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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이비 아리아테의 반역 (76/129)


76화. 이비 아리아테의 반역
2023.02.20.



“자, 생각해 보자고요.”

이비가 손뼉을 치며 활기차게 운을 뗐다.


“지금까진 왜 없었을까요? 밤의 일족을 가둬 놓고 장사하는 투기장이.”

금화 창고를 새로 지어야 할 만큼 대단한 노다지라는데.


“저주를 구경하고 싶어 하는 건 귀족이나 부자들뿐이니까, 잘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잖아요.”

역시 어려운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재앙도 능수능란하게 피한다.

티엔다의 귀족들은 그믐의 저주와 아예 연이 없고, 비스의 부호들은 값비싼 소금으로 자신을 철저히 지킨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들은 위험한 저주를 구경하려고 돈을 쓴다. 인간의 천적인 용의 저주를 안전하게 관람하려고 말이다.


“이 좋은 시도를 왜 브릭 자작 전에는 안 했을까요?”

“안 한 게 아니라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죠.”

“아뇨, 못 했을 거예요.”

디에스의 반론에 이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전까진 밤의 일족을 가둘 여력이 없었거든요. 선대 몬트라 후작은 마냐냐의 소금을 지역별로 고르게 분배했으니까요.”

이비의 주장에 디에스도 무언가 알아챈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카셀 몬트라가 후작위를 이으면서 선친의 방법을 조금씩 바꿨죠.”

“맞아요, 그 사람이 후작이 된 게 3년 전이고,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고 칭찬받기 시작한 게 그다음 해예요.”

이비가 알기로 카셀 몬트라를 칭송하는 이유 중엔 정화의 소금도 있었다.

그는 상당한 꼼수로 소금 분배 규정을 교묘히 우회했고 그걸로 탑에 큰 수익을 돌려주었었다.


“혹시 지난 2년 동안 브릭 자작이 소금을 얼마나 사들였는지 알 수 있어요?”

“이미 알아봤습니다. 2년 전부터 구매량이 크게 늘긴 했습니다.”

“역시.”

“그에 반해 자작령 내의 주민들에게 재판매된 소금의 양은 오히려 2년 전보다 줄었고요.”

“후후후…….”

계산이 맞아떨어지자 이비가 다시 음침하게 웃었다.


“밖에선 그렇게 웃지 마세요.”

“물론이죠.”

디에스가 그 흉흉함을 보다 못해 말리자 이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산뜻하게 끄덕였다.


“곧 그믐이죠.”

지난 그믐의 악몽이 아직 선한데 또다시 그믐이 돌아왔다.

이제 일주일 후면 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벌써부터 몸을 사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냐냐의 가호를 독점한 그 투기장은 이제 슬슬 축제 분위기를 내고 있을 것이다. 그믐이 가까워지면 밤의 일족은 더 강해지고, 더 화려한 저주를 선보일 수 있을 테니까.

쉽다는 건 이렇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 삶을 빼앗기고 그게 당연한 줄 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카셀 몬트라 때문.


“몬트라 후작이 투기장의 존재를 알고도 소금을 몰아준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비는 못되게 웃으며 카셀의 반반한 낯짝을 잠시 떠올렸다.


“그건 아무렴 상관없죠. 소금 분배의 균형이 깨진 건 전적으로 그 자식 때문이고, 덕분에 소금을 독차지한 비스의 영주가 밤의 일족으로 장사를 한 거니까요.”

“투기장에 갇힌 밤의 일족 중 수배된 자가 있으면 그것도 큰 문제고요.”

“맞아요. 그 정도면 역모예요, 역모. 게다가 그것 때문에 인근 마을에 저주가 들끓었으니, 바옌 공작이 알면 아주 좋아하겠네요.”

태만한 조카를 두드려 패고 비스의 영주들을 찍어 누를 빌미가 생기니 좋을 수밖에.


“바옌 공작이 자기 측근들을 보내 주기로 했어요.”

“밤의 일족이 투기장에 나오는 건 그믐 이틀 전부터 그믐날까지 단 사흘뿐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믐 다음날 그 투기장으로 오라고 할게요. 우린 그전까지 뱀을 빼돌리고 바옌 공작 쪽에는 다른 밤의 일족과 거기 쌓인 소금을 넘겨주면 돼요.”

이비가 이렇게 약속을 지키면, 바옌 공작도 마땅히 지켜 줄 것이다. 관련자를 끝까지 문책하겠다는 약속을.


