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지하의 자매들 (66/129)


66화. 지하의 자매들
2023.01.16.


어린 이비는 딱 한 번 본적이 있다.

점성술사가 우는 모습을.

여름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이비는 사소한 이유로 잠에서 깼다.

그날따라 너무 더웠다. 그래서 창문을 열려고 창가로 갔다가 낮은 신음을 들었다.

수상한 소리에 이비는 저도 몰래 기척을 죽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너편 방의 창가에 점성술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비가 깬 걸 모르고, 자길 훔쳐보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창틀에 매달려 숨죽여 울고 있었다.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뭐가 그리 서러운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그 모습을 본 이비는 놀라서 침대로 되돌아갔다. 그러곤 더위도 잊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왠지 마치 보면 안 될 걸 본 기분이었다.


‘어디 아픈가? 무슨 일이 있나?’

이비는 어쩐지 무서워졌다. 끔찍한 걸 본 것도 아닌데 덜컥 겁이 났다.

그게 아픈 엄마를 보는 아이의 심정과 비슷하다는 걸 당시의 이비는 알 수 없었다.

이비는 영문도 모른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다시 만난 점성술사는 여느 때처럼 다정했고 그래서 이비도 모르는 척 웃었다. 그럼 전부 괜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 일이 지금 와서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가면 언제 올 건데요?”

이비의 물음에 점성술사가 곤란한 듯 웃었다.


“가지 마요.”

“이비야.”

“가지 마요, 나만 두고 가지 마요. 꼭 가야 하면 나도 데려가요!”

오랜 불안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이비는 며칠 전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점성술사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대체 어디 가는데요, 왜 가는데요?”

점성술사는 이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이 있으면 그저 빙긋 웃으며 침묵할 뿐이다. 바로 지금처럼.

그 미소와 침묵에 이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난생처음 느끼는 고통이 등을 떠밀 듯 덮쳐 왔다. 그 고통의 이름은 상실감이었다.

이비는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저씨가 같이 살자고 했잖아요. 나는 분명 싫다고 했는데, 아저씨가 그러자고 했잖아요. 마음 놓고 기대게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떠난다고 하면 나는 어떡해요.


“내 얘기 좀 들어 줘.”

이비가 하얗게 질려 숨을 몰아쉬자 점성술사가 그 여린 어깨를 감싸 쥐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 그래서 꼭 가야 해. 절대 널 버리는 게 아니야.”

“그런데 왜 돌아온다는 말을 안 해요?”

점성술사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안 돌아올 거예요? 대체 어딜 가는 건데요.”

이비가 불안에 떨며 물었지만 야속한 점성술사는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말해 주지 않았다.


“꼭 가야 하는 거면 얼굴이라도 보여 줘요.”

그런 점성술사를 향해 이비가 절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역시 점성술사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연이은 거절에 이비는 까만 절망을 느꼈다.

이비는 그가 영영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이 와중에도 이비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얼굴도 이름도, 나를 돌봐 주는 이유조차 아직 몰랐다. 그래서 한없이 서러워졌다. 차고 넘치게 사랑받았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나는 좀 늦을지도 몰라. 그래서 대신 다른 사람이 올 거야. 그 사람이 와서 그때 다 설명해 줄 거야. 이비야, 울지 말고. 응?”

이비가 입술을 깨문 채 눈물만 뚝뚝 흘리자 점성술사가 그 눈물을 쓸어 닦으며 달랬다.

하지만 그 말은 이비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니.

이 세상 수많은 사람 중 내가 마음을 열 수 있는 상대는 당신뿐인데 대신이라니, 다른 사람이라니.


“그럼 아저씨 이름이라도 알려 주세요.”

만약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아서 내가 찾아야 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을 물어보고 다니게요.

이비는 이 뒷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흐느낌을 삼키기 위해 입을 급히 닫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성술사는 이비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잇새로 옅은 탄식을 흘렸다.

그 명백한 체념에 이비는 더 버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가지 마요, 내 옆에 있어 줘요.”

이비는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점성술사를 붙잡았다.

점성술사는 이비를 다정히 안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친절은 오히려 독이었다.

