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악마에겐 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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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악마에겐 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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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악마에겐 꼬리가 있다
2023.01.19.
“성녀가 못될 것 같으니까 시온한테 꼬리치는 거야?”
미엘의 목소리엔 악의가 가득했다. 일부러 짓뭉갤 의도로 점철된 그 물음에 이비가 답했다.
“응.”
태연한 목소리였다.
“일종의 보험이지.”
어딘지 당당하기도 했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비는 절로 나온 자신의 대답이 딱히 수치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실이기도 했다.
이비가 너무 멀쩡히 대답하자 미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엘은 다시 독버섯처럼 달콤하게 웃었다.
“이비는 변하질 않네. 지하에 있을 땐 그 개한테 매달리더니.”
“부러워?”
“미엘이 왜?”
“계속 걸고넘어지는 게 부러운 것 같아서.”
“부러운 게 아니라 기분 나빠서 그러는 거야. 다 미엘 건데 이비가 마음대로 망쳐 놨잖아.”
미엘이 가볍게 푸념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이비의 블라우스를 발끝으로 지분댔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행태에 이비가 옷을 빼내려고 잡아당겼다. 하지만 미엘이 발에 힘을 주며 버텼고, 그 바람에 얇은 블라우스가 줄다리기하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렇게 힘겨루기를 잠깐, 이비가 미엘을 힐끗 올려다보며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계단에서 구르고 싶니?”
“혼자 못 걷고 싶으면 해 보든가.”
하지만 되돌아온 미엘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비와 미엘, 이 두 사람은 탑의 지하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운명의 숙적이었다.
이비는 자신을 속이고 지하에 가둔 로히카 세드로를 몹시 싫어했고, 그 여자의 명령을 따라 자신을 억압하는 탑의 모든 것도 공평히 미워했다.
그러니 탑의 상속자랍시고 거들먹대며 탑의 지하를 제 나들이 공간쯤으로 생각하던 시건방진 미엘 세드로 역시 눈에 고울 리가 없었다.
미엘도 다른 목소리 노예들과 달리 기고만장한, 게다가 특별 취급까지 받는 이비가 사사건건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비는 자신이 탑주에게 편애받는 걸 이용해 미엘에게 실컷 불손하게 굴었고, 미엘이 이를 백번 양보해 모처럼 예뻐해 주려고 해도 끝까지 덤벼들었다.
그래서 당시 열다섯 살이던 이비와 열세 살이던 미엘은 만난 지 한 주 만에 철천지원수가 되어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는 것으로 모자라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서로를 적극적으로 해치려 들었다.
그 결과 이비는 미엘 세드로에 의해 팔다리가 각각 한 번 이상 부러지고 이마가 두 번 찢어졌으며 밥 먹듯 독방에 갇혔다. 독방에 갇혀서도 물벼락을 맞거나 막대기로 철문을 치는 소음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미엘도 이비에 의해 만만치 않은 경험을 했다.
그 시절 이비는 주로 구조물을 이용하는 놈이었고, 덕분에 미엘은 틈틈이 계단을 구르고 난간에서 떨어졌으며 머리카락이 불타거나 밀가루 더미에 깔리거나 구석진 창고에 갇혀 구조될 때까지 꼬박 이틀을 굶기도 했다.
두 소악마의 전쟁은 치열했고 탑의 시종들은 그들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완벽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또 순전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이 둘 다 똑같이 악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켜보던 시종들은 다만 바랄 뿐이었다. 둘 중 한 명이 상대방을 죽이는 데 성공해서 탑주가 격분하지 않기만을 말이다.
이 두 사람의 완벽한 악연은 탑의 지하에서 3년을 꼬박 채운 걸로 모자라 이비가 티엔다 사교계로 나온 후에도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탑주가 이비와 내기 중이니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고 미엘에게 친히 경고한 덕분에 미엘이 밖에서는 이비를 차마 건드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대신 미엘은 기회가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 물고 늘어졌다. 바로 지금처럼.
