해 봐. 왜, 못하겠어?”
이비의 집요한 요구에 비서가 한숨을 토했다. 그러더니 몹시 질린 눈으로 그 잔악한 여자를 으르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먹을 테니 아무 이상 없다면 정중히 사과하십시오.”
비서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는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고, 비서는 그 조롱을 감내하며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 섰다.
비서가 그중 가장 가까운 접시로 손을 뻗는데, 이비가 돌연 그 팔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웃음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네가 시켰구나?”
“또 무슨 억지를…….”
“아니면 개한테 먹여 보자고 했겠지.”
이비의 주장에 화를 내던 비서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아주 미약한 동요였지만 이비는 바로 눈치채고 냉소를 터트렸다.
“직접 먹겠다고 나서는 건 어디에 뭐가 들었는지 안다는 소리 아니야?”
“절대 아닙니다, 이건 당신이 몰아붙여서…….”
“몰아붙인다고 독이 있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어? 왜? 정말 독이 들었으면 어떡하려고? 나라면 독이 들었다고 의심하는 이유부터 확인할 것 같은데.”
“……그렇게 미덥지 않으면 직접 음식을 고르시죠. 그럼 되지 않습니까.”
이비가 따져 들자 비서도 단호히 항변했다.
그에 이비는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들었다.
“좋아. 그럼 이거 마셔 봐.”
이비가 크리스털 잔에 물을 따랐다. 그러더니 퍽 우아한 몸짓으로 그걸 비서에게 내밀었다.
비서는 정말 불쾌하다는 얼굴로 그 잔을 받았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옆에 선 하녀를 돌아보았다.
“마셔라.”
비서는 여전히 모함당한 얼굴로 하녀에게 잔을 넘겼다. 그래서 이비는 그만 폭소를 터트렸다.
“뭐 하는 거야, 네가 먹기로 했잖아.”
“생각이 짧았습니다. 음식이 옮겨지며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니, 음식을 나른 자에게 먹여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비서의 표정과 목소리는 여전히 점잖았다. 그래서 더 구차해 보였다.
이비는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그 꼴을 지켜봤고, 비서는 평정을 가장하며 속으로 격분했다.
‘젠장, 이 아둔한 게 그 쉬운 일을 못 해서!’
비서의 날 선 원망은 하녀를 향한 것이었다.
그는 저 마녀가 낌새를 차린 게 하녀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 머저리를 노려보며 약을 든 물을 떠넘겼다.
비서의 매서운 강요에 하녀는 덜덜 떨며 잔을 받았다.
“뭐 해? 마시라니까.”
비서가 윽박지르자 하녀는 결국 신음하며 가면을 벗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몹시 처연했다.
그는 고작해야 이비의 또래로 보였다. 사슴처럼 순한 눈망울은 예쁜 보랏빛이었고 두 뺨은 뚝뚝 흐르는 눈물로 온통 젖어 있었다.
하녀는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무서운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러더니 체념한 듯 잔을 입에 댔다.
“잠깐.”
그런데 잔이 기울기 전에 이비가 막아섰다.
이비는 그 하녀에게서 잔을 빼앗더니 비서를 향해 짓씹었다.
“이렇게 꼬리를 자르시겠다, 누굴 바보로 알아?”
“오햅니다. 고정하시죠.”
하지만 비서는 위축되지 않았다.
“기껏 큰 상금을 받으셨는데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면 좋을 게 없습니다.”
도리어 넌지시 이비를 압박했다. 이미 들통났어도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뜻이었다.
그 뻔뻔한 태도에 이비는 매몰차게 웃었다. 그러더니 제 가면을 살짝 들며 손에 든 잔을 쭉 들이켰다.
이비가 보란 듯이 그 물을 들이켜자 내리 침착하던 비서의 눈이 커졌다.
이비는 빈 잔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곤 발랄하게 말했다.
“그래, 속아 줄게. 대신 이 하녀는 나한테 넘겨.”
“거짓 자백을 시킬 생각이라면 소용없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증인이든 증거든 너희가 인정하겠어? 새삼스럽게.”
이비는 가소롭다는 듯 재차 웃었다. 그러더니 여상히 밝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오만한 것들, 발밑의 인간들이 우습지? 그런데 나는 앞에선 고고한 척하고 뒤에선 온갖 수작을 부리는 너희가 더 우스워. 아주 대단한 인간인 척하지만 그렇게 사기 치는 게 전부잖아.”
“말이 심하십니다.”
“심한 건 남의 목숨으로 장사하는 너희들이지. 그런 주제에 무를 숭상하니 투사를 대우하니 정말 웃기지도 않아. 그렇게 싸움이 좋으면 너희가 직접 싸워, 비열하게 이기는 내기만 하지 말고.”
이비의 독설에 비서는 말문이 막힌 듯 미간만 좁혔다.
“뭐, 이기는 내기만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제 됐어, 말마따나 큰 상금을 받았으니 넘어가 줄게. 대신 이건 놓고 가. 화풀이라도 해야겠으니까.”
이비가 그 꼴을 비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대단한 선처를 받았지만, 비서는 선뜻 돌아서지 못했다.
이대로 저 하녀를 넘길 순 없었다. 저 애가 쓸데없이 입을 놀릴 수도 있고, 약병을 아직 들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비서가 머뭇대자 이비가 버럭 소리쳤다.
“안 들려? 내가 이 여자애 하나로 넘어가 준다잖아! 성질 돋우지 말고 당장 꺼져!”
