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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조금 나중의 시온 (62/129)


62화. 조금 나중의 시온
2023.01.02.


아마네세르와 열여섯 번째 교전을 마친 직후였다.

경계의 한복판에 선, 열아홉 살의 시온은 넘실대는 혼란 속에서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아, 아악……!”

저주가 풀려 상처를 자각한 시온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울부짖었다.


“진정하고 숨 쉬어.”

그때 누군가가 시온을 일으켜 세우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러곤 숨을 쉴 수 있게 그의 턱을 받쳐 주었다.

시온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일으킨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장신의 남자였다.


“넌 대체…….”

시온의 물음에 남자가 후드를 걷었다.

그리고 시온은 또 한 번 무너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뭐야, 너…….”

“시온 라우렐.”

남자가 옅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시온은 그 말이 자신을 부른 것인지, 아니면 물음에 대한 대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 드러난 그 남자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충격으로 말을 잃은 시온에게 남자가 나직이 덧붙였다.


“나는 너야. 조금 나중의.”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시온은 또 한 번 격한 거부감을 느꼈다.

시온은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저렇게 친절한 척, 좋은 사람인 척 말하는 건 그의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시온은 제 어깨를 잡은 남자의 손을 반사적으로 쳐냈다. 그러곤 정처 없이 떠도는 시선으로 그의 모습을 조각조각 살폈다.

그는 시온보다 키가 반 뼘은 더 컸다. 어깨도 넓고 얼굴선도 날렵했다. 아직 소년인 시온과 달리 그는 완연한 청년이었다. 그는 정말 ‘조금 나중’의 시온이었다.

그런데 찬란한 금발을 가진 시온과 달리 허리까지 늘어진 그의 머리카락은 달처럼 하얗게 세어 있었다.

시온이 남자의 백발을 노려보자 그가 자신의 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시간을 거슬렀더니 이렇게 됐어.”

남자의 가벼운 설명에 시온은 또 한 번 버거움을 느꼈다.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악몽이라도 꾸나? 혹시 악마가 농간을 부리는 건가?

셋 다 아니라면, 네가 정말 시간을 거슬러 찾아온 나라면…… 너는 날 도우러 온 건가?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시온에게 남자가 말했다.


“방금 막 저주가 풀려서 정신이 없을 거야.”

“저주?”

“네 친부가 건 불퇴의 저주. 네가 경계에 온 날부터 시작된 거야.”

남자는 여상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온에게 알려 주었다.

영광스러운 라우렐의 얄팍한 이면을, 라우렐 백작의 진짜 용도를.

아무 준비 없이 진실과 마주한 소년은 멍하니 서서 남자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머리보다 먼저 심장이 반응했다. 갈비뼈 안에 갇혀 있던 박동이 어느새 온몸을 쿵쾅쿵쾅 내리치고 있었다.

들끓는 분노가 소년을 덮쳤다. 어금니와 주먹이 으스러지게 맞물리고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다시 쏟아졌다.

시온이 어디론가 뛰쳐나가려 하자 남자가 붙잡았다.


“진정해, 상처 벌어지게 하지 말고.”

“이거 놔!”

“내 말 먼저 들어. 시간이 별로 없어.”

“다 죽여버릴 거야!”

시온 라우렐은 왕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제왕이 되고자 무거운 왕관을 썼으나, 그것이 왕관이 아니라 산 제물의 푯말이라는 걸 너덜너덜 찢긴 채 알게 되었다.

긍지 높은 소년은 자신의 비참함을 숨기기 위해 차라리 분노했다. 자신을 속이고 유린한 것들에게 증오를 쏟아 내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시온이 그렇게 격정을 토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말했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돼. 친부든 이복형이든, 그래도 큰 문제는 없어.”

단정 짓는 남자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던 시온은 도리어 덜컥 얼어붙었다.

그래도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은, 이미 죽여 봤다는 뜻인가?

섬뜩한 가정에 시온은 살의를 잊고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다정한 사람인 척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잘 보니 그 표정이 지독하게 어색했다. 그의 웃음은 가면보다 기괴하게 들뜬 거짓말 같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머리가 차가워지며 오싹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쳤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시온은 왠지 저 남자가 자신과 매우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일말의 믿음은 있었다. 네가 정말 나라면, 너는 내 편이겠지.

시온은 애써 이렇게 믿으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게 부탁이 있어.”

이윽고 남자가 말했다.


“이비를 지켜 줘.”

그래서 시온은 또 한 번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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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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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배신당하고 세상에 배신당한 시온 라우렐이 자기 자신에게도 배신당한 지 어언 5년.

덕분에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뼈저리게 알게 된 시온은, 오늘도 그저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루 치의 숨을 쉬고 있었다.

대열을 갖춘 수십 마리의 붉은 용이 비스 동부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시온과 경계의 감시자들을 태운 타르데스의 따님들이었다.

경계의 감시자들은 타르데스의 따님께 고삐와 안장을 채울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의 적과 맞서는 그들의 특권이었고, 그래서 감시자들은 비스와 티엔다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티엔다에서 곧장 동녘으로 날아온 시온과 감시자들 앞에 동쪽 산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르데스 전당은 저 산맥 안쪽에 있고, 저 산맥 너머엔 아마네세르가 자리를 튼 동녘의 경계가 있다.


‘경계를 돌아보겠다. 혼자.’

전당이 가까워지자 시온이 뒤따라오는 모렌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모렌은 상관의 뜻을 알아듣고 감시자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시온은 편대에서 벗어나 홀로 동쪽 산맥으로 향했다.

