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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혼자는 싫단 말이야! (74/129)


74화. 혼자는 싫단 말이야!
2023.02.13.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유비아의 침착한 목소리에 이비는 도리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서워하지 말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실제로 무서운 존재뿐이다.

게다가 유비아는 알고 보니 무서워할 이유가 가득한 녀석이었다.

로히카가 죽이고 싶어 했던, 사냥개 열 마리로도 어쩌지 못한, 밤의 일족.

귀여운 모습 뒤에 숨긴 유비아의 실체는 이토록 극악했고, 그 사실이 이비의 심장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그러나 이비는 아닌 척 시치미부터 뗐다.


“무서워? 뭐가?”

“나.”

“네가 왜 무서워?”

“안 무서워?”

“무서워…….”

하지만 기껏 지른 허세는 한마디 물음에 와르르 무너졌고, 이비는 무서웠던 것 이상으로 창피해졌다.


“거짓말은 좋지 않아.”

어린 소년의 책망이 이비를 더더욱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비는 얼굴과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지긋지긋한 저주. 나한테 저주를 건 인간은 내가 굴욕을 견디다 못해 자결하길 바란 걸지도 몰라.

이비가 힘겹게 수치를 삼키는데, 유비아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무서워할 거 없어. 나는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맥락 없는 감사 인사에 이비가 아직 붉은 얼굴로 유비아를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유비아는 여전히 앞만 보고 걸었다.

슬슬 점심시간이다. 유비아는 디에스가 식사 때에 늦지 말고 돌아오라고 했다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렇게 식탁과 밥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며 녀석이 말을 이었다.


“디에스는 나를 죽이러 왔었어. 죽일 작정이었고 죽일 수도 있었어. 그런데 안 그랬어. 너 때문에.”

“나 때문에?”

“응, 너 때문에.”

앞을 보며 걷던 유비아가 그제야 비로소 이비를 돌아봤다.

눈부신 백발에 정신이 팔려 여태 몰랐는데, 유비아의 눈동자는 이비처럼 깊은 검은색이었다.


“원래는 망설이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네가 있어서 나를 해치지 못했어.”

유비아가 밤하늘 같은 눈으로 이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유비아의 목소리는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라 불변의 진리를 말하듯 단조로웠다.

하지만 이비는 선뜻 수긍하지 않았다. 디에스에게 이런 이야기를 따로 들은 적도 없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생명은 연결이니까. 살아 있는 건 이어받고 이어지고 흘려보내니까.”

이비가 근거를 묻자 유비아는 언젠가 했던 모호한 말을 반복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이어져 있어. 씨앗이 피워 낸 꽃에는 햇살과 이슬뿐만 아니라 흙이 된 누군가도 녹아 있어. 사람도 마찬가지야. 모습도 마음도, 갈림길에서의 선택도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그건 이전에 만난 누군가에게서 이어받은 거야.”

앗, 네 그렇군요.

이비는 이렇게 빈정대고 싶은 걸 참았다. 유비아가 아직 무서운 탓이었다.


“너희가 주고받는 건 다정할 수도 있고 잔혹할 수도 있어. 그리고 받는 사람은 그걸 선택할 수 없어. 그건 오직 보내는 사람의 결정이야. 너희는 그 굴레 속에서 하루하루 새로운 자신이 되는 거야.”

유비아의 말은 여전히 난해했다. 하지만 이비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비가 어려운 사람이 되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니까.

유비아의 말처럼 살아 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연결된다.

같은 세계를 공유한다는 이유로 선이든 악이든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영향을 끼친다.

이건 낭만적이면서 가혹한 이야기. 그리고 이비는 이것이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이어받고 이어지는 세상이라지만, 그 안에는 천 갈래의 길이 있다. 고귀함이 흐르는 길이 따로 있고 천박함만 쌓여 있는 길도 따로 있다.

어려운 사람은 고귀한 길을 유유히 지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쉽고 만만한 사람은 천한 길에 갇혀 구역질 나는 것만 떠안게 된다. 가볍게는 멸시를, 적당하게는 배척을, 무겁게는 학대나 착취나 지배 같은 것을 말이다.