“그런데 그걸로 후작을 정리할 수 있을까요? 라우렐이나 세드로면 몰라도 바옌과 몬트라의 세는 거의 대등합니다.”

“그러니까 약점을 쥐여 줘야죠. 바옌 공작이 비판하는 게 몬트라의 명백한 잘못이면 몬트라도 가문 차원에서 움직일 거예요.”

티엔다비스의 재상 가문이라 불리는 대 몬트라다.

그 위대한 가문은 명예가 실추될 위기에 처하면 설령 가주라도 가혹하게 탄압할 것이다.


“몬트라의 원로들이 카셀 몬트라를 끌어내리면 정말 좋겠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고, 그 자식이 한동안 공식 석상에 얼굴을 못 내미는 걸로 만족하려고요.”

성녀 발탁식을 포함해서 말이다.

급한 불은 일단 이렇게 끄고, 약속을 천천히 지켜야지. 완전 망할 때까지 혼내 주기로 했으니까.


‘천천히 무너트려 주마, 후후후.’

이비는 낮게 웃으며 그 후작 놈이 지금쯤 어쩌고 있을지 떠올려 보았다.

아마 카셀은 제 안락한 저택에서 이비의 집을 태워 버린 것에 만족하며 ‘괜찮아, 이제 증거 같은 건 없어’ 따위의 자위를 하고 있을 거다.

그대로 안일하게 죽어라, 이 집돼지.

이비는 늘 어려워하던 그놈을 끌어내릴 생각에 조금 들떴다.

***

이비는 카셀이 티엔다의 저택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뜻밖에도 카셀은 티엔다가 아니라 비스에서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제기랄! 길이 왜 이 모양이야!”

“죄송합니다, 폐허에 들어서서 길이 영 좋지 않습니다.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카셀이 마차의 흔들림에 격분하자 그의 시종이 쩔쩔매며 달랬다. 하지만 카셀은 폐허라는 말에 오만상을 더 찌푸렸다.

남부의 폐허라니, 이 너저분한 곳까지 직접 오게 된 카셀은 심기가 더없이 불편했다.

남부는 밑 대륙에서도 가장 하잘것없는 지역이다.

서부엔 아름다운 경관이 있고 북부엔 고대의 유적이 있다. 하다못해 아마네세르가 잠든 동부에도 타르데스 전당이 있다.

그러나 남부는 절반이 폐허고 그 절반이 촌구석, 그리고 나머지는 빈민이 넘쳐나는 도시뿐인 최하급 지역이다.

원래 남부는 땅이 비옥한 곡창지대였지만, 40년 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 지진은 타르데스 전당에서 미처 깨트리지 못한 태풍이 비스의 밑면을 후려치며 일어났다.

허망한 비극으로 남부는 영토의 2할이 바다로 떨어져 소실되었고, 산과 계곡의 모양이 변했다. 인간이 세운 성도 당연히 가루가 되었다.

그걸 재건하지 못해 방치한 것이 바로 남부의 폐허다.

이 나태하고 무능한 소굴까지 끌려온 카셀은 다시 분통을 터트렸다.

사실 그는 밑 대륙에 내려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가 이렇게 직접 움직인 건 순전히 미엘 세드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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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전, 이때만 해도 이비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아리아테의 저택이 다 탔어.”

“집만 탔어?”

“어, 한낮이라 다들 바로 대피했고, 서재와 침실 쪽부터 불을 대서 아무것도 못 챙겼어.”

“알겠어. 그만 가 봐.”

카셀은 자신을 위해 방화를 저지른 친구를 서둘러 돌려보냈다.

그러곤 안락의자에 등을 파묻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괜찮아, 이제 증거도 없어.’

그 요망한 게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금을 가지고 장난을 치진 못할 거다.

카셀은 이렇게 생각하며 이비에 대한 불안을 그만 덮으려 했다.

그런데 마냐냐 탑의 작은 세드로가 찾아와 그를 대뜸 들쑤셨다.


“있지, 이비네 집사가 비스에서 뭘 하는 것 같아. 그게 뭔지 후작이 직접 확인해 주면 좋겠어.”

탑주와 꼭 닮은 소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카셀은 다소 얼떨떨했지만, 그 어려운 손님을 거역할 수 없어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러자 미엘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장미처럼 화려하고 인형처럼 어여쁜 소녀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더니, 테이블에 놓인 티팟을 손수 들었다.

