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이비가 축배를 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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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이비가 축배를 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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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이비가 축배를 든 이유
2022.12.05.
이비가 소금에 대해 묻자, 카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으르렁댔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맞아요, 그냥 헛소리예요.”
그러자 이비는 장난하듯 대답했고, 덕분에 카셀은 머릿속이 바빠졌다.
‘뭐야, 저게 뭘 알고 저러는 건가?’
이비가 말한 소금은 마냐냐 탑에서 생산되는 정화의 소금. 그믐밤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밑 대륙의 인간들이 거금을 들여 사들이는 것이다.
카셀은 탑주에게 그 소금을 유통할 권리를 받았다. 그래서 수완 좋게 소금을 팔아 그 수익을 탑으로 착실히 보내왔다.
물론 착실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장부상의 이야기다.
죄 많은 카셀은 뜨끔했지만 초조함을 감추고 능숙하게 비웃었다.
“왜, 생트집이라도 잡아 보려고?”
“네, 한번 해 볼게요.”
그에 이비는 아주 해맑게 대답했고, 그 앞에서 카셀은 눈을 부릅뜨지 않으려고 버텼다.
탑과 관련된 만큼 소금에 대한 건 특히 꼼꼼하게 관리해 왔다.
여러 여자와 놀아난 거나, 사촌의 치정에 손댄 것, 또 야생마 몰이를 한 것처럼 마음먹고 캔다고 캘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비가 뭘 알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니, 없다. 후작 가의 금고라도 뒤진 게 아니고서야, 몬트라의 가신들이 자멸을 각오하고 배신한 게 아니고서야.
그런데 저게 왜 갑자기 소금 운운하는 거지? 그냥 떠보는 건가?
카셀이 미심쩍게 쳐다보자, 이비가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왜냐하면 그 소금, 제가 정화했잖아요.”
그 말에 카셀은 가슴이 선뜩해졌다.
그는 이비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다만 말의 행간으로 추측할 수는 있었다.
‘설마, 자기가 정화한 소금은 행방을 알 수 있는 건가?’
이런 얘긴 처음 듣는다. 당연했다. 이건 이비가 카셀을 떠보려고 대충 던진 거짓말이었다.
‘후후후. 떨어라, 집돼지!’
하얀 얼굴과 검은 속내를 가진 이비가 카셀을 놀리며 안팎으로 웃었다.
사실, 아까 카셀이 한 말은 반쯤 맞았다.
―쥐새끼처럼 몰래 엿들은 걸로 들쑤시면 뭐가 될 것 같아?
말마따나 그간 이비가 차곡차곡 모아온 카셀의 약점은 너무 소소해서 그의 입지를 흔들기엔 부족했다.
하지만 이비는 확신했다.
사생활만 대충 털어도 저 지경인 인간이니 가업과 사업도 뒤에서 실컷 해 처먹었을 거다. 솔직히 여태 아무도 안 건드려서 멀쩡한 거지, 툭 치면 먼지가 안개처럼 나올 놈이었다.
그래서 슬쩍 떠본 건데 아니나 다를까, 기습적으로 소금 얘길 꺼내자 카셀의 시선이 일순 떨렸다. 물론 이 교활한 남자는 곧장 평정을 가장했지만, 일평생을 잔머리로 버텨 온 이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소금, 그믐, 투기장…….’
이비는 뇌리를 스치는 단어를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곤 또 한 번 희고 검게 웃었다.
몇 개의 실마리를 잡은 이상 빈칸을 채우는 건 시간문제. 이비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으로 의욕을 불태웠다.
“이제 더 할 얘기가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일어나 볼게요.”
이비는 일부러 수수께끼를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셀은 그런 이비를 노려볼 뿐 차마 잡지 못했다.
그래서 이비는 여유롭고 사악하게 웃으며 응접실을 가로지르다가, 문 앞에서 우뚝 멈췄다.
이비는 문고리를 잡고 잠시 생각하다가 카셀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곤 자신을 노려보는 후작님께 치마 끝을 들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제 후작님께 한 말 중에 고맙다는 말도 진심이었어요.”