생명이 연결이라면, 연약한 자에겐 그마저도 저주일 것이다.

이비가 이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웃는데, 유비아가 이비의 생각을 본 것처럼 말했다.


“다행히 너는 디에스에게 다정했어. 그럴 수 없는 장소고 그러기 싫은 상대였는데도. 디에스는 너에게 그걸 배웠고, 그래서 내게도 다정해진 거야.”

“디에스가 그렇게 얘기했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단언해?”

“이건 내 말이 맞으니까.”

토끼 녀석이 밑도 끝도 없이 우겼다. 그래서 이비는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내가 다정해서 다른 사람도 다정해졌다니, 이비는 이렇게 낙관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할 리가…….”

“물론 만만하지 않아. 그래서 다행인 거야. 네게 그리움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는 것도, 네가 그걸 배운 것도, 그런 네가 디에스를 만난 것도, 그래서 내가 세상과 연결된 것도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유비아는 굴하지 않고 연신 다행이라 말했고 이비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며칠 전, 자신이 백작에게 했던 말이 고스란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저씨를 만난 건 나한테 가장 다행인 일이고, 나한테 딱 한 번 일어난 기적이에요!

그때를 떠올린 이비는 눈을 질끈 감고 영혼으로 신음했다.

아, 어쩌자고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했을까. 이비는 자신을 바보 멍청이로 만드는 이 저주가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비가 힘겹게 수치를 눌러 담는 사이 유비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내가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 너는 날 구해 준 내 친구야.”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이 뜯어 가잖아.”

“물주도 좋은 친구야.”

“너 은근히 성격 나쁘구나.”

“그래도 친구일 거야.”

유비아는 친구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서도 그 덤덤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뭐를?”

“네가 받은 걸 소중히 여겨 줘. 지금처럼.”

뜻밖의 당부에 이비는 기분이 한층 더 이상해졌다.

얜 대체 뭘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정말이지 이상한 녀석이다. 이상할 뿐 아니라 엄청나게 귀엽고 명백하게 위험한 정말 기묘한 녀석.

하지만 이비는 그 녀석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의 난해한 정신세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친구가 되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
.
.

이비와 유비아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디에스는 점심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시간 맞춰 오셨네요.”

머리를 질끈 묶은 디에스가 현관문 소리를 듣고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 집에서 생활하는 게 몸에 익었는지, 주방을 다니는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이비는 그 모습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그 앞에 놓인 식재료와 잘린 버터의 모습이 아까 유비아가 보여 준 환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꿈 같은 게 아니라 진짜였어?’

이해를 돕기 위해 보여 준 허상인 줄 알았는데 현실이었다니.

그럼 이 녀석은 다른 장소를 마음대로 훔쳐볼 수 있다는 거야? 그거 너무 반칙이잖아?


“손부터 씻고 오시죠. 유비아도.”

“응.”

놀란 이비를 뒤로한 채 유비아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이비는 그 신기한 녀석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다시 디에스를 쳐다보았다.

소파 채로 뒤집혔던 게 불과 수십 분 전인데, 그는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그래서 이비는 잠시 갈등하다 집사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뭐 도울 거 있어요?”

“어쩐 일로.”

“그냥 집적거리는 거예요. 아까 일로 눈치 보여서.”

“어련하시겠어요.”

이비의 뻔뻔한 접근에 디에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서 이비는 더 본격적으로 치근대기 시작했다.


“그보다 왜 얘기 안 했어요?”

“뭘 말입니까?”

“유비아를 어떻게 만났는지요.”

이비의 추궁에 디에스가 그제야 아, 하고 중얼댔다. 그러더니 빵에 버터를 펴 바르며 대답했다.


“괜히 겁먹을까 봐요.”

“누가 겁을 먹는다고 그래요?”

실제로 겁먹었던 주제에 이비는 양심도 없이 따졌다. 그래서 디에스는 그 말 많은 입에 썰어 둔 토마토 조각을 대충 물려 주었다.

