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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이어지기 충분한 시간 (73/129)


73화. 이어지기 충분한 시간
2023.02.09.


5년 전, 이비가 탑의 지하에 갇힌 지 한 달째가 되던 날이었다.


“야, 거기 있어?”

이비의 어린 목소리가 지하의 광활한 복도와 천장에 울려 퍼졌다.


“있으면 좀 나와 봐!”

이비는 주위를 두리번대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기둥 뒤나 복도의 사각지대를 기웃대며 소리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의 두 뺨엔 곧 불만이 차올랐다.

이비는 뚱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더니,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이비가 선 곳은 아래층이 내다보이는 복도의 난간이었다.

이비는 지하의 웅장하고 음산한 정경을 쭉 둘러보더니 돌연 난간에 무릎을 걸쳤다. 그러곤 그 아득한 높이에서 훌쩍 뛰어내리려 했다.

다행히 이비가 뛰어내리려는 찰나 누군가가 뒷덜미를 낚아챘다. 며칠 전 철장 앞에서 이비를 구해 준 검은 옷의 남자였다.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비가 그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있는데 왜 대답 안 해?”

이비의 뻔뻔하고 얄미운 추궁에도 그 남자, 디에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감정도 감회도 없이 이비를 난간에서 끌어 내릴 따름이었다.


“야, 너 그 여자 따까리냐?”

말썽을 피우다 뒷덜미를 잡힌 주제에 이비가 불손하게 물어왔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어이가 없어서 그 녀석을 노려봤겠지만, 디에스의 가면처럼 적막한 얼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지 마.”

디에스가 이비를 복도에 내려놓고 돌아서자 이비가 그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가면 뛰어내릴 거야.”

게다가 얼토당토않은 협박까지 해 댔다.

디에스는 그런 이비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 고양이 같은 놈을 지하의 시종들에게 넘겨 버렸다.

디에스에게 도움을 받은 이후, 이비는 이렇게 틈만 나면 그를 찾아다녔다. 이유는 단순했다. 밑도 끝도 없이 탑의 지하에 감금된 이비는 마음 둘 곳이 필요했고, 마침 그곳에 디에스가 있었다.

그 역시 이 징그러운 탑의 일부지만, 다행히도 그에겐 정을 붙일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잠깐이나마 점성술사와 닮아 보였고, 이런 사소한 이유로 이비는 그를 선택했다.


“너 이름이 뭐야?”

“말은 아예 못 해?”

“왜 이런 데서 일해?”

이비는 심심할 때마다 디에스를 찾아 말을 걸었고, 디에스는 이비가 스스로를 인질로 삼아 불러낼 때마다 하는 수 없이 나와서 그 꼬마가 재잘거리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오가는 것은 대화라고 볼 수 없었다.


“여긴 진짜 미친 것 같아.”

“너도 애들 묶여 있는 거 봤어?”

“티엔다도 공범이야? 아니면 모르는 거야?”

이비가 아무리 떠들어도 디에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는커녕, 몇 달이 지나도록 이비는 그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깊은 듯 탁한 듯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비도 딱히 그에게 대답이나 동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점성술사에게 아무렇게나 말을 걸던 시절이 그리워 대강 구색을 갖춘 채 푸념할 뿐이었다.

이비가 하는 짓은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비슷할 뿐 같지는 않았다.

탑주에게 철저히 길들어 감정을 잃었을 뿐, 디에스는 벽이나 돌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쌓일수록 조금씩 변했다.

특히 미엘 세드로라는 이비의 맞수가 등장하면서 디에스의 심경엔 큰 변화가 생겼다.


“야, 이거 놔.”

“이비부터 놔.”

“그럼 셋 세면 같이 놔. 하나.”

“둘.”

“셋. ……야, 이거 안 놔? 이게 진짜!”

“이비도 안 놨잖아, 당장 죽어!”

“아아악!”

어느 날 찾아온 미엘이라는 작은 괴물이 이비라는 작은 악마를 각성시켰다.

그래서 이비와 미엘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 함께 난간에서 떨어진 날, 이비를 향한 디에스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뭐, 왜.”

다리가 부러져 부목을 댄 이비가 쩔뚝대며 디에스에게 화를 냈다.

그 사냥개가 천하의 머저리를 보는 눈으로 이비를 물끄러미 쳐다봤기 때문이다.

이비는 이런 식으로 그 무미건조한 사냥개에게 사람의 감정을 알려 주었다.

힘으로는 한참 밀리는 주제에 미엘과 악착같이 싸우는 이비를 보며 디에스는 난생처음 한심함을 느꼈다.


“네가 안 말려서 내가 다쳤잖아!”

디에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미엘에게 무참히 털린 이비가 억지를 쓸 때는 꽤 억울했다.


“후후후, 죽어서 땅에 묻혀라, 미엘 세드로.”

이비가 미엘의 괴력에 대항하려고 위험천만한 함정을 준비할 때는 저거 저래도 되나 싶어 남몰래 초조해지기도 했다.

이렇듯 주인만 두려워하던 열 번째 사냥개는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에게 말을 걸던 소녀에게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시작은 한심함이었지만, 이비도 이 사실을 알고 몹시 분노했지만, 어쨌든 디에스는 다 지웠던 감정을 이비를 통해 하나둘 회복했다.

이비가 미엘에게 대승을 거두고 독박에서 광소를 터트릴 땐 솔직히 좀 무서웠다.

미엘의 반격으로 이비가 피를 뚝뚝 흘릴 땐 아뿔싸 싶을 정도로 당황했고, 그런 주제에 싸움을 뜯어말리는 자신에게 박박 대들 때는 상당히 피곤했다.

