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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위대하고 원망스러운 (59/129)


59화. 위대하고 원망스러운
2022.12.22.


소녀는 기적을 일으키고 탑 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 뒤로 남겨진 귀족들은 멍하니 서서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이것이 꿈인지, 환상인지, 혹은 다 함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건지.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나비처럼 추락하는 리본이 그 공간에 남아 소녀의 존재를 현실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하늘대는 리본이 호수에 앉을 때까지 눈으로 좇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 소녀를 찾아 나섰다.

성녀 로블레 투하의 78번째 정화식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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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정화식은 그렇게 끝났다.

정체 모를 소녀의 노래, 그리고 그 소녀를 찾으려는 귀족들의 흥분. 그 두 가지로 뒤덮여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그날 기적을 목도한 자들은 마치 신을 찾듯 그 소녀를 찾았다.

시종을 다그치는 것으로 부족해서 직접 탑으로 달려 올라가거나 호수로 뛰어들어 리본을 건져 낸 자들도 있었다.

나아가 그 자리에 있던 라우렐 대공을 비롯한 대귀족들은 탑주에게 직접 그 소녀의 정체를 물었다.

이러니 천하의 로히카 세드로도 이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만약 탑에서 시치미를 떼고 입을 다물면 귀족들은 그 소녀가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 그 하얀 리본을 조사해 실의 출처까지 추적할 작정이었다.

이처럼 티엔다 전역이 떠들썩한 가운데, 로블레도 조용히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이비?”

로블레는 시종이 고한 이름을 듣고 시선을 옆으로 두었다. 그러다 곧 한 소녀를 떠올렸다.


“탑주님이 직접 비스에 데려온 아이를 말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아직 살아 있었나?”

시종의 대답에 로블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댔다. 그러곤 황급히 입을 닫았다. 제 자신이 너무 지독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 애가 지하에 얼마나 있었지?”

“3년 반입니다.”

시종이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이후 로블레가 듣게 된 이야기는 모조리 가관이었다.

3년 전, 지하의 골칫거리였던 이비는 결국 탑주와 극적으로 타협했다.

듣자 하니 간절히 찾는 사람이 있어, 이비가 말을 잘 들으면 탑주가 그 사람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탑주는 그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지하에서 3년을 채운 이비를 놓아주려 하지도 않았다.


“이걸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 애는 탑에서 벗어나면 탑주님의 지원을 받아 누굴 찾아다닐 작정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비스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니 그간 참고 있던 게 터진 거죠.”

그 가련한 무기수는 탑주가 자신을 놓아줄 마음이 전혀 없는 걸 깨닫자마자 처음 지하에 왔을 때보다 더 독하게 반항했다.

그러더니 기어이 탑에서 도망쳤다. 남몰래 친하게 지내던 로히카의 사냥개 한 마리와 함께 말이다.

이 기막힌 상황에 지하가 발칵 뒤집혔다. 탑주는 격분해서 다른 사냥개들을 풀었다.

그로써 이비와 배신자는 달아난 지 한 달 만에 비스에서 도로 붙잡혔다.

그 후 소중한 소녀는 상냥하게 감금되었지만, 괘씸하고 대체가 가능한 사냥개는 무자비하게 찢겼다.


“눈을 파내고 숨만 붙여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치료부터 했습니다. 이미 성한 곳이 없어 그냥 두면 죽을 지경이어서…….”

“그만.”

로블레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시종의 말을 막았다. 그래서 시종은 고개를 조아리며 손을 떨었다.

탑의 지하엔 죽음이 빈번하고 피가 흐르는 일도 잦았다. 그러니 이 시종도 겨우 이런 명령으로 겁을 먹을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이토록 위축된 것은 탑주인 로히카 세드로의 숨 막히는 분노 때문이었다.

탑주는 제 사냥개들을 퍽 아꼈다. 자신의 수족과 다름없는 데다가, 전부 어렵게 기르고 길들인 것들이라 상당한 애착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감히 배신했으니, 탑주는 보기 드물게 화를 냈고 이 일로 지하는 내내 살얼음판이었다.


“탑주님께선 왜 그자의 숨을 붙여 두라고 하신 거지?”

“그게, 원래는 이비를 길들이는 데 쓰려고 하셨습니다.”

탑주는 자신을 물고 도망친 개를 살려 둘 만큼 너그러운 주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사냥개의 목을 아직 꺾지 않은 건, 이비가 그자를 친 오라비처럼 따르기 때문이었다.

로히카는 이비를 온전히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 어린 것이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고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며 끝내 고집을 부리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못쓰게 된 사냥개로 이비에게 목줄을 채울 셈이었다.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매달리는 모양이니, 저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개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리라.

탑주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비가 그걸 알고 한발 먼저 움직인 겁니다.”

“정화식 때의 일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걸로 복수라도 한 것인가?”

로블레는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비가 귀족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로히카가 난처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벌레도 밟으면 꿈틀댄다는 걸 보여 주려고 한 걸까?

로블레는 이렇게만 생각했고, 그래서 이어진 말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아닙니다. 그건 복수가 아니라 거래를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포석?”

“어제 이비가 탑주님께 성녀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상상도 못한 말에 로블레의 눈이 커졌다.

시종의 말대로 이비는 싸늘히 분노하는 탑주에게 찾아가 제안했다.

이제 티엔다의 귀족들이 나를 찾을 거예요. 어차피 숨길 수 없으니 날 소개해 주세요. 그럼 물을 정화하고 탑의 비밀도 숨겨 줄게요. 내가 성녀가 되어서요.


