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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이어져 있어 (72/129)


72화. 이어져 있어
2023.02.06.



 


“있잖아, 혹시 노체는 시간을 거스를 수도 있어?”

저주의 근원인 노체라면 그런 이변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비는 막연한 생각으로 유비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비아가 또 한 번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시간을 거스르는 게 뭔데?”

“예를 들면, 한 10년 뒤의 디에스가 지금 여기 나타나는 거.”

“10년 뒤에도 디에스가 있을까?”

“음, 아마 있지 않을까? 저래 봬도 튼튼하니까.”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 유비아는 진지하게 딴죽을 걸었다. 그래서 이비는 난감해하며 되물었다.


“그렇긴 한데, 만약에 있다고 하면. 10년 뒤든 30년 뒤든 디에스가 건강하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 수도 있어?”

“아니, 그런 건 못 해.”

유비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래는 없어. 그건 내일을 상상하는 자들이 만든 관념일 뿐이야. 만약 정해진 미래가 있다면 모든 게 그걸 완성하기 위해 존재하고 움직이는 건데, 그런 세계라면 굳이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유비아는 오늘도 역시 난해했고, 덕분에 골치가 아파진 이비는 그 복잡한 말을 다 치우고 요점만 되물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야?”

“응. 불가능해. 그 대신 그렇게 보일 수는 있어.”

“보일 수 있다고?”

“시간을 되돌리는 건 가능하거든.”

“……뭐가 다른 건데?”

이비의 물음에 유비아가 허공을 보며 음, 하고 고민했다. 그러더니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고?”

“응, 보여 줄게.”

이비는 저 손을 잡았다가 뱀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걸 잠시 떠올렸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유비아의 손을 붙잡았다.

동시에 몸이 밑으로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는데, 의외로 이비는 여전히 그 언덕 위에 있었다. 대신 옆에 있던 유비아만 예의 그 토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작아진 유비아가 거품처럼 둥실둥실 날며 말했다.


“모든 생명은 두 개의 세상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는 공간, 다른 하나는 시간이야.”

유비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비가 발을 딛고 선 땅이 쪼개지며 떠올랐다. 아니, 땅이 아니라 뿌리로 흙을 단단히 붙든 나무가 떠오르는 거였다.

이비는 거기 덩달아 딸려 올라갔고, 언덕과 마을이 발밑으로 멀어졌다.


“이게 공간.”

유비아가 작게 속삭이며 허공으로 떠오른 나무의 주변을 빙글 맴돌았다. 그러자 나무가 점점 작아지며 나무뿌리에서도 흙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게 시간이야.”

유비아가 묘목이 된 나무를 두고 말했다.

하지만 이비는 그 말에 호응할 겨를이 없었다. 나무가 작아지는 바람에 이비가 발을 딛고 있던 땅까지 우르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앗……!”

이비는 저 까마득한 지상으로 떨어지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르다가, 푹신한 것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비는 어느새 이층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 집에선 막 장을 보고 돌아온 디에스가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다 같이 손을 잡고 걷는 중이야. 서로 싫다고 해도 이건 어쩔 수 없어. 같은 시간과 공간으로 연결된 이상 하나의 세계를 공유해야 해.”

유비아가 집 안을 포르르 날아다니며 말했다. 하지만 디에스는 유비아도 이비도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유비아가 묵묵히 버터를 자르는 디에스의 주변을 떠다니며 말했다.


“그런데 노체는 생명을 돌보는 용이어서 이 결속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어.”

“느슨하게?”

“다 같이 손을 잡고 걷는데, 너만 잠시 손을 놓게 하는 거야.”

유비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세상이 번쩍거렸다. 창밖의 하늘이 낮과 밤으로 물들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고, 디에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며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잠시 후, 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런데 그사이 집 안의 풍경이 상당히 변해 있었다. 가구가 바뀌고 계절도 한겨울이었다. 그리고 디에스는 아까와 다른 옷을 입고 머리도 훨씬 더 길어져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다.


“너만 빼고 3년이 지났어. 이러면 너는 시간을 건너뛴 사람처럼 보일 거야.”

이비는 얼떨떨한 얼굴로 디에스와 유비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나 유비아는 이비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되물었다.


“그럼 시간을 거슬러 온 것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뺀 모든 것들의 시간을 되감으면 되겠지.”

이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정답이었는지 유비아가 허공을 빙글 날았다. 그러자 또 한 번 세상이 어둡고 밝아지며 빠르게 움직였다. 집 안의 구조가 변하고 디에스가 사라졌다.

이윽고 정적이 흐르는 집 안의 모습이 이비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익숙한 광경에 이비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때 등 뒤에서 저벅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점성술사가 있었다.

이비는 그를 보고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유비아가 보여 주는 환상인 걸 알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비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손을 뻗기 전에, 그리고 걸음을 떼기 전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미래는 없어.”

어둠 속에서 유비아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미 져서 버린 판과 다시 시작한 판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버려진 판은 언뜻 미래처럼 보이지만 사실 과거야. 너희가 인지하지 못할 뿐, 이미 지나간 시간이니까.”

유비아가 말하는 사이 세상이 천천히 밝아졌다. 이비는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반칙을 쓴 거야. 세상과 자신의 결속을 느슨하게 만들어서.”

이비는 그 말을 곱씹으며 소년으로 돌아온 유비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럼 둘이 될 수도 있어?”

“둘?”