“너 나 좋아하니?”
“이비, 미쳤어?”
“아니, 안 미쳤어. 너야말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쫓아다녀?”
저게 얌전히 물러날 리는 없으니, 자존심이나 살살 건드려서 쫓아내야지.
이비는 미엘에게 밟힌 블라우스를 잡아당기다 이런 생각으로 손을 놓았다. 그러곤 침대에 걸터앉으며 저 독해 빠진 미엘을 비웃었다.
“이 탑이 다 네 거라면서. 그럼 그거 가지고 놀지 왜 나한테 와서 이래. 혹시 가진 게 다 별 볼 일 없니?”
“원래 자기 건 곱게 넣어 두고 도망치는 걸 잡으러 다니는 거야. 이비는 가진 게 없어서 이런 거 잘 모르겠지만.”
“그래? 그럼 시온도 잡으러 가야겠네?”
여태 단 한 번도 라우렐 백작의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없지만, 이비는 일부러 친근한 척 말했다.
“네가 부를 때 뒤도 안 돌아보던데.”
아까 태연히 대꾸하기는 했지만, 이비는 자기에 꼬리 운운한 미엘이 적잖이 괘씸했다. 그래서 똑같이 돌려주었다.
“너야말로 열심히 꼬리치던데, 나야 처지가 이래서 그런다지만 너는 왜? 혹시 좋아해? 좋아하는데 그렇게 무시당한 거야?”
이비의 조롱에 미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통통한 뺨을 사랑스럽게 밀어 올리던 미소가 지워지자 미엘의 앳된 얼굴이 도자기 인형처럼 차갑고 적막해졌다.
“이비는 정말 죽여버리고 싶은 말만 골라서 잘하는 것 같아. 주제 파악 좀 하라고 계속 가르쳐 주는데도 말이야.”
그런 얼굴로 미엘이 나직이 중얼댔다.
“왜 모르지? 성녀가 되든 지하로 돌아가든 이비는 어차피 노예인데. 보험? 시온이 이비의 처지를 알고도 지금처럼 관심을 가질까? 설마 이비는 이비한테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전혀.”
미엘의 날 선 물음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러곤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이지, 우리 자기는 날 위해 뭐든 할 거야’라고 자신 있게 말해서 미엘을 더 약 올리고 싶었는데 저주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이비는 대신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부르면 돌아보기는 할걸?”
이비의 도발이 뼈아픈지 미엘이 이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비도 미엘을 똑바로 마주 봤다.
그렇게 서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를 한참, 미엘이 다시 초승달처럼 가느다랗게 웃었다.
“옛날처럼 팔다리를 부러트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엘은 정말 아깝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맞아. 미엘, 좋아해. 그래서 이비를 지하에 영영 처박아두고 싶어.”
갑작스러운 솔직함에 이비가 짐짓 놀란 사이 미엘은 흥이 깨졌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온은 원래 미엘 거야. 이건 안 줄 거니까 훔쳐 갈 생각하지 마.”
미엘은 경고하듯 중얼대며 그대로 가 버렸고, 이비는 그 자그마한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엥, 진짜?’
진짜 백작을 좋아한다고? 저 미엘 세드로가?
지난 정화식 때 미엘이 백작을 보자마자 살가운 목소리를 내기는 했다.
하지만 이비는 그걸 미엘이 자신과 동등한 상대를 대하는 태도 정도로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악한 미엘 세드로에게 다른 사람을 연모하는 말랑말랑한 마음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까.
게다가 백작은 무려 7년 동안 티엔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미엘과 백작의 접점이라면 같은 대귀족인 것, 미엘 저 기집애가 열 살 코흘리개일 적에 성인식을 앞둔 백작과 오가며 마주쳤을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좋아한다는 건 적어도 7년 이상 짝사랑을 간직했다는 건데, 그게 말이 되나?
‘음, 하긴…….’
