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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무한히 많아요! (60/129)


60화. 무한히 많아요!
202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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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질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별로 따지고 싶지 않았는데, 듣다 보니 어이가 없어서 시온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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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하고 무책임한 것보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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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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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 아리아테가 새가 아니라 사람인 점은 차치하더라도, 본인도 성녀면서 다음 성녀의 구원 운운하는 것이 비굴하고 무책임한 게 아니면 무엇인지.”

시온이 귀찮음을 참고 내뱉은 말은 어투만 경어일 뿐, 그 내용과 어조는 반말보다 못했다.

그에 성녀의 베일이 잠시 흔들렸다. 처세와 품행으로는 한 번도 흠 잡힌 적 없는 성녀는 이 직설에 크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녀는, 고결한 탑의 상징은 곧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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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사정을 온전히 고하지 못하는 제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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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사정에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시온은 성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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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내막이 어떻든 본인의 과업을 미룬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성녀는 부정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온은 자신이 예리한 지적으로 성녀의 말문을 막았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성녀 역시 대귀족 앞에서 비굴할 의무가 있기에 침묵할 뿐, 아마 속으로는 온갖 항변을 토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온은 억지로 서슬을 누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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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십시오. 말할 용기가 없다면 이만 일어나도 좋습니다.”

제왕의 자비에 성녀의 어깨가 눈에 보이게 오르내렸다.

시온은 성녀가 이대로 자리를 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성녀는 그 자리에 버티며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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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의 말씀에 틀림은 없습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말은 저와 아리아테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저 비천한 제가 신의 은총을 받는 자와 어찌 같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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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하다고 변명하기엔 성녀님의 위치가 그리 낮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작은 끝까지 완고했고, 이 지독한 태도에 성녀 로블레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물었다.

로블레는 라우렐 백작이 아리아테를 서툴게 사랑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나서 본 건데, 역시 대귀족은 대귀족이었다. 시온 라우렐은 로히카 세드로 못지않게 냉철한 존재였다.

그래서 로블레는 애써 낸 용기를 무력하게 갈무리했다. 그러곤 저 잔혹한 백작을 속으로 원망했다.

비굴하고 무책임하다니,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 잔인한 말만 내뱉는단 말인가. 무력한 자가 다른 특별한 이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 정녕 잘못인가?

나는 아리아테가 성녀가 되길 소망할 뿐인데,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인데, 소중한 동생에게 경멸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인데.

로블레는 백작의 원색적인 비난을 견디기 위해 힘겹게 마음을 추슬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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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물이었나.’

그리고 연약한 성녀님을 괴롭힌 무도한 백작, 시온은 이 상황에 상당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이비가 성녀를 의심하기에 시온도 성녀가 어떤 속내를 가진 사람인지 내심 궁금했다.

그래서 성녀가 하는 말을 찬찬히 듣다가, 그는 뜻밖에도 효심을 회복했다. 곱지 않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재평가하게 된 것이다.

선대 라우렐 대공은 자식을 철저히 이용해 먹은 최악의 부모였지만, 적어도 마지막 순간엔 목숨을 걸었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던 건 둘째치더라도 어쨌든 책임과 의무를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셈이었다.

그런데 저 로블레 투하는 울타리 안의 꽃밭에서 대체 무슨 형편 좋은 소릴 하는 건지.

만약 성녀가 어제 몬트라 후작을 만났다면, 그래서 그 작자의 시답잖은 변덕에 간언이라도 했다면 시온도 오늘 성녀의 말에 조금은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성녀는 머리카락 한 올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 놓고 여기서 대공을 설득해 달라고 운을 떼니 시온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제멋대로인 몬트라 후작에게 참견해서 수모를 당할 바에야, 이비 아리아테에게 반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백작에게 그대가 사랑하는 소녀를 날려 보내 주십사 청하는 쪽이 더 안전하고 고상하다고 판단한 거다.

시온은 자신이 몬트라 후작보다 비빌 만하다고 여겨진 것도 웃겼고, 저토록 건재한 성녀가 탑의 구원 운운하는 것도 정녕 웃겼다.

여태 최선을 다해 자리를 보전해 왔으면서 이제 와서 마음만은 편치 않았다고 고백해 봤자.

그렇게 언제나 괜찮았던 성녀가 단 한 번도 괜찮지 않았다는 이비 아리아테를 구원자로 지목하니, 이래서야 저 성녀가 바라는 구원의 정체부터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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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처 모르던 것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성녀가 침묵 끝에 발을 뺐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당연한 결말인데 다소 맥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원인을 찾다가, 불굴의 이비를 떠올리고 한숨을 삼켰다.

아마 이비라면 그게 제일 높은 데 있는 네가 할 소리냐며 따졌을 텐데. 다행히도 성녀는 그렇게 뒤가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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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말로 성녀님의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시온은 성녀의 굴복에 화답하고서 적당한 말로 자리를 파했다.

그 후 갑갑한 온실에서 빠져나왔지만, 기분은 여전히 저조했다.

역시 이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그런 주제에 잔뜩 얽히고설켜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한 근거를 갖췄다.

살짝만 건드려도 균형이 무너지는 악랄한 인과의 더미처럼.

그래서 감히 손댈 수 없는 괴물은 무심하게 굴러가며 수많은 삶을 저미고 으깬다.

아무 가책도 없이, 참으로 뻔뻔하게.