“한 사람이 되돌리기 전과 되돌린 시간으로 나뉘어서 서로 만날 수는 없어?”

“그건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불가능한 게 아니라 하면 안 되는 일이라니.

그 의미심장한 말에 이비가 빤히 쳐다보자, 유비아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댔다.


“온 세상의 시간이 수복될 때 흐름을 벗어나면 혼자 다른 시간대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어. 이건 작은 일탈이야. 그런데 둘이 되는 건 아예 다른 일이야. 그러려면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혼자 남아야 해. 그건 영원한 단절이야.”

유비아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래서 이비는 또 한 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세상 모든 것과 자신을 끊어 낸 거야. 그건 죽음보다 비참한 일이야. 온 세상으로부터 이방인이 되는 거고, 세상은 그런 존재를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발견하는 즉시 없앨 거야.”

유비아의 단언에 이비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을 가린 점성술사. 그는 혼자 있을 때도 절대 그 로브를 벗지 않았다.


―혹시 백작님은 아저씨 얼굴도 보셨어요?

하지만 며칠 전 이비가 물었을 때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좀 늦을지도 몰라. 그래서 대신 다른 사람이 올 거야. 그 사람이 와서 그때 다 설명해 줄 거야.

그리고 점성술사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숨이 막혔지만 이비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구나.”

이 한마디를 힘겹게 꺼내고서 태연한 척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말짱한 얼굴로 유비아에게 물었다.


“여기 언제까지 있을 거야? 더 있을 거면 나는 먼저 내려갈게.”

유비아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이비를 얌전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차분히 되물었다.


“누구 그런 사람 있어?”

“응,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어.”

“누군데?”

“날 구해 주고 돌봐 준 사람.”

이비는 순식간에 대답해 버리고 입을 꾹 다물고 웃었다. 이 역시 못 할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곤란했다.

그래서 이비가 그만 자리를 뜨려는데 유비아가 다시 중얼댔다.


“대단하다.”

그 한마디에 이비가 멈칫하는 사이, 유비아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모든 걸 버리고 널 만난 거잖아.”

유비아의 말에 이비는 몹시 괴로워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부정했다.


“아직 정확한 건 아니야.”

“그럼 어느 쪽이면 좋겠어?”

“어?”

이비는 이 화제를 계속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유비아의 접근은 아까 디에스에게 그런 것처럼 단호히 뿌리칠 수 없었다. 너무 잔잔해서 저도 모르게 떠밀려 가는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시간을 넘어온 거면 좋겠어?”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이비는 자신의 대답에 다시 한숨을 삼켰다.

정리는 이미 했고 정답도 안다. 그러니 이비는 아무렴 상관없다고 대답해야 했다.

하지만 반드시 진실을 답하는 저주에 걸린 이비는 도리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이비가 곤혹스러워하는 사이 유비아가 말했다.


“모르겠으면 대답해 봐. 모처럼 편리한 저주에 걸렸잖아.”

“편리?”

이 저주가 편리하다니, 생각도 못 한 발상이었다.

이비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데 유비아가 대뜸 물었다.


“왜 모른다고 대답한 거야?”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니까.”

“좋은 건 뭔데?”

“아저씨한테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게 좋아. 날 버리고 간 게 아닌 것도 좋고, 나만 바보처럼 매달린 게 아닌 것도 좋아.”

“그럼 뭐가 싫어?”

“아저씨가 나 때문에 잘못됐을까 봐 무서워서 싫어.”

이비가 억누르던 마음이 말이 되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마구 뭉쳐 놓은 혼란이 간결한 언어로 풀리자 둔통으로 얼룩졌던 마음도 후련한 듯 허전한 듯 차갑게 아려왔다.

이비는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스스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냉혹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 타인의 장막에 숨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기대지 않기로 했다. 더는 약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런 다짐과 달리, 이비는 자신에게 다정했던 세상을 지금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대답에 놀란 이비에게 유비아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만날 수 있다면 다시 만나고 싶어.”

저주가 찾아낸 이비의 진심은 단순했다. 그래서 이비는 더 견디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이비에게 유비아가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자기보다 키가 큰 소녀의 머리를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그리워하는 것도, 만나고 싶은 것도 이어져 있으니까 가능한 거야.”

유비아의 말은 여전히 난해했다.


“다행이야. 너는 세상과 이어져 있어.”

그래도 대충 위로 같기는 했다.

그때 유비아는 늘 무표정하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담고 있었다.


 

.
.
.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거의 울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키고 말린 이비는 겨우 자존심을 지켰다. 물론 유비아는 아무 관심 없는 이비 혼자만의 체면이었다.

간신히 얼굴의 열기를 덜어 낸 이비는 몹시 민망한 기분으로 유비아를 힐끗댔다.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았지만, 알면 알수록 희한한 소년이다.


“……너는 디에스하고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이비는 이 소년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살그머니 묻자 유비아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디에스는 생명의 은인이야.”

“은인?”

그 멍멍이가 누굴 구해 주고 그럴 틈이 있었나?

이비가 반신반의하자 유비아가 당당히 끄덕였다.


“응, 죽이러 왔다가 안 죽이고 놔 줬어.”

유비아는 아주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댔다. 그래서 이비는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니까 생명의 은인이지.”

착한 건지 바보인 건지 알 수 없는 유비아의 말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유비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노골적인 삿대질과 함께 이비가 되물었다.


“그게 너였어?”

유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짧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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