그 매서운 일갈에 비서는 결국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그러곤 이 사납고 악랄한 여자를 피해 떠났다.
남작의 비서가 떠나자, 그 방엔 벌벌 떠는 하녀만 남았다.
하녀는 여전히 숨죽여 울고 있었다. 조심히 이비를 힐끗대는 그 눈은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비가 하녀에게 냉랭히 물었다.
“너 몇 살이야?”
스무 살. 하녀가 손짓으로 대답했다.
“가족은?”
하녀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없어? 알아내는 거 금방이야.”
되물어도 마찬가지였다.
하녀가 결백을 주장하듯 고개를 흔들자, 이비는 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원래 자신이 쓰던 방을 가리켰다.
“저 방으로 들어가. 난 피곤하니까 내일까지 얌전히 있어. 허튼 생각하지 말고.”
하녀는 잔뜩 주눅이 들어 고개만 끄덕였다.
하녀가 방에 들어가고, 이비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쭉 지켜보던 디에스가 가면을 벗으며 물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죽은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그다음엔?”
“다음은 본인이 알아서 해야죠. 여비만 주고 보낼 거예요.”
이비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디에스는 한숨 쉬듯 웃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비다워서.
이런 일에 이용된 하녀들의 최후는 뻔하고, 그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찬가지다.
잘 구슬려서 입단속을 시키기보다는 조용히 제거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고 안전하니까.
더욱이 사람이 죽는 게 당연한 이곳에서 하녀 한 명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도 티도 안 날 거다.
이건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이비는 못 본 척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이비다워서 디에스는 농담처럼 중얼댔다.
“기왕 도와줄 거면 좀 친절하게 도와주지.”
“쟤가 뒤통수치면 어떡해요.”
“모순덩어리네요.”
이비의 뾰족한 대답에 디에스는 다시 제대로 웃었다.
몇 겹의 가식과 몇 겹의 허세로 속내를 감춘 이비는 사실 이런 녀석이다.
지독한 인간 불신 주제에 인간을 외면하지 못한다.
악마처럼 목숨을 훔칠 수 있지만 무서워서 참는다.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큰 가능성을 가졌고, 누구보다 높이 비상할 수 있지만 혼자 날지는 않는다.
이처럼 이비는 온갖 모순의 산물이었고, 그래서 디에스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비를 선택한 것도, 제 전부를 바친 것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비가 투덜댔다.
“나도 사람인데 이 정도 흠은 있어야죠. 안 그러면 너무 완벽하잖아요.”
“어련하시겠어요.”
디에스는 이비의 자만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내일이면 유비아가 올 텐데, 저 하녀는 그 전에 틈을 봐서 내보내야겠네요.”
“아…….”
그런데 내리 뻔뻔하고 당당하던 이비가 돌연 고장 났다.
유비아가 온다고 한 것뿐인데 이비는 난감한 일을 마주한 사람처럼 굳어 버렸고, 디에스는 그 모습을 수상하게 여기다가 나직이 물었다.
“……왜 그래?”
“같이 오는 백작 때문에 긴장돼서요.”
“백작이 같이 오는데 네가 왜 긴장해.”
집사의 온화한 얼굴이 삽시에 굳었다.
옆방에 이름 모를 하녀가 있어서 차마 큰 소리를 내진 못 했지만, 이후 두 사람은 정말 쓸데없는 문제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기 시작했다.
디에스는 이비의 모순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백작 놈에 대한 것은 역시 용납할 수 없었다.
***
그 시각, 브릭 남작의 비서는 제 발치에서 구르는 잉크병을 보고 있었다.
“이 머저리 같은……!”
잉크병을 집어던져 사방에 얼룩을 만든 브릭 남작은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책상을 거칠게 내리쳤다.
“똑바로 처리하라고 했더니, 그걸 들키기까지 해?!”
남작의 호통에 비서는 잉크를 시커멓게 뒤집어쓴 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가 갈리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 하녀 때문이다. 손이 빠르고 침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골랐는데 일을 그렇게 망칠 줄이야.
“내일 날 밝자마자 찾아가서 비위를 맞춰 놔라. 만약 놈들이 내일 떠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남작의 으름에 비서는 허리를 깊게 숙인 후 돌아섰다.
그리고 남작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밤의 일족에게 먹이로 주는 것뿐이다.’
지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약도 안 든다면,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다만 놈들을 유인할 방법이 문제다.
밤의 일족을 풀어 놓을 수 있는 소금 궁전은 이 성의 가장 안쪽, 그것도 몇 겹의 잠금 문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깊숙한 곳까지 그들이 과연 들어올까? 듣자 하니 여자 쪽도 보통이 아니던데, 오늘 일로 이쪽을 잔뜩 경계하고 있을 거다.
브릭 남작이 시종들을 윽박지르며 묘안을 찾을 때였다.
“남작님.”
“뭐야!”
“검은 가면의 성주님이 오셨습니다.”
검은 가면이라는 말에 남작은 화를 뚝 그쳤다.
검은 가면은 티엔다에서 오신 게 분명한 귀한 손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지만 남작은 하는 수 없이 그 성주님을 맞이했다.
그리고 여태 시종을 시켜 말을 하던 성주가 어쩐 일로 직접 목소리 내서 말했다.
“그 가면 쓴 두 사람, 당장 내보내.”
“예?”
“포상금을 대신 내줄 테니까 쫓아내라고.”
그믐까지 앞으로 사흘. 카셀은 모든 위험 요소를 직접 제거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