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이비 아리아테의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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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이비 아리아테의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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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이비 아리아테의 가능
2023.02.16.
“나는 남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기, 티엔다에 사는 사람들처럼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아이는 초라했다.
“두고 봐요, 나는 언젠가 저 위로 갈 거예요. 나는 저기서, 엄청나게 어려운 사람이 될 거예요!”
그러나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 앉은 점성술사는 그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찬란함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점성술사는 그 아이의 운명을 되뇌며 옅게 웃었다.
“사람이 꼭 어려워야 할까?”
“그럼요?”
“어렵지 않게 행복하게 사는 건 어때?”
“어렵지 않은데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요?”
어린 이비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점성술사가 그 순진하고도 맹랑한 아이에게 되물었다.
“네가 말하는 어려운 사람은 강한 사람을 말하는 거야?”
“아뇨, 달라요. 강한 사람이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려운 사람은 역경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에요.”
이비는 고개를 저으며 냉큼 대답했다.
“강한 사람이 어려워질 가능성은 높죠. 하지만 강하다고 늘 어려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에요. 깡패들은 강하지만 쉽잖아요. 귀족 애들은 약하지만 어렵고요. 그런 거예요.”
이비의 주장에 점성술사가 손으로 턱을 짚었다. 그래서 이비는 성실히 부연했다.
“쉬운 사람은 온갖 시비에 걸리지만 어려운 사람은 다들 알아서 피하고 조심해요. 힘들고 더러운 일도 쉬운 사람만 물고 늘어지지, 어려운 사람에겐 얼씬도 안 해요. 아무리 강한 사람도 역경을 항상 이길 수는 없어요. 만약 이기더라도 고생한 만큼 다칠 거예요. 그러다 보면 결국 약하고 쉬운 사람이 되겠죠. 그러니까 애당초 역경이 피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글도 다 깨치지 못한 열두 살 아이의 주장은 예리하고 통렬했다. 그래서 점성술사는 어쩔 수 없이 슬퍼졌다.
“하지만 어렵다는 건 상대적인 거야.”
“그렇죠.”
“지금보다 어려운 사람이 되어도 세상 어딘가엔 그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을 거야.”
“맞아요. 그럼 난 또 쉬운 사람이 되겠죠.”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더 어려워질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될 때까지요.”
세상 풍파에 단련된 어린이는 의연히 대답했다.
점성술사는 후드의 그늘에 감춘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다 나직이 중얼댔다.
“내 친구였어.”
“뭐가요?”
“네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
“뻥 치시네.”
“진짜야.”
“그런 사람하고 친구인데 아저씨는 왜 여기서 거지꼴로 동냥질이에요?”
“거지꼴까지는…… 아니지 않아?”
점성술사가 충격받은 투로 되물었다. 이비는 그 앞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주었고, 점성술사는 조금 억울한 듯 주장했다.
“정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어. 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티엔다의 모든 게 움직였으니까.”
이비는 영 미덥지 않다는 눈으로 점성술사를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흥미진진한 듯 이어질 말을 기대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말은 꽤 맥 빠졌다.
“그런데 그 사람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어.”
“왜요?”
“글쎄, 왤까?”
이비는 음, 하고 고민하다 당차게 대꾸했다.
“어려워 본 적이 없어서 어려운 분들의 고충은 잘 모르겠네요. 내가 충분히 어려워지면 그때 가르쳐 줄게요.”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점성술사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을 가린 남자가 온화하게 웃자 이비는 멈칫 놀랐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저씨는 안 비웃네요.”
“비웃어야 돼?”
“웃기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게 이런 말 하는 거. 허풍 떤다고 생각 안 해요?”
잔뜩 허세를 부리던 주제에 상대가 순순히 받아 주니 도리어 꿍시렁대기 시작했다.
점성술사는 그 까다롭고 새침한 아이가 또다시 슬퍼 나직이 속삭였다.
“생각 안 해. 너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까.”