산맥을 넘자 거짓말 같은 흑색의 영역이 드러났다.

저 광활한 영토엔 공간감도 현실감도 없었다. 마치 밤하늘을 베어다가 땅에 펴 발라 놓은 것처럼 다만 기괴했다. 세상이 찢어져 그 뒷면이 드러난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의 이해와 인지를 뛰어넘는 저곳이 바로 아마네세르가 도사리는 경계였다.

시온은 제 짝인 타르데스의 딸과 함께 그 땅에 내려섰다. 땅을 밟는 느낌은 발로 숯을 으깨는 느낌과 비슷했다.

이 땅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온은 홀로 알고 있었다.

그 남자, 결코 미래의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자가 이 역시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네세르를 가두는 저주.’

이 검은 영역의 정체는 미친 용을 가두는 저주였다.

저주의 근원인 노체는 아마네세르를 미치게 만든 걸로는 모자란 지, 이런 형틀로 그 용을 가둬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저주는 머지않은 미래에 사라질 것이다.

그 남자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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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를 지켜 줘.”

“이비……?”

“나를, 아니. 너를 구할 사람이야.”

낯선 이름을 되뇌는 시온에게 남자가 말했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네 전부가 될 사람이야.”

그 말에 시온은 또 한 번 얼어붙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듯 다른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잔뜩 쉰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자야?”

시온의 물음에 남자가 끄덕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눈을 깜빡이던 시온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고작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여자 하나 때문에?”

“말조심해.”

시온이 어처구니가 없어 따지는데 무형의 압박이 그를 쿵 내리찍었다.


“고작 하나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남자의 경고는 차분하고 온화했다. 그러나 시온은 그 뒤에 도사린 흉포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숨이 막혔지만 시온은 물러나지 않았다. 잠자코 수긍하자니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고작 하나가 아니면 뭔데, 여자가 그렇게 없냐?”

시온이 악에 받쳐 한 말에 남자가 웃으며 시온의 뺨을 갈겼다. 그러고도 모자라 반격하는 시온을 손쉽게 제압하고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처음이지? 서열 정리당하는 거.”

남자가 바닥을 기는 시온에게 물었다. 시온이 이를 악물고 쳐다보자 그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 나도 안 당해 봤어.”

그는 자기 자신을 두드려 팰 수 있어서 매우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 미친놈…….”

남자에게 걷어차인 시온이 마른기침을 토하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남자는 화내지 않았고, 그게 시온을 더 미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라우렐의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친부와 가문으로부터 철저히 이용당한 사실을 방금 막 깨달았다.

덕분에 안 그래도 벼랑 끝인데 이 와중에 찾아온 남자는, 나중의 나는 내게 여자를 지켜 달라고 한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름을 들먹이면서.

시온은 이 사실이 죽도록 야속했다. 내가 아니라 그 여자를 먼저 챙기는 내가 미치도록 미웠다.

너는 날 먼저 생각해야지. 온 세상이 등을 돌려도 너는, 너만은!

시온은 이렇게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무감한 눈을 본 순간 모든 말이 입안에서 사라졌다.

저 남자는 시온에게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애정은커녕 연민도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용무를 위해 찾아온 양 무정하고 무감할 뿐이었다.


“납득이 안 되면 그냥 빚이라고 생각해. 움직일 이유가 정 필요하다면.”

심장이 베인 표정을 짓는 시온에게 그 남자가 말했다.


“내가 여기 오지 않았으면 너는 나랑 똑같은 인간이 됐을 거야. 그건 싫잖아.”

그 말에 시온은 억지로 웃었다. 잔뜩 비틀린 냉소였다.

시온은 간신히 이해했다. 저 미치광이가 나와 다른 존재인 것을. 그러니 이 역시 빚으로 달아야 마땅한 것을. 그걸로 저것과 분리될 수 있다면 절대 손해 보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데.”

“이비를 돌봐 줘. 같이 지내면서 아껴주고 잘해 줘. 그리고 지켜 줘.”

사납게 이를 갈던 시온은 남자의 애틋한 개소리에 얼굴을 더 일그러트렸다.

그러자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새카만 땅을 발로 툭툭 찼다.


“이거, 뭔지 모르지?”

모른다. 이 검은 영역의 정체는 지난 300년 동안 미지였다.

그런데 남자가 그 오랜 비밀의 실체를 아주 가볍게 폭로했다.


“이건 저주야. 아마네세르를 가두기 위한. 추락한 아마네세르가 한 달 동안 잠드는 건 이 땅에 걸린 저주 때문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

남자는 여상히 담담하게 말했다. 꼭 그런 목소리로 종말을 예고했다.


“이건 곧 사라질 거야. 그럼 아마네세르도 여길 벗어나고, 그 후엔 무슨 수를 써도 못 막아. 몇 번이나 죽였지만 끈질기게 되살아나서 다 망쳐 버렸어. 그 미친 용이.”

침착한 척 말하는 남자의 음성엔 서늘한 광기가 맺혀 있었다. 그래서 시온은 또 한 번 가슴이 선뜩해졌다.

아마네세르가 동녘에서 풀려난다는 말도, 저 남자가 아마네세르를 죽였다는 말도 하나같이 충격적이고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시온을 오싹하게 만든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그 얘길 왜 지금 해?”

순서가 이상하다. 보통은 이 얘길 먼저 해야 하지 않나? 미친 용이 가까운 미래에 풀려나니 대비하라고.

시온이 의문을 품고 바라보자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비가 사는 세상에 그런 게 날뛰면 안 되니까.”

남자의 다정한 말에 시온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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