소녀가 울다 지쳐 잠들었을 때 버리고 갈 거라면 차라리 모질게 굴 것이지.

그는 마지막까지 상냥하게 이비를 보듬다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을 한 주제에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듯 아이를 놀리고 떠났다.

그래서 다음날 눈을 뜬 이비는 그의 빈자리를 믿지 못해 며칠을 더 울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알려 주지 말지.

다정함도 온기도 사랑스러움도, 아무것도 알려 주지 말지. 그걸 배우지 못했다면 빈자리의 싸늘함도 몰랐을 텐데.

그는 늘 혼자였던 아이에게 혼자가 되는 슬픔을 가르쳐 주고 사라졌다.

그는 이비의 세상에 찾아온 이유 없는 구원이자, 가장 큰 상처였다.


 

.
.
.

이후 줬다 뺏는 놈을 증오하게 된 소녀가 이제 어떤 놈에게도 기대지 않겠노라 다짐한 지도 어언 5년.

어린 시절의 다짐대로 홀로 굳게 선 이비 아리아테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활활 타오르는 자신의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X가…….’

이비는 전소를 목표로 맹렬히 타오르는 보금자리를 보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 새X를 떠올렸다.

그 새X란 바로 카셀 몬트라. 이비와 전쟁을 선포한 대귀족이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제 아침, 카셀 몬트라는 이비를 만난 직후 투하의 별장에서 후다닥 떠났다.

켕기는 게 있어서 서둘러 정리하려고 그러나 했는데, 설마 남의 집을 방화할 줄이야.


‘내 집에 자기한테 불리한 증거나 기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한 분풀이일 수도 있다. 탑의 감시 때문에 이비를 직접 건들지는 못하니 냅다 불부터 지른 걸 수도.

이비는 꽤 화가 났지만,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곤 제 곁에 선 수십 명의 하녀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다친 데는 없어요?”

이비의 물음에 단정한 자태의 하녀들이 말 대신 손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괜찮아요.

―다만 디에스 집사님의 아내 분이 아직 저 불길 속에…….

―구해 보려고 했지만 불이 너무 빠르게 번졌어요.

하녀들이 서글픈 얼굴로 비보를 전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홀아비가 된 집사님께 심심한 유감의 말을.

―이로써 우리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아직 방심하지 마, 도자기는 쉽게 타지 않아.

“……다들 너무 놀리는 거 아니에요?”

이비의 핀잔에 하녀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들에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환한 표정과 입 모양, 그리고 어깨의 떨림은 나지도 않은 웃음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발랄했다.

코앞에서 저택이 불타고 있는데 집사의 찻잔 사랑을 놀리기에 여념 없는 이 하녀들은 목에 하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그 표식은 그들이 탑의 지하에 갇혀 있었다는 증거였다.


―집사님께 꼭 전해 주세요.

―파손된 애인들은 우리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줬다고.

―이 기회에 방황을 마치고 인간 여자에게로 돌아오라는 말도요.

게다가 디에스를 향한 그들의 취급은 오늘도 묘했다.

밝게 웃으며 저택의 유일한 남자인 집사를 잘도 가지고 노는 이 여인들은, 과거 몸이 묶인 채 노래하던 지하의 소녀들이다.

이들은 2년 전 이비와 함께 탑의 지하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디에스처럼 이비와 생과 사를 함께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2년 전, 이비는 로히카와 내기를 하며 자신과 함께 갇혀 있던 소녀들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어차피 정화는 본인이 하니까 저들을 굳이 가둬 둘 필요가 뭐 있냐는 취지였다.

물론 이 요구 저변엔 낯선 티엔다 사교계에 자리 잡기 위해선 헌신적인 조력자들이 필요하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비의 그런 속내를 뻔히 아는 로히카는 그 소녀들을 순순히 풀어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자유예요. 이비가 성녀가 되든 지하로 돌아오든, 너희는 놓아줄게요. 다만 이비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면, 너흰 다 지하로 돌아오게 될 거야.

덕분에 이비와 이들의 관계는 다소 묘하다.

이 여인들은 이비와 같은 처지로 탑에 갇혔던 동료이자 전우.

이비의 반항으로 덩달아 자유를 누리게 된 수혜자.