결국 이비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비는 얼굴이 상기된 걸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건방을 떠는 행동과 달리 이비의 여린 가슴은 난생처음 받아 본 인정이 벅차 바쁘게 뛰고 있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솔직하고도 수모를 겪지 않은 건, 사실 그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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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달콤하고 아릿한 기억을 마음 어딘가에 새긴 지도 어언 8년, 이비는 그의 말을 새삼 곱씹고 있었다.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라니, 당신은 대체 뭘 알고 그런 말을 한 걸까?
당신이 정말 다른 시간의 사람이라면, 당신의 말처럼 언젠가의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해내고 있을까?
그게 발버둥 쳐서 해낸다는 말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는 사람보다는 역경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나으니까.
이비는 이렇게 생각하며, 제 앞에 도래한 새로운 역경과 마주했다.
“나는 역시 이거.”
“진심이에요?”
“완벽히 진심이죠.”
이비는 결연히 말하며 그 새빨간 드레스를 몸에 대 보았다.
티엔다의 숙녀들이 입는 여러 겹의 거창한 드레스와 달리, 그 시뻘건 천 조각은 옷인지 양말인지 헷갈릴 만큼 얇고 간소했다.
만약 입으면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건 물론이고 깊게 파이고 길게 트인 부분으로 맨 살결이 다 보이게 생긴, 옷의 기본 역할을 못 하는 부적절한 피륙이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그 노골적인 빨강을 피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릇된 판단입니다.”
“왜요?”
“활동성과 방어력이 지나치게 떨어집니다.”
“드레스에 왜 활동성과 방어력을 기대하는 건데요?”
이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항변했지만 디에스는 완고했다.
이비는 투덜대며 방에 전시된 드레스 중 또 하나를 골랐다.
이번엔 검은 드레스였다. 언뜻 보기엔 멀쩡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것도 상의 앞면이 목에서 배까지 길게 갈라진 파렴치한 물건이었다.
“꼭 이래야 하나요.”
“집사, 나는요, 옷차림에 대한 지나친 간섭 역시 억압이라고 생각해요.”
“분위기 잡지 마세요.”
“생각해 봐요. 나는 지금까지 성녀 후보랍시고 유아적인 옷만 입었잖아요. 리본에 프릴에 꽃장식에.”
“기껏 골라서 입혔더니…….”
“내가 미엘 세드로 같은 꼬맹이도 아니고, 나는 더 큰 세계로 갈 자격이 있어요.”
“가려면 양지로 가세요, 그런 어두운 길 말고.”
집사의 간곡한 만류에도 이비는 콧방귀를 탕탕 터트렸다.
티엔다 사교계에 나온 이후, 이비는 늘 청초하거나 귀여운 옷만 입었다. 하지만 그건 이비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사실 이비는 도전적인 걸 좋아했고, 그래서 이 희소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뭐야?”
이비가 일탈을 꿈꾸며 노출을 우기는데, 뒤늦게 일어나 거실로 나온 유비아가 그들의 실랑이를 보고 물었다. 늘 깨끗하던 이층집의 거실엔 싸구려 드레스와 가발, 가면 따위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위장용 소품이야.”
“위장?”
눈을 비비던 소년에게 이비가 검은 드레스를 내보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유비아의 덜 깬 눈이 곧장 동그래졌다.
“성녀 후보가 투기장 같은 델 들락거리면 곤란하잖아.”
“험한 일은 디에스한테 떠넘길 거 아니었어?”
“원래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니…….”
유비아의 반박할 수 없는 지적에 이비가 솔직히 꿍얼댔다. 그러곤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디에스를 외면한 채 덧붙였다.
“뱀을 잡는 건 디에스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상황이 좀 변했어.”
이비가 옷걸이에 걸린 가발 하나를 골라 쓰며 말했다.
“그 투기장에 다른 볼일이 생겼거든.”
하필 이비가 고른 건 탑주의 머리 색을 닮은 가발이었다. 그래서 집사는 이비의 끝없는 악취미에 나직이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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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가 투기장에 직접 가기로 결정한 건 드레스를 펼쳐 놓고 고르기 이틀 전이었다.
“뱀이 숨어 있는 투기장은 남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입니다. 그리고 투기장의 주인은 이 근방을 다스리는 브릭 자작의 매부더군요.”