이비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입에 들어온 걸 받아먹자 디에스가 덤덤히 덧붙였다.


“누구긴요, 수틀리면 의자부터 뒤집는 사람이죠.”

“윽…….”

디에스의 뼈 있는 말에 이비가 짧게 신음했다. 그러더니 곧장 적반하장으로 응수했다.


“계속 캐물었던 쪽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집사의 한숨이 깊어졌고, 이비는 거기에 대고 꿍얼댔다.


“걱정하지 마요. 배신은 안 할 거니까.”

“배신할까 봐 그러는 것 같아?”

“아니.”

“그럼 왜 그런 것 같아?”

“내가 이상한 놈한테 홀려서 정신 못 차릴까 봐?”

“잘 아네.”

괜히 밉게 말하던 이비는 얼마 못 가 속내를 털어놓았고, 이비의 답지 않은 솔직함에 디에스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이비는 괜히 창피해졌다.

이 저주 때문에 이비는 디에스에게도 더 솔직해졌다. 그래서 이비가 속내를 숨기고 고집을 부릴 때마다 한숨 쉬며 물러나던 집사가 요즘은 종종 저렇게 웃는다.

무던한 집사의 웃음이 멋쩍어 이비는 잠시 딴청을 피우다가 그의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웃지도 말하지도 않던, 그림자처럼 텅 비어 있던 사냥개 시절의 그를.

아까 유비아가 이야기할 땐 부단히 부정했지만, 사실 이비도 알고 있었다. 그 냉혹한 사냥개가 자기 때문에 변했다는 걸.

다른 사람을 변하게 만들다니, 퍽 오만한 이야기 같지만 이건 자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자신을 보는 디에스의 시선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과정을 지켜본 이비는 그것을 확신하고 인정했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다.

유비아가 한 말은 다 맞다. 이비는 점성술사에게 그리움을 배웠고 그래서 디에스를 선택했다. 그로써 디에스는 탑주를 배신했다.

유비아는 이걸 다행이라고 했지만 글쎄, 디에스에게도 과연 그럴까?

이비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탑주에게 내쳐지는 일도 없었을 거다.

이 공교로움에 이비가 쓴웃음을 삼키는데, 디에스가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배신해도 돼.”

갑작스러운 말에 이비는 놀라서 디에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디에스는 제 앞의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혼자 돌아가도 돼. 너까지 추락할 필요는 없어.”

디에스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느긋이 움직였고, 덕분에 그 말은 후식 메뉴를 묻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맞아, 잘못했다고 빌면 탑주가 나는 용서해 줄 거야. 난 엄청 특별하고 잘났으니까.”

그래서 잠시 굳어 있던 이비도 이내 비슷한 어조로 되받아쳤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혼자만이라도 살길을 찾을게요. 안타깝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죠.”

“진짜?”

“가짜다, 이 바보 놈아! 나약한 소리 하지 마! 혼자는 싫단 말이야!”

하지만 이비의 도도한 거짓말은 시작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졌고, 이비는 자괴감에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이 저주 진짜 싫어…….”

이비가 치욕스러워하자 디에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음침한 사냥개답지 않게 쾌활한 웃음이었다.

디에스가 뒤늦게 웃음을 참으며 이비의 머리를 토닥였다. 화가 난 이비는 그 손을 맵게 쳐냈고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죄 없는 집사를 몇 대 때렸다. 그 와중에도 디에스는 계속 웃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연결은 역시나 가혹하다.

연약한 것끼리 손잡고 발버둥 치는 꼴은 비참하다.

그 소년은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라고 했지만, 그건 잘못된 말이다.

이 비루한 자들에게 그것은 단지 소중할 뿐 아니라 간절하다. 그래서 또 다른 목줄이자 저주가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탑의 지하에서 받는 대우에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디에스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차라리 몰랐다면 우린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몰라야 할 것을 안 죄로 벌을 받는다.

이비는 그 사실이 늘 슬프고도 달콤했다.

성녀 발탁식까지 앞으로 3주, 이비는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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