동시에 이비의 일거수일투족을 탑주에게 보고하는 밀정이었다.


―누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 같아요.

―불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게 조치는 해 뒀어요.

―이건 누구 짓이에요?

“몬트라 후작 같아요.”

하녀들의 물음에 이비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자 하녀들도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럼 후작과 가신들의 집에서 일하는 자매들에게 연락해 볼까요?

―방화를 누구에게 사주했는지 알아볼게요.

―후작의 동선도 조사해 놓을게요.

역시나 빠릿빠릿한 하녀들을 보며 이비는 방긋 웃었다.

탑의 지하에서 노래하던 소녀의 수는 수백 명.

그들이 탑의 지하에서 나왔을 때 티엔다에 가벼운 유행이 돌았다. 창백한 살결과 목소리 없는 소녀들을 하녀로 들이는 지극히 귀족적인 유행이었다.

그래서 많은 귀족이 제 집안 한구석에 지하의 소녀들을 들여놓았다. 그들이 누구의 눈과 귀인지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네, 그리고 라우렐 대공과 바옌 공작의 동태도 같이 부탁할게요.”

이 하녀들은 이비의 동료이자 전우, 수혜자, 밀정. 그리고 곳곳에 심어진 이비의 눈과 귀였다.

이비는 절대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다. 대신 믿는다. 각 사람이 가진 입장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영리한 습성을.

그래서 이비는 이 하녀들도 믿었다. 어쨌든 이비가 성녀가 되어 티엔다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본인들에게도 가장 유리하니 말이다.

비록 운명을 같이하진 않지만, 지하의 자매들은 이비의 좋은 조력자였다.

***

하루아침에 저택이 타 버리는 바람에 이비는 당장 머물 곳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가까운 귀족에게 요령껏 몸을 의탁했겠지만, 지금은 등꽃제에서 저지른 일로 그러기도 어려웠다.

착하고 순진한 성녀 후보라면 모를까, 몬트라 후작에게 대들어 집까지 태워 먹은 이비를 받아 줄 귀족은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불가피하게 들어가고 말았다.


“잘도 기어들어 왔네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세드로의 소굴, 마냐냐 탑에.

이비가 탑의 빈방에 짐을 푸는데, 이비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어느 귀한 분이 이 누추한 곳까지 친히 강림하셨다.


“이비가 사고 쳤다는 얘기 들었어요. 역시 미엘이 예절 교육을 시켜 줄 걸 그랬어요.”

그는 독기로 반짝이는 연둣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 미엘 세드로였다.

미엘이 방으로 들어왔지만, 이비는 본 척도 안 하고 무심히 말했다.


“전에도 얘기한 것 같은데, 너 존댓말 진짜 안 어울려.”

“이비가 할 말은 아니잖아?”

미엘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신경질이 가득 담긴, 달콤하고도 살벌한 냉소였다.

로히카의 사촌이자 차기 탑주인 미엘 세드로는 이비가 티엔다 사교계에 등장하기 전부터 알던 사이다.

차기 탑주와 탑의 지하에 갇힌 노예로서 제법 오랜 악연을 맺고 있었다.


“이비 주제에 성녀라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어때? 그럼 미엘이 탑주가 됐을 때 돌봐 줄게. 물론 이비의 개는 처분할 거지만.”

“좀 나가 줄래? 나 바쁜데.”

“이 탑에 미엘이 못 있을 곳은 없어.”

이비가 나가라고 하자 미엘은 오히려 방을 가로질러 이비의 옆까지 왔다. 그러더니 아직 짐을 다 꺼내지 않은 이비의 가방을 발로 차서 엎어 버렸다.


“미엘의 것이 아닌 것도 없고. 그런데 이비는 왜 주제 파악을 못 하지?”

가방이 뒤집히며 이비의 옷이 쏟아졌다.

이비는 그 꼴에 화를 내는 대신 옷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미엘이 이비의 옷가지를 밟아 버렸다.


 


“……발 좀 치우지?”

“그보다 미엘, 이비에게 궁금한 거 있어.”

작고 예쁜 구두로 이비의 옷을 지그시 밟으며, 미엘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성녀가 못 될 것 같으니까 시온한테 꼬리 치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