이비는 고개를 갸웃대다가 백작의 얼굴을 떠올리고 왠지 지는 기분으로 납득했다.
시온 라우렐은 성질머리 빼고 모든 면이 잘나신 백작님이시다.
7년이 아니라 17년 만에 공백을 깨고 나타나도 뭇 영애들은 그를 보자마자 있지도 않은 첫사랑의 추억을 날조해 낼 것이다. 특히나 저 거만한 미엘 세드로는 자신의 드높은 신분에 맞는 선택지가 라우렐 백작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저 미엘이 짝사랑이라니.
백작님, 축하드려요. 잘나서 정말 좋겠어요.
이비는 이렇게 생각하며 실없이 웃다가 웃음을 뚝 그쳤다.
머릿속 백작에게 말을 건 순간 겨우 의식 저편으로 밀어냈던 기억들이 불쑥 솟구쳤기 때문이다.
―괜찮으니까 그냥 자.
스치듯 떠오른 목소리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목소리에 이어 그 밤의 감각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체중을 조심스럽게 받치던 단단한 팔도, 파묻히듯 기댈 수 있던 넓은 품도, 식은 몸을 다시 데울 만큼 뜨겁던 체온도.
백작은 이비와 모든 것이 반대되는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이비는 그에게 닿을 때 느낀 모든 것이 익숙했다.
‘아냐, 아냐, 아냐, 그럴 리 없어.’
이비는 번민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로 입술을 깨물고 이마를 짚었다.
아, 그때 기껏 백작을 만나러 가서 나는 왜 도망쳤을까? 그날 제대로 확인했다면 이렇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는데.
이비는 과거의 자신을 혼내다가 다시 반성했다. 사실 이비는 지금도 백작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등꽃제 이후, 이비는 확신에 가깝게 의심하고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간 점성술사와 라우렐 백작이 어쩌면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이비도 처음엔 이 과한 발상을 비웃었다. 하지만 단지 웃고 끝내기엔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라우렐 백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점성술사의 여러 특성.
그럼에도 그가 ‘전대 라우렐 백작’은 아니라는 백작의 확답.
게다가 점성술사를 과하게 변호하고 책망하던 백작의 아리송한 태도까지.
그 모든 게 일시에 떠오르며 이비의 머릿속에선 점성술사와 백작의 모습도 하나로 포개졌다.
그리고 이비는 그 순간 술이 다 깨 버렸다.
이비는 백작이 고이 모셔다 준 침대에 누워 말도 안 된다는 말을 백 번쯤 중얼댔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떠올렸다.
우선 이비가 어릴 때 만난 점성술사는 어른이다. 그리고 백작은 이비보다 고작 4살이 많다.
그러니 점성술사와 백작이 동일인이라면 점성술사는 미래에서 찾아온 사람이어야 한다.
어머, 세상에, 말도 안 돼.
티엔다비스가 아무리 엉망이라지만 설마 이런 일이 가능하겠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대륙이 허공에 떠오른 순간부터 고대의 섭리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덕분에 이비는 그날 밤새 번민하다가 무작정 백작을 찾아갔다.
그러곤 백작의 반응만 보고 어쩐지 겁이 나서 도로 정신없이 도망쳐 버렸다.
‘아아아…….’
이비는 마치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뭘 어디서부터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이 끔찍하게 뒤엉킨 실타래를 부단히 외면하는 중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넘치게 버거운데, 이 와중에 이비를 골치 아프게 하는 또 다른 가설이 있었다.
이비에게 저주를 건 범인.
그게 가능한 사람은 유비아가 알려 준 조건을 다 갖춘 로블레 투하뿐이다.
하지만 백작은 성녀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시간을 거스르는 게 정말 가능하다면.
‘내게 저주를 건 사람도 다른 시간대의 사람……일 수 있나……?’
이비는 멍하니 생각하다가 오싹한 기분에 어깨를 끌어안았다.
막막할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