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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그건 전부 너 때문 (53/129)


53화. 그건 전부 너 때문
2022.12.01.



 


“내가 분명 얕보지 말라고 했는데.”

이비의 책망은 담담했다. 그래서 카셀은 도리어 화낼 틈을 놓쳤다.


“게다가 이제 와서 오해라고 해봤자 너무 늦었어요. 지금쯤이면 다른 귀족들도 눈치를 챘을 거예요. 후작님의 부정을 폭로한 게 나라는 걸요.”

“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내가 이 정도 안 했으면 이렇게 얘기할 기회나 있었을까요? 얻어맞고 울지도 못하는 애처럼 방치나 당했겠죠.”

이비의 타당한 반박에 으르렁대던 카셀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덕분에 내 평판은 전부 무너졌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착한 성녀 후보였는데, 이젠 나를 수 틀리면 약점을 터트리고 덤비는 독사 같은 애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해 봤자 놀리는 소리밖에 더 되나요?”

이비가 담담하다 못해 무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살벌하게 곤두섰던 카셀의 눈에 묘한 이채가 서렸다.

그는 화내던 것도 잊고 흥미롭다는 듯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러게, 내가 너무 얕봤네. 무턱대고 덤빈 게 아니라 도박을 한 거면 얘기가 또 다르지.”

카셀은 그렇게 중얼대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이비를 쳐다봤다.


“하, 진짜 마냥 속았네. 대체 얼마나 열심히 내숭을 떤 거야?”

“성녀가 되는 데 필요한 만큼요.”

이비의 대답에 카셀이 결국 제대로 웃었다.

수완가인 그는 자신의 착오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이비가 외모와 내숭이 전부인 흔해 빠진 여우인 줄 알았다. 그런 주제에 아득바득 대드는 것 같아 괘씸했는데, 들어보니 이비의 판단력과 강단은 그의 예상보다 준수했다.

이러니 적당히 구슬리는 게 통할 리 있나. 이비는 어르고 달랠 게 아니라 협상을 시도해야 하는 상대였다.

이 사실을 알아챈 카셀이 또 한 번 태도를 바꿨다.


“내가 야심가를 몰라봤어. 이제 아니까 제대로 대우할게.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없어요.”

카셀이 모처럼 진지하게 말하는데, 이비가 그 말을 싹둑 끊었다. 그래서 카셀은 또 다른 형태로 당황했다.


“후작님한테 원하는 건 이제 없어요. 증서도 인장도 그냥 얼마나 비위를 맞추나 시험해 본 거예요.”

“시험?”

“그래도 제대로 사과하면 한 번은 봐주려고 한 건데, 후작님은 정말 못쓰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이비의 목소리는 여상히 단조로웠다. 마치 있는 사실을 그대로 논하는 듯한 태도였다.


“성녀가 되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셨죠? 아까도 솔직히 대답했지만, 질문의 의도에 맞게 다시 한번 대답할게요. 당연히 될 건데 후작님하고는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그걸로 쥐락펴락할 생각하지 마세요.”

이비의 말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래서 카셀은 이게 대체 어디까지 가려나 싶어 한쪽 입술만 길게 찢으며 되물었다.


“그게 어떻게 나랑 상관이 없을 수 있지?”

“성녀 발탁식 때 후작님은 그 자리에 없을 거니까요.”

카셀은 그만 얼이 빠졌다.


“진심이에요.”

“허.”

이비가 덧붙인 다짐엔 결국 헛웃음이 흘렀다.

성녀 발탁식 때 그 자리에 없을 거라니, 이 말은 둘 중 하나였다. 널 죽이겠다, 혹은 몬트라 후작을 교체해 버리겠다.


“그게 가능한 건 둘째치고, 이게 그럴 일인가?”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 카셀은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리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제 일로 열 받은 건 알겠는데 그게 이렇게 목숨 걸고 덤빌 일이야? 멍청이도 아니고 왜 이래?”

“목숨 걸고 덤빌 일이 맞아요. 난 항상 그랬으니까요. 그리고 진짜 멍청이는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쪽이고요.”

