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왜 도망쳐?
(61/129)
61화. 왜 도망쳐?
(61/129)
61화. 왜 도망쳐?
2022.12.29.
“백작님은 나중에 생길 일을, 미래를 알고 계신 건가요?”
이비가 망설임을 감추며 묻자 시온의 눈이 커졌다.
늘 싸늘하던 백작이 그토록 놀라는 모습에 평정을 가장하던 이비의 눈동자도 크게 흔들렸다.
이비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가 아닌 척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폐부에 차오른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명백한 동요가 가쁜 호흡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저 나중에 다시 올게요, 급한 일이 생각나서……!”
결국 이비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후 단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며 도망치려던 이비를 시온이 반사적으로 붙잡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일어난 시온이 이비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 바람에 이비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이비가 맥없이 앉아 버리자 시온이 어깨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그 손은 멀리 가지 않고 이비의 머리 옆, 소파의 등받이를 짚었다. 결국 이비는 소파와 그의 두 팔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억지로 붙들렸지만, 이비는 시온에게 항의할 수 없었다. 항의는커녕 자신을 도로 앉힌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비가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피하자 단단한 나무 뼈대를 가진 소파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시온의 손아귀에서 나무와 가죽으로 된 가구가 비틀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이비가 어깨를 더 움츠렸지만, 시온은 팔을 거두지 않았다.
‘왜?’
그는 대신 소리 없이 물었다.
‘말 꺼낸 건 너잖아, 그런데 왜 도망쳐?’
네가 한 예측이다. 네 발로 찾아와서 네 입으로 꺼낸 말이다. 그런데 왜 놀라고 왜 당황하고 왜 도망치려 드는 건데.
방금 이비를 붙잡은 건 시온의 이성이 아닌 직감이었다.
날 선 직감이 등줄기를 훑는 감각에 그는 몸을 먼저 움직였고, 그로써 이비가 팔 아래 놓이자 그제야 의문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오늘의 이비 아리아테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제 앞가림이 급한 상황일 텐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그게 저주 때문이라면 성녀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야 하는데 정작 그 이야기는 빠르게 넘겼다. 그러면서 곧장 자기 차례라며 화제를 돌렸고, 변명하듯 서론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래 놓고 혼자 무언가 확인한 듯 몸을 빼려고 한다.
오늘의 이비 아리아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수상했고, 그래서 시온은 앞서 한 질문을 나직이 반복했다.
“……나한테 할 말 없습니까?”
“무한히 많아요.”
불가피하게 실토하는 이비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이비는 제 대답에 눈을 질끈 감더니, 옅은 한숨을 내뱉고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이비가 고개를 꺾듯이 들어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로써 이비를 마주 보게 된 시온은 그만 탄식할 뻔했다.
다시 드러난 이비의 두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성큼 찾아온 진실에 놀라 그것을 마주할지 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제 앞의 사람이 누군지 조차 몰라 어지러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온도 묘한 탈력감을 느꼈다.
그 역시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간절히 원했다. 이비가 이 숨 막히는 비밀을 제발 산산조각 내 주기를, 정녕 간절히 빌었다.
그래서 시온은 동요를 삼키고 이비에게 다시 물었다.
“내가 누…….”
“잠깐!”
“윽!”
그런데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이비가 버럭 소리치며 그의 턱을 닫아 버렸다.
이비는 무슨 열린 서랍 닫듯이 그의 턱을 힘껏 올려 쳤고, 그 바람에 혀를 깨물 뻔한 시온은 놀라서 굳었다가 곧바로 성질을 냈다.
“이게 뭐 하는 짓……!”
“안 돼! 싫어! 하지 마!”
그러자 이비는 시온이 윽박지르지도 못하게 기겁하며 소리쳤다. 덕분에 시온도 덩달아 당황했다.
“조용히……!”
“아냐! 나는 아직…… 읍!”
이비가 마구 소리치자 보다 못한 시온이 이비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이비는 턱을 붙잡는 손길에 또 한 번 질겁했다가, 시온이 자신이 아니라 문 쪽을 보고 있는 걸 깨닫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이비의 목소리가 꽤 컸다. 그런데 문밖은 여전히 조용했고, 시온은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안도하는 게 아니라 울화를 참기 위해서였다.
통상 이 정도 소리가 나면 누구든 문을 박차고 들어와 각하의 안전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안 나타나는 건, 오히려 저렇게 쥐 죽은 듯 조용하다는 건 저 밖에 있는 자들이 방금 이비가 낸 소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시온 라우렐의 명예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드디어 진창에 처박혔다는 의미였다.
모렌 아르코를 비롯한 감시자들이 저 밖에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이 총체적 난국에 시온은 이비를 스산하게 내려다봤다. 이비도 뒤늦게 아차 싶은지 그를 공손히 바라보았다. 물론 시온은 이런 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사람을 어디까지 망신 줄 셈이야…….”
“음……. 으으읍……!”
이비가 웃으며 얼버무리려 하자 시온이 이비의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이비가 아프다고 발버둥 쳤지만 시온은 쉽게 놔주지 않았고, 그려다 결국 까이고 물려 버렸다.
겸허함을 모르는 이비는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백작님의 정강이를 차고 손을 물어 그를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더니 또 붙잡힐세라 그에게서 멀찍이 달아나 속삭였다.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유령이 나왔다고 해 보세요! 그럼 건투를 빌어요!”
