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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완벽한 구원은 아니었다 (68/129)


68화. 완벽한 구원은 아니었다
2023.01.23.


2년 전, 이비가 티엔다 사교계에 슬금슬금 발을 들이던 시기였다.

그때 이비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리고 깐깐한 귀족들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걷듯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위기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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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아리아테 양. 이렇게는 처음 뵙네요.”

그 위기란 바로 귀족들 앞에서 자애로운 척 말을 걸어온 성녀, 로블레 투하의 등장이었다.

이비는 성녀가 사교 활동을 거의 안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사교장에서 마주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날은 운이 없었는지 하필 성녀를 만나고 말았다.

성녀를 본 이비는 하마터면 착한 표정을 무너트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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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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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격식 차리지 말아요. 우린 탑의 가족이잖아요.”

이비가 애써 감정을 감추며 인사하자 성녀가 애틋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래서 이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무려 3년 전이지만 이비는 생생히 기억했다.

저 여자가 탑의 지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모습을, 탑주 옆에 서서 일말의 감정도 없이 싸늘히 훑던 그때의 시선을.

그런데 이제는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다니, 그러면서 탑의 가족이라고 부르다니. 과연 성녀가 되려면 저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하나 보다.

이비가 이런 생각을 하며 성녀를 몰래 경계하는데, 성녀가 다시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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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테 양이 떨어트린 물건, 내가 보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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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트린 물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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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서 던진 리본이요. 기억 안 나세요?”

성녀의 물음에 이비는 곤혹스러워하며 억지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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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테 양에게 돌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이비는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베일을 쓴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는 그 리본이 지하에서 구속구로 쓰이는 걸 걸 뻔히 알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그걸 굳이 돌려주고 싶다고 하다니.

이비는 이게 성녀의 견제나 압박으로 느껴졌다. 내가 네 비루한 꼴을 아니까 함부로 설치지 말라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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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성녀님. 조만간 제가 찾아뵐게요.”

이비는 그냥 태우거나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지못해 예의를 지키며 답했다.

그에 성녀는 만족한 듯 웃었고, 이비는 저 꺼림칙한 여자를 피해 서둘러 돌아섰다.

조만간 찾아뵙겠다는 약속은 물론 지키지 않았다. 리본의 존재도 깨끗이 잊어 버렸다.

이비가 사교계에 막 발을 들이던 시절, 그리고 로블레 투하가 베일을 쓰기 시작한 때의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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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이비는 자신에게 저주를 건 사람이 성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라면, 백작의 말대로 성녀가 무고하다면 지금으로선 달리 짚이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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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른 시간대의 누군가가 아니고서야…….’

이비는 복잡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망할 미엘이 걷어차고 간 옷가지를 하나씩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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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에게 제대로 확인해야 해.’

그게 먼저다. 그래서 이 당혹스러운 추측이 맞다면,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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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이비는 진력이 난 듯 주워 든 옷가지를 침대에 내던졌다. 그러곤 그 옆에 풀썩 누워 버렸다.

백작과 점성술사 모두 시온 라우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이비를 막막하고 억울하게 만들었다. 마치 혹한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점성술사는 홀대와 박대를 견딜 수 있던 이비를 굳이 데려가 돌봐 주었다. 그렇게 이비를 연약하게 만들어 놓고, 가장 의지하던 순간 홀연히 떠났다.

이비는 그런 점성술사를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차라리 잊기로 했다. 돌봐 주어 고마운 것과는 별개로 무책임하게 떠난 사람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니 더 이상 찾을 필요 없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그것으로 그에 대한 미련을 간신히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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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간절히 찾을 땐 흔적도 안 보이더니,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이비의 마음이 또 한 번 술렁였다. 이비는 지금 제 안을 가득 채운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야속함인지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그와 함께 지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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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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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티엔다에 사는 사람들처럼요.

이비는 불현듯 떠올렸다. 어린 시절, 자신이 점성술사에게 했던 말을.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점성술사를 만나기 전부터 이비가 가지고 있던 꿈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 세상은 이비에게 가혹했다. 그래서 이비는 단 하루를 살기 위해 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눈앞이 깜깜하던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이 공평하게 가혹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빵 한 조각을 훔치고 목에서 피 맛이 올라오도록 달릴 동안 느긋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단 한 끼를 위해 하루 치 기력을 소진하고 겨우 채운 배도 도로 주리는 나와 달리 식탁에 앉는 것만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걸 처음 알았을 때, 이비는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히 비참하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아, 이게 당연한 게 아니구나. 벗어날 길이 있구나.

어린 이비는 이 세상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었다.

그 후엔 이해했다. 세상이 자신에게 유독 사나운 이유를. 그게 자신이 유독 쉽기 때문이라는 걸.

세상은 이비의 생각보다 훨씬 더 공평해서, 강하고 어려운 자에겐 편한 길을 주고 약하고 쉬운 자에겐 험난한 길을 줬다. 훌륭한 자격을 갖춘 자에겐 상을, 그렇지 못한 자에겐 벌을 주는 것처럼.