“너 입조심 해.”

“후작님은 상황 파악부터 하세요.”

카셀이 나직이 경고했지만, 이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래서 카셀은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이제 화가 나지도 않고, 이비를 구슬리거나 협상을 시도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대신 불쾌하고 찝찝한 감정만 그를 지배했다.

그가 이 묘한 신호에 난감해하는데, 이비가 다시 태연하게 재잘댔다.


“적당히 물러날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투서 같은 거 안 썼어요. 후작님을 따로 찾아갔겠죠. 폭로보다는 협박이 훨씬 안전하니까. 난 끝까지 갈 생각으로 투서를 쓴 거예요.”

‘그러니까 왜 끝까지 가냐고!’

카셀은 계속 강경하게 나오는 이비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는 이비가 자신을 ‘골탕 먹인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미칠 듯이 화가 난 것과 별개로 그의 인식은 딱 이 정도였다.

그런데 이비는 정말 뒤가 없이 덤빌 작정이고, 생각보다 독한 걸 건드렸다는 생각에 카셀은 이제 정말 아차 싶어졌다.


‘제기랄, 어디서 이딴 게 나타나서…….’

물론 이비가 그의 자리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저게 마음먹고 물고 늘어지면 확실히 피곤할 것 같았다. 자신의 약점을 수집하는 불가침의 적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카셀은 보복이고 나발이고 이비를 떼놓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래, 알았어. 나한테 화가 난 건 충분히 알겠는데…….”

“정말요?”

카셀이 다시 한번 협상을 시도하는데, 이비가 냉큼 되물었다.


“후작님이 뭘 잘못했는지 정말 아세요?”

심지어 잘못을 추궁하듯 말을 바꿔서 말이다.

카셀은 이비를 다시금 괘씸히 여기면서도 순순히 질문의 답을 떠올렸다.

그건 성녀 자리를 빌미로 이비를 가지고 놀다가 막판에 내친 것.

또한 내치기 전에 이비의 송곳니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

카셀은 이 두 가지를 자신의 과오로 꼽았다. 이비가 바라는 답은 아마 전자일 거다.

하지만 카셀은 자백하듯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자, 이비가 살포시 웃으며 답을 알려 주었다.


“후작님의 잘못은 어리고 가여운 나를 무자비하게 굶기고 때리고 괴롭혀서 지옥 밑바닥에 방치한 거예요.”

“……내가?”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했어?

카셀은 이렇게 변명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동시에 아까 시작된 불쾌감과 찝찝함이 더 강해졌다.

그사이 이비가 멋대로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때, 저 밑 대륙의 길바닥에서 하루하루 버틸 때 나는 항상 궁금했어요. 세상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아무도 날 안 볼까. 난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왜 다들 저렇게 필사적으로 나를 못 본 척하는 걸까. 그런데 이제야 알았어요. 그게 다 후작님 때문인걸요.”

얼토당토않은 모함에 카셀은 어쩐지 오싹해졌다.

그렇게 말하는 이비의 눈이 진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비의 눈빛은 일말의 꾸밈도 없이, 그야말로 확신과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난 그때 너 알지도 못했어.”

“어제 그러셨잖아요. 이비 아리아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이유가 비스에서 주제넘게 굴어서라고.”

이건 사실이다. 실제로 카셀은 이렇게 말했었다.


―그게 주제넘게 구는 걸 보니 안 되겠다 싶더라고.

―거기서 성녀님 노릇을 톡톡히 하셨다던데, 안 되지 그러면.

―못 배워서 금기가 왜 금기인지를 몰라. 만약 저게 그대로 성녀가 된다고 해 봐. 밑 대륙 버러지들이 하루가 멀다고 찾아댈걸?

이건 카셀이 제 친구들 앞에서 한 이야기다.

이게 이비의 귀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둘째치고, 이 말이 저 빈민의 태생적 불행과 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카셀이 이비의 기괴한 비약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굳어 있자, 이비가 다정히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한참 고민했어요. 그게 주제넘어서 내쳐질 이유라면,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했을까.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데 보고도 모르는 척해야 했나? 아니면 그런 위험한 곳엔 처음부터 발도 들이지 말고 귀찮은 일도 최대한 피해야 했을까?”