“그 조사단장이 왜 일을 얼버무렸는지 알겠네요.”
“투기장을 운영하는 게 그리 고상한 일은 아니니까요. 밤의 일족을 숨기고 있다면 더더욱.”
디에스의 말에 이비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그믐, 이 마을을 조사하러 온 바옌 군의 조사단장은 자신을 어쩌고 브릭이라고 당당히 소개했다.
그러면서 저주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문제를 덮는 데만 급급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문제의 투기장이 브릭 가문의 소유였다.
“이 지역의 저주가 심해진 게 자기네 투기장 때문인 것도 아는 모양이죠?”
“알 수밖에요. 밤의 일족으로 장사할 정도면 그 정도 특성은 파악하고 있겠죠.”
“장사는 잘된대요?”
“근래 브릭 자작의 성에 창고를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창고?”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금화가 쌓여 있는 창고라네요.”
디에스의 담담한 대꾸에 이비는 질린 얼굴로 웃었다.
투기장이란 한탕 크게 하려는 자들과 벼랑 끝까지 내몰린 자들이 뒤엉켜 싸우는 곳, 오직 돈을 위해 무의미한 혈투를 벌이고 어마어마한 금화를 덧없이 굴리는 곳이다.
이비도 어린 시절에 본 적이 있다. 투기장에서 용병으로 뛰다가 팔다리를 잃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자들을.
그들은 차라리 운이 좋은 편이라고 들었다.
환호성 속에서 절명한 자들과 달리 어쨌든 목숨은 건졌고, 팔다리가 없는 자들만 모아 놓은 투기장으로 다시 흘러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끔찍한 곳이지만 돈이 되는 까닭에 비스의 투기장은 무너지지도 망하지도 않고 쉼 없이 잘도 돌아간다.
“뱀이 투기장에 숨기만 했다면 별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투기장에 속해 있다면 그 뱀을 건드리는 건 브릭의 돈줄에 손을 대는 게 됩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테니 철저히 지키겠네요. 투기장은 어디에요?”
“남부의 폐허 끝에 있습니다. 대지진 때 무너진 성을 정리해서 쓰는 중인데, 성의 구조는 파악해 뒀습니다.”
전직 사냥개의 부지런함에 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덧붙였다.
“아무리 투기장이라지만 참 으슥한 곳에 자리 잡았네요.”
비스에서 투기장 운영은 허락된 불법이다.
십수 년 전, 바옌 군은 사람이 공연하게 죽어 나가는 투기장을 치안 관리 차원에서 엄중히 금했다.
하지만 투기장의 주인뿐만 아니라 투기장에서 싸우는 용병들까지 합세해 거세게 반발했다. 남의 목숨이 아니라 내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그걸 왜 막냐는 거였다.
결국 바옌 군은 그 골치 아픈 부나방들을 외면했고, 그로써 비스의 투기장은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 도시 안에서도 빈번히 운영되었다.
그러니 그 폐허 끝에서 장사하려면 브릭 가문의 투기장은 아주 특별한 매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외진 곳에서 잘되는 이유는 역시 밤의 일족 때문이겠죠?”
“그렇긴 한데 전후 관계가 바뀌었습니다. 밤의 일족 때문에 그 외진 곳을 선택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그 투기장이 세워진 건 언제예요?”
“1년이 채 안 됐습니다. 그런데도 대단히 성행 중이죠.”
“음…….”
디에스의 말에 이비가 다시 허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으음…….”
그렇게 무언가 혼자 궁리하더니, 이내 그늘이 드리운 눈으로 음산하게 웃기 시작했다.
“훗, 후후후…….”
“……혼자 웃지 말고 말을 하세요.”
“엮어서 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뭘요?”
“집돼지.”
이비는 자신의 대답에 더 짙게 웃었다. 그러곤 저주에게도 집돼지라 불리는 남자의 이름을 상쾌하게 읊조렸다.
“카셀 몬트라요.”
대귀족의 운명을 가늠하던 이비의 눈이 확신으로 반짝였다.
점성술사의 말이 맞았다.
비록 끝도 없이 몸부림쳐야 하지만, 이비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