이 단순한 진실을 알게 된 이비는 갈망하게 되었다.

나도 언젠가 어려운 사람이 되기를.

세상이 괴롭히지 못할 만큼 강한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조금은 편해질 수 있기를.

이건 이비가 배 속에 넣어 두고 아끼던 엄숙한 야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난 점성술사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비는 이걸 실토해 버렸다. 심지어 한동안 잊어버렸다.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바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어려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조차 잊고 말았다.

그 안일함의 책임은 점성술사가 떠난 후 고스란히 이비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비는 점성술사와 헤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아무 힘 없는 두 손으로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를 막을 수도 가둘 수도, 그가 떠나야 하는 이유를 먼저 해결할 수도 없었다. 하다못해 그의 흔적을 찾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여전히 어렵지 못한 이비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장소에 남은 그의 빈자리에 아파하는 것뿐, 자신의 안락하던 세계가 허물어지는 걸 덧없이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잊은 채 타인의 호의에 안주하던 자의 말로였다.

그래서 이비는 그리워할지언정 바라지 않았다. 그 다정한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그는 이비를 구해 주었다. 하지만 완벽한 구원은 아니었다. 그의 구원은 한시적이고 일방적이며 모질었다.

이유 없이 받은 것이기에 이유 없이 빼앗겨도 어쩌지 못하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었다.

때문에 이비는 다시 바란다. 이제는 정말 어려운 사람이 되기를. 그것만이 나를 지켜 줄 완벽한 구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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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니까 상관없어. 백작이 누구든.’

이비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졌다.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의 이비 아리아테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계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셈해 보았다. 만약 아저씨가 시온 라우렐이면, 나와 시온 레우렐 사이에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면, 탑주에게 협박당하는 이 처지를 백작에게 알려도 되지 않을까?

그럼 백작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이비는 잠시 이런 기대를 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로히카 세드로가 자신을 순순히 놓아줄 리도 없을뿐더러, 백작에게 의지하는 건 점성술사에게 기대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백작이 처음 제안했던 것처럼 이번엔 제대로 돌봐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타인에게 내 운명을 맡긴 채 그가 언제 날 버릴지, 그래서 내가 언제쯤 넘어질지 염려하는 건 이제 사양이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점성술사가 누구든, 진실이 어떻든 달라질 건 없다.

이비가 바라는 건, 또 바라야 하는 건 스스로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 오직 그것뿐이니까.

이비는 이렇게 생각하며 어지럽게 흩어진 마음을 굳게 잠갔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 무섭게, 이비는 옆에 있던 옷을 천장 높이 집어던지고 말았다.

불현듯 며칠 전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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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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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까지 생각했으니까요.

이비는 자신이 백작에게 한 말을 떠올리고 침대를 굴렀다. 그러곤 비명을 참기 위해 입을 막고 몸부림쳤다.

사실 상관없지 않다.

이비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히 동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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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택에 불이 난 날 헤스타 자작의 하인들이 탄 냄새가 밴 옷을 내놓았음.

―헤스타 자작의 저택 창고에서 대량의 기름이 출처 없이 사라짐.

―헤스타 자작의 아들은 몬트라 후작의 친우.

지하의 자매들은 단 하루 만에 저택에 불을 지른 범인을 찾아냈다. 이비의 추측대로 몬트라 후작의 짓이었다.

하지만 꼬리를 잡았다고 한들 이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탑이 보호하는 건 이비의 신체뿐이지 재산까지 지켜 주지는 않았다.

이 정도 범죄면 재판을 열 수도 있지만 정의로운 라우렐 대공의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건 귀족뿐이기에 이 역시 무용했다.

그렇다고 귀족들에게 이 부당한 폭력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비를 향한 귀족들의 시선은 한없이 싸늘했다.

―아리아테의 두 얼굴에 소름이 끼칠 지경, 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수다쟁이 다수.

―가증스럽고 탐욕스러운 평민 계집이 감히 귀족을 기만하고 능멸했다, 라며 피해의식을 뽐내는 바보 다수.

―아리아테가 귀족들의 뒤를 밟았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대역 행위이므로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라며 제 발 저려 하는 얼간이 다수.

이렇듯 티엔다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이비에게 공격적이었다.

그들은 몬트라 후작이 이비를 배신한 것은 ‘좀 너무한 짓’ 정도로 여겼지만, 이비가 후작에게 반격한 것은 ‘죽어 마땅한 짓’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살짝 환멸이 들었지만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래서 이비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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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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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것 없다.”

이비가 공손히 인사했지만, 소파에 등을 파묻은 그 귀족은 이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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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기보단 죄송할 일이지. 자네가 만나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원로 회의가 중단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눈을 감은 채 노쇠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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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때문에 백 명이 넘는 바옌의 원로들과 그 열 배수의 가신들이 날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니 자네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할 거다.”

고상한 목소리로 괴팍한 말을 하는 그 노인은 대 바옌의 주인.

대귀족인 이엘 바옌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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