“대신 그 사냥개를 건들지 말라고 요구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탑주님이 그걸 허락하셨나?”

“조건부로 수락하셨습니다. 비스 출신인 것을 밝히고 스스로 지지를 얻어 성녀가 된다면 곱게 놓아주기로 말입니다. 이비도, 그 사냥개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에 로블레는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성녀가 되겠다니. 왜 하필 성녀인 거지?

로블레는 그들의 거래를 곱씹으며 가까스로 이해했다.

지하에서 노래하는 소녀들은 3년이 지나면 비로소 풀려난다. 하지만 그건 해방이 아닌 폐기의 수순이며, 탑에서는 또 다른 대체자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3년을 보내고도 멀쩡한, 게다가 눈에 보일 정도로 마냐냐와 가깝게 공명하는 아이가 있다면, 탑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이를 붙잡아 두고 싶을 것이다.

그 사실을 통렬히 깨달은 이비는 그래서 성녀가 되기로 했다. 그게 저 두려운 지배자의 올가미를 피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럼 귀족들의 시선으로 탑주를 견제할 수 있으니까.

로블레는 그 둘의 속셈을 짐작하며 혼란스러운 와중에 묘한 열기를 느꼈다.

그 로히카 세드로에게 도전하다니.

로블레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 하지만 과연 네가 성녀가 될 수 있을까?

그 아이는 분명 경이롭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성녀가 될 수 없다. 탑의 성녀는 여러 이해가 얽힌 자리, 티엔다의 고귀함과 우월함을 비스에 과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런데 티엔다의 겁 많고 욕심 많은 귀족들이 과연 그 자리를 네게 줄까? 차라리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면 모를까, 성녀 자리에 비스의 평민이라니.

더군다나 탑에 갇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너의 품행은 그 누구의 눈에도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냐냐의 딸이라 숭배받을 순 있어도 귀족사회에 들어와 성녀로 추대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로블레는 이렇게 확신했다.

그러곤 자신이 안심하는지 실망하는지조차 모른 채 떠들썩한 티엔다를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탑이 조바심 내는 귀족들을 달래며 시간을 끌던 어느 날, 한 소녀가 티엔다 사교계에 수줍은 첫발을 들였다.

그 소녀의 이름은 이비 아리아테. 비스 출신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배운 어린 아가씨였다.

기적의 소녀를 그리던 귀족들은 이비 아리아테의 등장에 그야말로 열광했다.

그리고 로블레는 그 소녀를 보고 세상이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그 이비는 로블레가 보고 들은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3년 전 로블레가 보고 한 달 전 시종에게 전해 들은 이비는 영악하지만 버릇없고 억척스러운 아이였다.

그런데 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비는 거짓말처럼 청초했다. 얌전하고 순수하며, 어지간한 귀족 못지않은 기품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성녀처럼.

그 모습을 본 로블레의 안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거짓말 같고 또 이상했다.

온 세상이 너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 무심한 세상이 너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녀는, 한때 홀로 간절했던 그 성녀는 지독히도 원망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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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 후로도 역시 세상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로블레는 이후로도 모든 것이 이비의 뜻대로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 제 앞에 앉은, 제왕의 위엄을 가진 청년이 난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감당할 수 있는 발언이신지.”

라우렐 백작이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로블레는 성녀가 된 이래 가장 솔직히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못 해요. 아리아테처럼 겁 없이 바락바락 덤비는 짓은.”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로블레는 이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작이 로블레를 향해 무심하게 말했다.


“당신이 이비 아리아테를 원망한다고 들었습니다.”

“영광을 빼앗긴 성녀가 마냐냐의 총아를 질투한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죠.”

“사실입니까?”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새를 질투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백작의 물음에 로블레는 웃으며 속삭였다.


“질투는 비슷한 자들끼리 하는 것이지, 감히 견줄 수 없는 존재에게 품을 마음이 아니지요.”

로블레의 이 말에 거짓은 없었다.

지난 2년간 귀족들은 멋모르고 떠들었다. 외면당한 정실보다 비참한 여인, 자리에서 밀려난 성녀, 수치를 피해 베일을 쓴 로블레 투하라고.

하지만 그건 로블레가 이비를 얼마나 위대하게 여기는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헛소리였다.

로블레는 지극히 경외했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강대한 적과 맞서는, 세상의 선택을 받은, 견고한 어둠을 이길, 이 불완전한 세상을 구할 이비 아리아테를.

그 아이가 성녀가 되면, 자신에게 마땅한 그 자리를 얻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탑의 지하가 메워지고, 노예들이 해방되며, 정당한 살인이 끝나리라. 그로써 이 불쌍한 로블레 투하도 비로소 자유를 얻으리라.

로블레의 이 마음은 신앙심이라 해도 좋았다.


“혹여 제가 아리아테를 원망했다면 그건 너무 늦게 나타난 것에 대한 서운함일 뿐, 저는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아리아테가 성녀가 되어 우리를 구원하기를.”

로블레는 백작이 이해하길 바랐다. 아리아테가 그와 같은 구원자임을, 그의 앞길을 사사로이 막아서는 안 되는 것을.

그래서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 없는 마음을 고백하며 백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성녀의 마음에 화답하듯, 백작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질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곤 무심한 목소리로 성녀의 신앙을 난도질했다.


“비굴하고 무책임한 것보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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