이비가 호수의 밑바닥을 보며 노래할 때는 처음으로 가슴이 벅차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노래를 쏟아 내고 쓰러진 이비를 받아 낸 날엔 그 애의 가벼움과 파리함이 안타까워졌다.

그리고 이비가 곧 여기서 나가게 될 거라 믿으며 미래를 그릴 때는,


“여기서 나가면 너랑도 못 보겠네.”

이렇게 순진한 소리를 할 때는, 차마 그 애를 바로 볼 수 없어 시선을 피했다.

3년은 모난 소녀와 무감한 청년이 서로 알고 이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3년 후에 그 일이 벌어졌다.


“저리 가.”

침대에 웅크린 이비가 디에스를 향해 잠긴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가, 너도 보기 싫으니까.”

이비가 디에스를 밀어낸 건 로히카에게 또 속은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이비는 이 탑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라며 지하에서 3년을 견뎌 냈다.

하지만 로히카는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이비는 약속을 어긴 로히카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복수할 수도,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그 매몰찬 현실은 이비를 비참하게 만들었고, 이비는 안 그래도 끔찍했던 이 탑의 모든 것이 구역질 나게 싫어졌다.

그건 모든 걸 뻔히 알고 있던 탑주의 사냥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비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타난 그 사냥개를 질색하며 거부했다.


“가라고! 너도 어차피 한 패잖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이비가 베개 따위를 던지며 목소리를 높일 때였다.

디에스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이비의 입을 막았다.


“읍……!”

디에스의 손이 얼굴을 덮는 순간 이비는 그대로 밀려 침대에 쓰러졌다. 이비가 몸부림쳤지만 디에스는 그마저도 손쉽게 제압했다.

꼼짝없이 짓눌린 이비가 디에스를 쏘아보자, 디에스가 입을 열었다.


“야.”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 이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처음이었다. 디에스가 말을 한 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디에스의 목소리는 그의 음울한 분위기를 그대로 닮은 듯 허스키했다.

상냥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목소리에 이비는 제 위로 드리워진 디에스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침착한 듯, 무심한 듯, 그럼에도 어딘지 슬퍼 보였다.


 
그런 낯선 얼굴로 디에스가 물었다.


“같이 도망칠래?”

그 말에 이비는 멍하니 굳어 버렸다.

이비가 얼떨떨한 눈으로 쳐다보자 디에스가 천천히 손을 뗐다.

구속이 사라졌지만 이비는 소리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반신반의하며 디에스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도망치고 싶어?”

“……응.”

디에스가 재차 묻자 이비는 홀린 듯 대답했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이비는 디에스에게 영문을 묻지 않았다.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나락에 걸터앉은 심정으로 디에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디에스는 정말 이비를 그 끔찍한 지하에서 꺼내 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자유를 얻었다. 짧아서 더 달콤한 자유였다.

함께 비스로 달아났던 두 사람은 얼마 못 가 붙잡혔다. 그 후 끌려간 곳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탑주의 앞이었다.

그날 이비는 언제나 기분 나쁘게 싱글대던 탑주의 진짜 모습을 보았다. 그 포악함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잃은 사이, 디에스와 헤어진 채 지하에 갇히게 되었다.

이비는 그때 비로소 상황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디에스가 돌연 탑주를 배반하고 이비와 도망친 이유도.

디에스가 이비를 데리고 도망치기 전, 탑주가 큰 사냥을 벌였다. 사냥개 열 마리를 모두 풀어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로히카 세드로가 만전을 기하며 준비한, 절대 실패할 리 없고 실패해서도 안 되는 사냥이었다.

그런데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일이 틀어졌다.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사냥개 한 마리가 돌연 미쳐서 다잡은 사냥감을 놓아준 것이다.

주인을 배신한 사냥개, 디에스는 그 일로 자비 없이 처분될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이비에게 내주었다. 혼자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굳이 탑으로 돌아와 이비를 데리고 나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비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3년은 사로잡힌 소녀와 길러지던 청년이 서로에게 유일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



“그때 디에스가 놔준 게 너였다니…….”

이비가 걸음을 옮기며 멍하니 중얼댔다.


“응, 나였어.”

그러자 옆에서 걷던 유비아도 태연하게 중얼댔다.

디에스가 개인적으로 아는 밤의 일족이라기에 멍멍이 시절 나쁜 짓을 하면서 만난 친구겠거니 했는데, 설마 이렇게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잠깐만, 근데 우리랑 같이 있어도 돼?”

“안 돼?”

“안 되지, 탑주가 널 발견하면 어떡해?”

유비아의 말이 사실이면 이 녀석은 로히카가 없애려다가 실패한 대상이다.

그럼 유비아는 여기서 태평하게 돌아다닐 게 아니라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무시무시한 여자는 도망친 것도 숨은 것도 악착같이 찾아내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이비의 걱정에도 유비아는 마냥 느긋했다.


“이제는 발견해도.”

이 말은 탑주가 더 이상 유비아를 노리지 않는다는 뜻일까?

이비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흠칫하고 놀랐다.


‘사냥개 열 마리를 풀어서 노린 게 유비아였다고……?’

이비가 아는 탑주는 낭비를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탑주의 사냥개는 단 세 마리로 성도 정복할 수 있는 자들. 실체 없는 악몽이자 고요히 찾아드는 사신, 그리고 탑의 가장 짙은 그림자이다.

그래서 이비는 로히카가 값비싼 사냥개를 몽땅 풀어서 노린 사람이라면 적어도 비스의 성주쯤은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성주는커녕 이 새하얀 꼬맹이가 그 사달의 원인이라니.


“그건, 탑주가 이제 널 노리지 않는다는 뜻이야?”

이비는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러자 유비아가 이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아.”

다소 어긋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비가 슬쩍 눈치를 살피자, 유비아가 안심하라는 듯 덧붙였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 말에 이비는 정말 무서워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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