이건 또 무슨 성녀 같은 짓거리야?

카셀은 이비가 그의 냉혹함을 비난하려는 줄 알고 인상을 구겼다.

어떻게 그 불쌍한 사람들의 생명을 외면하라고 하나요, 생명은 모두 소중해요, 같은 소릴 하면서 말 같지도 않은 이상론을 주창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비의 이어진 말은 그다지 성녀답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어요. 역시 카셀 몬트라를 죽여버리기로.”

“죽…… 뭐?”

“카셀 몬트라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게 주제넘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못 박지 않았으면 내가 그렇게 거지처럼 살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카셀 몬트라가 괜한 짓을 하면 망한다고 본보기까지 보여 주니까 온 세상이 날 벌레 취급하며 짓밟았어요.”

“무슨 개소리야, 그땐 나도 애였어!”

“내 알 바인가요.”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카셀이 항변했지만, 이비는 그저 해사하게 웃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전부 후작님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비는 날씨가 정말 좋네요, 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으로 카셀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러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그 모습에서 은은한 광기를 느꼈고, 아까부터 제 목덜미에서 스멀대던 꺼림칙한 기분의 정체도 비로소 깨달았다.

그건 직감이 위기를 감지하고 보낸 신호였다. 얘 아무래도 미친 것 같으니까 더는 건들지 말라는, 본능의 호소였다.

카셀은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그건 광인을 만난 자가 으레 느끼는 타당한 공포였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네가 천하게 태어난 걸 누굴 탓해?”

“맞아요, 그건 내 잘못이에요. 제비뽑기를 더럽게 못 해서 빈민가의 천민으로 태어나 살겠다고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는 건 전부 내 잘못이에요.”

‘닥쳐! 인정하지 마!’

 

 
이비가 후후 음산하게 웃으며 중얼댔고, 카셀은 저 이상한 애를 당장 어디로 치우고 싶어졌다.

아니, 차라리 본인이 떠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셀이 막 자리를 뜨려는데, 이비가 나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후작님의 잘못은 그런 뒤가 없는 애를 건드렸다는 거예요.”

이비의 달콤한 목소리에 카셀은 문득 전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너 잘못 건드렸어.

―오늘 일은 새 발의 피고 넌 이제 나한테 계속 혼날 거야.

―완전 망할 때까지.

이비는 어제도 이렇게 말했다. 그를 깔고 앉고서, 달빛을 등진 채 묘하게 위엄 서린 얼굴로.

그때 느낀 당혹감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사실에 카셀은 굴욕을 느꼈다. 당혹감이라니, 내가 이런 계집애한테 당혹감이라니.

피할 구멍을 찾던 카셀은 결국 다시 악에 받쳤다.


“듣자 하니 끝이 없네. 눈에 뵈는 게 없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네까짓 게 뭘 어쩌겠다고. 쥐새끼처럼 몰래 엿들은 걸로 들쑤시면 뭐가 될 것 같아?”

“충분히 되지 않을까요?”

“개소리 작작 해, 내가 언제까지 봐줄 것 같아. 아, 혹시 백작 믿고 이러나? 어린 게 아양 떠는 데 재미가 붙었나 본데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해야지. 기껏해야 몇 달짜리 노리개가 기고만장해서는, 이쪽에서 기껏 대우해 주면 눈치껏 받을 것이지…….”

“라우렐 백작님이 무서우세요?”

이비의 물음에 모욕을 쏟아 내던 카셀이 말을 멈췄다.


“걱정 안 해도 돼요. 그 백작님도 무고한 대귀족을 함부로 건들지는 못할 거예요. 겨우 몇 달짜리 노리개 때문에 그런 짓을 할 리가.”

카셀이 정곡을 찔린 얼굴을 하자 이비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그래서 그의 미간이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이비가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심쩍게 쳐다보자, 이비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소금 어디다 팔았어요?”

동시에 카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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