카셀은 미엘의 찻잔이 비었나 싶어 황급히 눈을 굴렸지만 그 단아한 찻잔엔 훈기가 오르는 홍차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사이 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의 무릎에 사뿐히 앉았다.


“세, 세드로 님?”

당황한 카셀이 고양이처럼 무릎에 올라온 미엘을 내려다보았다.

미엘은 곱게 눈웃음을 짓더니 카셀의 머리 위에서 티팟을 기울였다.


“윽……!”

꽃 문양이 아로새겨진 도자기 주전자에서 뜨거운 차가 조르륵 흘러 카셀의 정수리를 적셨다. 살갗을 익히는 열기가 이마와 목덜미까지 적셨지만 카셀은 무릎에 앉은 미엘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말을 두 번 하게 해. 직접 확인하라고 했잖아.”

찻물이 다 쏟아져 티팟이 텅 비자 미엘은 그걸 카셀의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놓았다.


“미엘이 특별히 알려 준 거니까 잘해. 바보처럼 굴면 죽여버릴 거야.”

카셀은 얼굴을 뒤덮는 열기와 귀를 간지럽히는 속삭임에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탑의 후계자라도 몬트라의 주인에게 이럴 수는 없다.

악에 받친 카셀은 티팟이 깨지든 말든 젖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곤 험악한 눈으로 그 철없는 계집애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의 서슬은 미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참히 꺾여 버렸다.

미엘 세드로의 눈동자는 최상급 에메랄드처럼 찬란한 녹빛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름답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건 단지 섬뜩하고 살벌하며 어딘지 기괴하기까지 했다.


 
카셀은 숨을 멈춘 채 그 밝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미엘이 다시 사르르 웃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숨을 헐떡이며 황급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응, 대들지 마.”

그런 카셀을 비웃듯 미엘이 키득댔다.


“미엘이 봐주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으니까, 후작은 조심해야 돼. 알았지?”

미엘의 충고에 카셀은 수치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목이 졸리는 압박에 그는 뒤늦게 떠올렸다. 탑주인 로히카 세드로와 처음 대면했을 때의 충격을. 그 위엄과 권위에 스스로 무릎 꿇던 순간을.

카셀은 지금까지 그게 로히카 세드로만의 후광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작은 세드로는 큰 세드로 못지않은 괴물이었다.

세드로 자체가 선천적인 지배자였고, 이 평범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그 앞에서 조아리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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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엘의 눈동자를 떠올린 카셀은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다시 신경질을 부렸다.


‘젠장, 내가 왜 이런 꼴을……!’

이비 아리아테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도착했습니다, 후작님.”

“입을 그따위로 놀릴 거면 차라리 닥쳐!”

“죄, 죄송합니다. 성주님.”

카셀의 윽박에 시종은 황급히 호칭을 바꿨다.

원래 카셀은 능구렁이 같은 매력을 가진 신사였다. 하지만 비스에서 그는 계속 조급한 애송이처럼 굴었다.

곧 그믐이다. 하필 이런 시기에 비스로 온 된 카셀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른 명의 호위가 마차를 뒤따르고 백 명의 호위가 투기장에서 이미 대기 중이지만, 정화의 소금도 필요 이상으로 챙겼지만, 그는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초조함을 억지로 삼키는 그에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제 가면을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후작이 아니라 성주라 불리기로 한 카셀은 두 눈과 한쪽 뺨을 가리는 비대칭 가면을 얼굴에 썼다. 그러곤 마차 밖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근엄한 태도는 투기장을 둘러보기도 전에 와장창 깨졌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원추리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를 본 탓이었다.

카셀은 저 멀리 보이는 여자 때문에 질겁했다가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기 드문 머리 색이라 세드로인 줄 알고 어깨를 떨었는데, 잘 보니 그 여자는 로히카라기엔 가녀리고 미엘이라기엔 성숙했다.

저쪽도 가면을 쓴 탓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키만 봐도 그 끔찍한 제왕들은 분명 아니었다.

주황색만 봐도 이렇게 경기를 일으키는 신세라니.

카셀은 진저리를 내며 그 여자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카셀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던 그 주황색 머리의 여자가 자신의 파트너에게 속삭였다.


“저거 카셀 몬트라 아니에요?”

그 여자, 이비에겐 쓸데없이 묘한 특징이 있었다.

외나무다리만 가면 원수를 만나는, 참으로 공교로운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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