그리고 인간은 그 안에서 부지런히 자리를 잡는다. 무력하게 저며지는 자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누리는 자, 그리고 자신은 상관없는 척 부스러기를 취하는 자.

단지 비겁할 뿐 모난 구석 없는 성녀는 마지막에 속하는 자였다. 마음씨 착한 방관자.

그들은 대체로 자신이 무고하다고 믿는다. 묻어 둔 사실을 들이밀면 부끄러워하는 시늉도 한다. 하지만 그뿐,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쉽게 자신을 위로한다.

그래서 시온은 서로의 연약함을 두둔하는 자들을 대신해 그 착한 성녀를 통렬히 싫어하기로 했다.

역시 그는 티엔다의 모든 것이 진절머리나게 싫었다.

***

기분이 나쁘다.

티엔다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 사태의 원흉은 이비 아리아테.

시온은 지극히 합당한 이유로 이비에게 이를 갈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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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백작님.”

그리고 그곳에서 예정도 예고도 없이 이비를 만났다.

안 그래도 심기 불편 상태인 시온이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듯 쳐다보자, 이비가 착실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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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통로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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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이 그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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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은 잘 만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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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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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백작님 꼴도 그래 보여요.”

이비는 시온의 말을 똑같이 받아치고 웃었다. 그러면서 울컥해서 노려보는 시온의 시선을 요령 좋게 피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올까 봐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이비가 조르르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겉옷을 아직 반밖에 벗지 못한 시온을 채근했다.

시온이 마지못해 와서 앉자 이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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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어요?”

그 모습에 괜히 울컥한 건 시온의 성격이 나쁘다는 증거였다.

평범하게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일이 이비에게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헤아리겠지만, 배려도 양보도 좋아하지 않는 시온은 지난 새벽의 일을 먼저 떠올렸다.

오늘 새벽, 덜덜 떨며 잠든 이비를 방으로 모시느라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투하 가문의 별장을 헤매야 했다.

그렇게 곱게 눕혀 드렸으니 야외에서 잠들어 침실에서 눈을 뜬 쪽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묻기라도 해야 하는데 저 이비 아리아테는 간밤의 일을 깔끔히 잊어버렸다.

시온 라우렐은 인사치레를 귀찮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건 꽤 괘씸해 일부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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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나한테 할 말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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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많아요.”

무한히?

예상 밖의 대답에 시온이 이비를 쳐다봤다. 그러자 이비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에 잠시 커졌던 시온의 눈이 도로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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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시치미를 떼고 있었네.’

속이는 게 일이지,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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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가느다란 시선에 난감해하던 이비가 소파를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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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말에 집중해 주세요!”

민망함 때문인지 자존심 때문인지 이비가 괜히 성을 냈고, 시온은 그 모습이 꽤 웃겼지만 아닌 척 손가락을 입에 댔다. 그러곤 문을 눈짓했다. 밖에 감시자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목소리를 낮추라는 뜻이었다.

이비는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가 어쩐지 분한 얼굴로 시온을 노려봤다. 그래서 반대로 시온은 이비의 괘씸함을 선처해 주기로 했다.

한차례 실랑이 후, 이비가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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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성녀가 제 저주에 대해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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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전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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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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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그 방면으로는 아는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주를 걸기는커녕 오히려 당신의 신봉자였지. 시온은 이 말을 하려다 참았다.

그리고 이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상황에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다시 힐끗 눈을 들어 시온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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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쳐다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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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이 거짓말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서요.”

이비는 그 한마디로 시온을 열 받게 해 놓고 다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이비는 오늘도 조용히 절박했다. 그래서 시온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덩달아 심란해졌다.

로히카 세드로의 성미를 떠올리면 이비가 성녀 자리에 저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짐작은 된다.

그래서 절박한 건 이해한다만 좀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너는 아무도 믿지 않으니 결국 내가 할 일은 네가 더 발버둥 치지 못하게 가둬 두는 것뿐인데, 네가 그렇게까지 불굴이면 피차 불편해질 테니까.

그럼 이렇게 마주 앉지도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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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요. 결국 원점이지만 그래도 확인은 됐어요.”

이비가 담담히 추스르며 인사했다. 그러더니 아까처럼 말짱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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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제가 백작님을 도울 차례죠?”

그 전에 어제 일은?

시온은 걸고넘어지려다가 생색내는 인간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어차피 할 말이 무한히 많다고 하니 천천히 듣다 보면 나오겠지.

시온이 이렇게 생각하며 끄덕이자, 이비가 평소보다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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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이 저한테 알아내라고 한 비밀은 백작님 외엔 아무도 모르는 거겠죠? 만약 아는 사람이 있다면 백작님이 이미 끌고 다니며 실토하게 만들었을 테니까요.”

이비의 추정에 시온은 재차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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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백작님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까 제게 알아내라고 한 거고요.”

역시 이비는 잘도 짚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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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큰일을 이렇게 아무도 모를 수는 없을 거예요. 조짐이든 흔적이든 다른 사람도 발견해야 정상이죠. 그러니까 혹시 백작님은…….”

다만 오늘따라 서론이 길었다. 결론부터 툭 던져서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평소와 다르게.

그래서 시온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이비를 쳐다봤다.

그러자 이비가 돌연 시선을 피했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시온은 거기서 묘한 경직을 느꼈다.

시온의 직감이 움직일 때, 이비가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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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은 나중에 생길 일을, 미래를 알고 계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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