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로블레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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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로블레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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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로블레 투하
2022.12.08.
“찬란한 아침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간 격조했습니다, 라우렐 백작님.”
두꺼운 베일과 긴 드레스로 제 모습을 꼼꼼히 가린 여인이 시온에게 허리를 숙였다.
현 성녀인 로블레 투하였다.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시온은 성녀의 얼굴에 고아한 미소가 맺혀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성녀의 몸짓에서 드러나는 기품과 투명하고 맑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로블레 투하는 모든 면면이 성녀라는 말에 걸맞게 고결한 여인이었다.
“앉으십시오.”
그리고 시온 라우렐은 그런 성녀님께도 한결같이 무심했다.
성녀는 일어나서 의자를 빼주기는커녕, 무심히 고개만 까딱이는 백작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에 시온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힐끗 쳐다볼 뿐이었고, 결국 성녀는 스스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백작님께서 따로 만남을 청하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마지막으로 뵌 날이 백작님의 작위 계승식 때였지요.”
성녀가 옛일을 되뇌며 다정하게 말했다.
말마따나 시온이 성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7년 전, 그가 라우렐 백작위를 계승 받던 자리에서였다.
시온은 그때 성녀가 무어라 축언한 일을 떠올렸다. 딱히 특별한 기억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계승식의 절차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의 접점은 이게 다였다. 이들은 친분도 교류도 없이 서로의 존재만 아는 생판 남이었고, 그래서 성녀는 시온의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에 꽤나 놀란 터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자기가 부른 주제에 쌀쌀맞은 얼굴로 앉은 시온 라우렐의 태도였다.
“이렇게나 조면한 와중에 불러 주셨는데, 제가 백작님을 뵐 자리를 미루어 결례를 범하진 않았나 염려스럽네요.”
성녀가 백작의 냉랭함에 대고 고상하게 말했다.
원래 두 사람은 어제저녁 연회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카셀 몬트라의 변덕 때문에 성녀는 연회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구설이 도는 장소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성녀의 무결함 때문이었다.
덕분에 백작과의 만남도 자연히 미루어졌고, 성녀 측에서 다시 급하게 잡은 만남이 바로 이 자리였다.
성녀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자신이 라우렐 백작의 부름을 미룬 것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온은 이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그도 이비가 쓰러지는 바람에 성녀를 만날 겨를이 없었다.
“그 일은 개의치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혹 기회를 놓쳐 백작님을 뵙지 못할까 염려하였습니다.”
시온의 무심한 답변에도 성녀의 태도는 한없이 고상했다. 그래서 시온은 이비의 가식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현 성녀인 로블레 투하는 역시 소문대로 이상적인 성녀였다.
우아하고 고상하며 늘 평정을 유지하는, 지저분한 곳에는 발도 들이지 않으며 자신의 고결함을 강박에 가깝게 보존하는, 그런 성녀님이었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성녀의 물음에 시온이 천천히 운을 뗐다.
시온이 성녀에게 독대를 요구한 이유는 하나였다.
이비와 서로 한 번씩 돕기로 한 약속의 일환으로, 로블레 투하가 이비에게 저주를 건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시온은 성녀가 맞은 편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려고 했다.
‘이비 아리아테가 저주에 걸린 사실을 압니까?’
그런데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몸이 덜컥 멈췄다. 동시에 시온은 신체의 통제권을 잃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행동이 제한되어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입을 열 수도 없어졌다.
그에게 내린 은폐의 저주가 비밀을 감추려고 그를 억압했다.
‘……전혀 모르는 건가?’
“백작님?”
시온이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성녀가 조심히 그를 불렀다. 그래서 시온은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성녀님께서는.”
아니나 다를까 의도를 바꾸자마자 다시 입이 열렸다. 정말이지 징그러운 저주였다.
“차기 성녀로 누굴 지지하십니까?”
“그건…….”
시온의 직설적인 물음에 성녀가 짐짓 당황했다.
성녀는 난감한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먼저 여쭈어도 됩니까?”
“아니오.”
하지만 시온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는 듯 성녀를 쳐다봤고, 성녀는 주저하다가 공손히 말했다.
“저는 아리아테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누구보다 훌륭하게 노래하고, 마냐냐 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요. 성녀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녀의 대답은 참으로 성녀다웠다. 그래서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어제 이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텐데, 성녀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니.
시온은 이 무슨 기만인가 하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성녀가 조심히 되물었다.
“백작님께선 여전히 아리아테가 차기 성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까?”
시온은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일부는 저주 때문이고, 또 일부는 어제 시작된 심경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온이 입을 다물고 있자, 성녀가 넌지시 되물었다.
“혹시 그게 아리아테를 연인으로 삼고자 하는 목적이신가요……?”
“말을 가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시온은 차갑게 성을 냈고, 성녀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도 어이가 없어 시온은 각도가 기울어진 베일을 언짢게 노려보았다.
연인으로 삼고자 하는 목적이냐니, 성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시온은 새삼 골치가 아파졌다.
그는 자신과 이비를 두고 귀족들이 별별 소리를 다 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설 속에서 난폭하고 저속한 건 본인 쪽이고, 가련하고 순진한 건 이비 아리아테라는 것도, 유감스러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잘 따져 보면 이런 구도를 만든 네다섯 가지 사건 중, 시온이 자발적으로 한 일은 하나뿐이었다.