이비가 돌연 예를 갖추자 카셀이 설핏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이비는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단정히 웃었다. 그래서 카셀의 기분은 또 한 번 묘해졌다.
그가 아는 이비는 저렇게 웃지 않았다. 그는 저렇게 단단하게 웃는 소녀를 알지 못했다.
“성녀가 되기로 마음먹고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성녀답게 보이려고 교양을 쌓고, 난생처음 드레스를 입고, 착하게 웃으면서 비스 출신이라고 질색하는 사람들에게 환심을 구걸하는 건 정말이지…….”
이비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하다는 듯 푸념했다. 그러더니 마치 자립을 앞둔 딸처럼 대견하게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 조금만 더 견디면 될 줄 알고 미련하게 버텼는데, 후작님이 등을 떠밀어 주신 덕분에 깨닫게 되었어요. 착하게 굴어서 얻은 호의와 지지는 종잇장보다 얄팍해서, 결국 자기들 형편대로 쉽게 구겨 버릴 수 있다는 걸요.”
다만 그 말의 내용은 전혀 대견하지도 갸륵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아닌 척 곤두선 서슬만 가득했다.
“그래서 결심했어요. 사랑받아서 성녀가 되는 건 아예 글렀으니까 좀 더 제 취향에 맞는 성녀님이 되기로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막 굴러가는 세상이니 안 될 건 없을 거예요.”
티엔다에서 오만은 권리이며 비굴은 의무.
질서, 품격, 권위. 이런 걸로 아무리 포장해 본들 티엔다의 구조도 본질적으로는 비스와 같았다. 승자독식, 강한 자는 갖고 약한 자는 잃는다.
그래서 이비도 새롭게 다짐했다.
모두가 원하는 그린 듯이 아리따운, 희망의 상징이지만 주제넘어선 안 되는 성녀님이 아니라 아무도 원하지 않는, 하지만 감히 몰아내지도 끌어내지도 못할 어려운 성녀님이 되기로.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려요.”
마지막까지라니, 카셀은 이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앞서 이비가 불평한 것처럼 이비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누차 말하지만, 어제 이비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이비는 이참에 보여 줄 작정이었다. 날 가지고 논 대가가 어떤 것인지. 그 본보기가 대귀족이라면, 바라는 대로 어려운 성녀님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이비의 인생은 대부분 어려웠다. 그럼에도 포기한 적이 없어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남았다면 해낼 수밖에. 이다지도 못돼먹고 엉망인 세상이지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살아갈 수밖에.
어제 이비는 이런 마음으로 축배를 들었다.
카셀 몬트라를 처음으로 때려눕힌 것을 기념하며, 앞으로 열심히 패고 다닐 자신을 자축하며.
.
.
.
카셀과 접견을 마치고 복도로 나온 이비는 문밖에서 리오 투하와 마주쳤다.
리오는 여느 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이비를 기다린 분위기였지만, 이비도 여느 때처럼 모르는 척 웃으며 목례하고 지나쳤다.
“당신!”
그러자 리오가 빽 소리치며 이비를 불러세웠다.
“나하고 얘기 좀 해요.”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리오의 얼굴은 현 성녀인 로블레 투하와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잠시 고민하다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
같은 시각, 시온은 화원의 온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실에서 사는 작은 새들이 지저귀고, 유리천장을 통해 햇살이 내렸다. 이 온실에는 전날의 소란을 일부러 외면하는 듯한 평화가 가득했다.
그래서 시온은 참 가소롭다고 생각하며, 잠시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
.
.
지난밤 수국 정원에서, 시온은 남몰래 공감하고 있었다.
이미 성인인 아가씨의 음주를 통제했다는 이비의 집사에게.
“음흐흣.”
긴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트린 이비가 또 한 번 음산하게 웃었다. 이비는 아까부터 저렇게 간헐적으로 히죽대며 시온을 소름 돋게 만들고 있었다.
약 반 시간 전, 이비는 괜한 고집을 부리며 와인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고삐가 풀렸는지 잔에 남아 있던 것도 어느새 홀랑 다 마셔 버렸다.