이비는 그 말을 남긴 채 천장의 비밀통로로 신속히 올라갔고, 시온은 저걸 도로 끌어내릴까 하다가 부리나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그냥 관뒀다.
이비가 천장 너머로 떠나고 방에 혼자 남은 시온은 제 손에 남은 잇자국을 쳐다봤다.
황당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까 이비가 시온의 턱을 후려쳐서 입을 틀어막았을 때, 시온은 이렇게 물어보려고 했다.
‘내가 누군지 안 거야?’
그런데 이비는 시온이 무슨 질문을 할지 이미 아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달아났다.
참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그때 이미 시온은 대답이 필요 없었다.
저 질문을 시작할 수 있던 것,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시온은 아까 이비가 그랬던 것처럼 숨을 크게 마셨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에 혼란과 열망, 그리고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이비 아리아테가 그를 가두고 있던 비밀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그를 미치게 하던 고독이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었다.
.
.
.
같은 시간, 방으로 되돌아온 이비는 제게 묻은 먼지를 털 생각도 못 하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은 탓이었다.
이비는 지난 새벽 자신이 들은 목소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백작을 찾아갔고 목적을 이뤘다. 그리고 도리어 혼란에 빠졌다.
“거짓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이비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
시온이 이비를 곱게 보내 준 건 이비에게 시간이 필요한 걸 알기 때문이다.
이비가 무언가 눈치챈 걸 알았을 때, 시온 역시 일순 거부감을 느꼈다.
그건 사실을 확인한 이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이었다.
모든 걸 아는 본인조차 이런데 아무것도 몰랐던 이비는 훨씬 더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시온은 조각난 배려심을 끌어모아 이비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래는 아니고 딱 세 시간 정도만.
하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은 이비 아리아테는 시온의 희소한 배려심을 원래 모양보다 더 잘게 박살 내 주었다.
“이비 아리아테는 한 시간 전에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도망쳤구나.’
모렌의 보고에 시온은 혈압의 상승을 느꼈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잡으러 갈까 생각하는데, 모렌이 넌지시 물었다.
“전당으로는 언제쯤 복귀하시겠습니까?”
일정을 묻는 모렌을 보며 시온은 이제 경계로 돌아갈 시간인 걸 깨달았다.
이비가 별장을 떠났다는 얘기도 이러려고 꺼낸 모양이다. 너의 한 떨기 꽃은 이제 여기 없으니 우리도 그만 일하러 가자고 말이다.
시온은 이 가당치 않은 취급에 혀를 차면서도 모렌의 의도에는 동의했다.
아마네세르를 잠재운 지도 어느새 3주가 지났다. 더는 경계를 비울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전당으로 돌아가 아마네세르의 기상에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자니 영 내키지 않았다.
이비의 집사는 지금 비스 남동부에 있다. 그리고 이비는 어제 카셀 몬트라와 완벽한 대립각을 세웠다. 집사인지 호위인지 모를 것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이비가 걸렸다.
이비에겐 탑의 비호가 있으니 카셀 몬트라가 함부로 손을 대진 못하겠지만, 인간이라는 게 항상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카셀 몬트라는?”
“후작은 오전에 이미 떠났습니다. 아리아테와 접견 후 곧장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가는 길이 겹칠 일은 없겠다.
게다가 거대한 호수 주변을 도는 티엔다의 도로는 완벽하게 개방되어 있다. 비스의 으슥한 산길이나 숲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니 이비의 귀갓길까지 염려하는 건 괜한 짓일 것이다.
시온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눈치 빠른 모렌은 상관이 알고 싶어 할 만한 소식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리고 어제저녁 몬테라 후작을 음해한 게 이비 아리아테인 걸 귀족들이 대부분 알게 됐습니다. 제 동생에게 듣기로는 아리아테와 친밀한 자들도 다들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크게 놀랐다는 건 모렌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귀족들은 단지 놀란 게 아니라 격분했다. 천사처럼 굴던 소녀가 비열한 모사꾼인 걸 알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온화한 자들은 무섭다고 에둘렀고 솔직한 자들은 가증스럽다고 말했다.
이비의 절친한 친구이자 매사에 물러터진 아르코 영식마저도 ‘부디 오해이길 바라지만,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아리아테 양과의 우정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무리 대귀족이라도 많은 귀족의 목소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이비 아리아테가 성녀가 될 일은 이제 정말 요원해진 셈이었다.
모렌은 이렇게 생각하며 고했지만, 정작 시온은 부관의 짐작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할 이비가 아니다. 애당초 속셈이 있으니 저지른 걸 테고, 분명 또 무슨 일을 꾸밀 거다. 그리고 보란 듯이 판을 뒤집겠지.
그 불굴의 의지에는 경의를 표하나, 시온은 그 전에 이비가 자신에 대한 것을 먼저 확인해 주기를 바랐다.
이렇게 도망치지 말고.
“우리도 복귀한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사령관이 반갑게 경례하고 돌아섰다.
경계로 돌아가면 시온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 정도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결국 아까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이 갑갑했지만 시온은 제 의무를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서 다만 바랐다. 그가 돌아왔을 때 이비가 더는 도망치지 않기를.
그걸 더 기다리고 참아 주기에 그가 몸부림친 시간은 이미 너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