이비를 성녀로 만들지 말라고 귀족들을 위협한 것.
오직 이것만 그가 한 짓이고, 나머진 다 이비 아리아테의 만행이다.
라우렐 성의 연회에서 시온에게 욕을 한 것도 이비, 탑의 징계를 막으려고 그를 조종한 것도 이비, 더욱이 이 등꽃제까지 그를 끌어들인 것도 이비다.
그런데 정작 이 저급한 오해에 시달리는 건 본인이라니.
‘제길…….’
이 상황이 새삼 수치스러웠지만, 시온은 역시나 오만하게 이겨 냈다.
그 사이 성녀가 다시 운을 뗐다.
“그런 게 아니라면 백작님께 한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성녀가 두 손을 모으더니, 돌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아리아테가 제 뒤를 이을 수 있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는지요.”
이 뜻밖의 부탁에 시온은 성녀의 얼굴 부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심인가?’
시온은 성녀의 의도를 의심했다. 그러나 베일 때문에 그의 속내를 좀처럼 유추할 수 없었다.
“어제, 아리아테와 몬트라 후작님 사이에 벌어진 일은 백작님께서도 아시겠지요.”
“후작의 부정을 폭로한 것 말입니까?”
“네……. 불미스럽게도 그런 일이 있었죠.”
불미스럽게. 그건 염려하는 척 남을 까 내릴 수 있는 편리한 수식어다.
사교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화법이 성녀의 입에서 나오자, 시온은 다시 성녀를 잠자코 쳐다보았다.
“어제 일로 아리아테는 몬트라 후작님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람되고 염치없지만, 백작님께서 대공 전하를 설득해 주시길 청하려 합니다.”
말마따나 외람되고 염치없는 청이었다. 대공의 뜻을 좌우하려고 그 혈연에게 접근하다니.
하지만 시온은 이 월권에 화가 나기보다는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이비는 로블레 투하가 자신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데, 이쪽에서는 오히려 이비를 성녀로 만들어야 한다고 나서다니.
물론 이게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티엔다에는 통하지 않을 걸 알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는 자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시온은 성녀가 어느 쪽일까 궁리하며 모르는 척 되물었다.
“좀 전에 이비 아리아테가 성녀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했는데, 앙심을 품고 남의 약점을 폭로한 것이 과연 그런 것입니까?”
시온은 이렇게 말하고 잠시 후회했다. 말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괜한 일에 발을 들인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녀는 이비의 저주에 대해 모른다. 이걸 확인했으니, 적당히 구색만 맞춰 일어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이런 대화를 시작하다니.
시온은 이게 어제 일 때문인 걸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구나 한 번쯤은 기회가 있어야 해요.
―나만 절박한 게 죽도록 화가 나.
뇌리에 남은 이비의 모습과 목소리에 시온은 혀를 찼다.
그 사이 성녀는 담담히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와 다를 바 없는 꼭두각시가 될 테니까요.”
그 온화한 음성 뒤로 새 지저귀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유리창을 관통한 햇살은 선으로 보일 만큼 또렷하게 허공을 갈랐다.
완벽히 통제된 온실의 평화 속에서, 시온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성녀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시온은 저 말의 이면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용의 가호를 빌려 쓰는 것. 그건 이미 한 번 거스른 섭리를 또 한 번 거스르는 세계에 대한 반역.
시온은 자신이 짊어진 힘을 그렇게 규정했다.
티엔다비스는 이미 고대에 수몰되어 사라져야 했던 세상의 번외, 신의 변덕과 아집으로 탄생한 완벽하지 않은 세상이다.
그렇게 겨우 맞춘 섭리가 또다시 일그러져 본래는 용들이 품어야 할 가호가 인간에게 전해졌다.
그 결과가 라우렐 백작이라는, 정의로운 라우렐의 혐오스러운 이면이다.
그래서 시온은 자연히 짐작했다. 고결한 탑에도 분명 못지않은 그림자가 있음을.
그건 라우렐과 세드로에 속한 자라면 피차 모를 수 없는 일. 그러나 암묵적으로 눈을 감아 주고 있는 일이다.
시온은 방금 성녀가 그것을 언급했다는 걸 직감했다.
“감당할 수 있는 발언이신지.”
“아니요.”
성녀의 대답에 시온은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못 해요. 아리아테처럼 겁 없이 바락바락 덤비는 짓은.”
그리고 성녀, 로블레 투하는 이렇게 말한 후 베일 속에서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움을 참기 위해서.
라우렐 백작의 차가운 눈엔 의혹이 가득하지만, 로블레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이비가 차기 성녀로 발탁되길 바랐다. 아니,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차마 밝힐 수는 없어, 입을 꾹 다문 채 저 냉정한 백작님께 읍소할 뿐이었다.
이미 십 년 전 일이지만, 로블레는 그날의 모든 것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고결한 성녀가 되어, 마냐냐 탑의 지하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던 날을.
그때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고 경악하는 로블레에게 그의 오랜 친구이자 새로운 탑주인 로히카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위한 일이야. 모두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
로블레는 로히카의 그 말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는 어린 성녀에게, 어린 탑주는 웃으며 말했다.
―너는 너희 가문의 안위에 관심이 없니?
그 한마디로 무지한 성녀 앞에 세상의 실체가 드러났다. 지옥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