잔이 비자 이비는 그걸 시온 쪽으로 슬쩍 내밀었고, 시온은 무심코 이비의 잔을 채워 주었다. 아까는 병에 입 댔다고 뭐라 하더니, 이제 그건 아무렴 상관없는지 이비는 그 술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셨다.
그걸 몇 번 반복하고 시온이 이비의 주량을 의심할 때쯤, 이비가 혼자 웃기 시작했다.
‘취했나?’
“히히…….”
‘취했구나.’
명불허전 이비 아리아테. 역시 취해도 평범하게 취하지 않는다.
이비는 혼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기 무릎을 꼭 끌어안고 그렇게
픽픽 웃어 댔다.
“예에에에, 전에.”
그러더니 돌연 진한 술주정을 시작했다.
“아저씨가 그랬어요.”
그놈의 아저씨…….
“화가 나면. 왜. 화가 났는지. 먼저 잘 생각해 보라고.”
이비의 말에 시온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이미 알딸딸하게 취한 이비는 그걸 까맣게 모르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나는. 카셀 몬트라에게. 왜 화가 났을까.”
“배신감 때문이겠지.”
“배신감은 무슨.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거든요?”
시온이 넘겨짚자 이비가 단호히 부정했다. 그러곤 다시 음침하게 후후 웃었다. 머리카락을 한 가닥 입에 물고 그렇게 웃는 모습이 퍽 가관이었다.
“그럼 농락당한 것 때문에?”
“아니요, 아니에요. 음, 사실 맞지만, 아니에요. 솔직히 내 일을 나 빼고 다 아는 거 진짜 기분 나빴는데, 그게 첫 번째 이유는 아니에요.”
그럼 뭔데?
시온은 이비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그래서 기다리는데 이비가 말을 잇지 않았다.
……설마 여기까지 말하고 잠든 건 아니겠지.
시온이 불길한 눈으로 이비를 쳐다봤다. 다행히 이비는 잠든 게 아니라 무릎에 턱을 댄 채 무언가 곰곰이 생각 중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기회가 있어야 해요.”
한참 후, 이비가 조용히 입을 뗐다.
“왜냐하면 다들 절박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쯤은 이유 없이 구해 줘도 괜찮아요. 딱 한 번 정도는요.”
이비가 마치 변명하듯 말했다. 아직 확신이 없는지, 머뭇대면서.
시온은 이 말이 꽤 익숙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다 곧 떠올렸다. 지난 그믐, 이비가 한 말을.
―그래야 공평할 것 같아서요.
―딱 한 번, 아무 대가 없이 구원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이 한 번쯤은 있어야 공평하겠다 싶었어요.
이비는 마을에 퍼진 독을 정화하기 위해 탑의 규율을 깨고, 왜 그랬냐고 묻는 시온에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때는 그저 가식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 보니 저 대답은 이비의 타협 없는 진심이었다. 이비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안 된다고 했어요. 한 번 구해 주면 계속 매달리고 빌붙는다고.”
이비의 말이 맥락 없이 이어졌지만, 시온은 그 의미를 곧장 이해했다.
모렌에게 보고를 받았다. 그 일로 귀족 일부는 이비를 성녀라 칭송하고 나머지 일부는 불만을 품었고.
아무래도 몬트라 후작은 후자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지껄이는 걸 이비가 듣게 한 모양이다.
시온은 혐오감에 치민 욕지기를 삼켰다.
이비는 할 말이 끝났는지, 아니면 이제 귀찮은지 무릎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시온은 차마 손을 뻗을 수 없어 덧없이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화가 났어?”
이비는 응,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러곤 덧붙였다.
나만 절박한 게 죽도록 화가 나, 라고.
.
.
.
“먼저 와 계셨군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시온의 상념을 깨웠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베일을 쓴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이 고아한 자태로 시온에게 무릎을 굽혔다.
“찬란한 아침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간 격조했습니다, 라우렐 백작님.”
그 여인은 2년 전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현 성녀, 로블레 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