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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얕보지 말라니까 (52/129)


52화. 얕보지 말라니까
2022.11.28.



 


“……오해는 빨리 푸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생각보다 일찍 불러 줬다는 이비의 말에 카셀이 입으로만 진득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카셀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달리 가벼웠다.

머리는 공들여 손질하지 않아 반쯤 흐트러진 채였고 반짝이는 보석이나 화려한 장신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몸에 밴 귀태는 여전했으나 참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젠 정말 놀랐어. 우리 이비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거든.”

꾸밀 경황도 없던 주제에 카셀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곤 이비를 향해 다정히 덧붙였다.


“이해해. 내가 투하를 성녀로 추대할 거라는 얘길 듣고 속상해서 그런 거지?”

“아뇨, 속상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후작님의 정신머리가 꼴 보기 싫어서 그랬어요.”

후작의 물음에 이비는 여느 때처럼 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그 내용은 정반대로 참담했다.

심지어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말갛게 웃었고, 애써 너그럽게 굴던 카셀의 눈에는 결국 핏발이 섰다.

카셀의 목 끝까지 고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는 대단한 자제력으로 그것을 도로 삼켰다.


“……어쨌든 중요한 건 오해를 푸는 거지.”

“오해인가요?”

“그래, 오해야. 하여튼 여긴 듣는 귀가 많아서 무슨 말 하기가 무섭다니까.”

카셀이 오해라는 말을 반복하자 이비가 고개를 갸웃댔다. 그 깜찍한 모습에 카셀은 미소를 지키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관대한 척 연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화를 참느라 죽을 맛이었다. 이비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이 상황엔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다만 카셀 몬트라는 허랑방탕할 뿐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교활한 쪽에 속했고, 그래서 상황에 맞게 결론을 내렸다.

지난밤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이비를 구슬려야 한다는 결론을.


‘빌어먹을, 내가 왜 이따위 짓을…….’

카셀은 악에 받쳐 테이블 밑에 둔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실 그는 불과 두 시간 전만 해도 이비를 밟아 죽일 생각이었다.

어젯밤, 이비는 카셀을 깔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길 곱게 태어나 마냥 쉽게 산 주제에.

―넌 이제 나한테 계속 혼날 거야.

―이 더러운 집돼지 놈아!

지저분한 사생활을 가진 카셀 몬트라는 원래 욕을 먹는 일에 익숙했다.

그는 숙녀들의 원망을 포용할 줄 아는 신사였고, 동시에 여인들의 비난과 욕설을 훈장으로 여기는 난봉꾼이었다. 그래서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말에는 타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전날 이비가 터트린 말은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그를 심장을 내리찍은 채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악에 받쳐 내지른 원망이 아니라 그를 한없이 깔보며 내리찍은 조롱이었기 때문이다.

밑 대륙의 천출이 감히, 알랑대며 귀족 시늉이나 하던 게 감히, 오냐오냐 봐주니 정신이 나가서 감히 누구를.

카셀은 자신을 깔고 앉은 이비의 표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이 치욕을 몇 배로 되갚아 주기로 작정했다. 그러지 않으면 화가 나서 제 명을 못 채울 것 같았다.

하지만 카셀은 직후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자신이 이비에게 보복할 수 없다는, 아주 뜻밖의 사실이었다.


‘거짓말이지?’

카셀이 그걸 깨닫고 처음 한 일은 현실 부정이었다.

그는 어지간한 명문가도 반년 내에 주저앉힐 자신이 있었다. 그가 악의를 가지고 권력과 재력을 휘두르면 무릎 꿇지 않을 귀족이 오히려 손꼽히게 적었다.

그러니 이비 쯤은 가볍게 밟을 수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잘 따져 보니 아니었다. 밟으려 해도 밟을 게 없는, 가문도 재산도 가족도 없는 이비의 비루하고 불우한 처지 때문이었다.

차라리 귀족이면 가문을 흔들어 지옥을 보여줄 텐데, 한 줌 부스러기도 없는 그 여자애한텐 그의 권력과 재력이 도리어 무용했다. 그렇다고 아무 방패막이 없는 그 애를 마음껏 패대기칠 수도 없었다. 탑의 비호 때문이다.

결국 카셀이 이비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탑주에게 이비의 처벌을 건의하는 것뿐인데, 그래 봤자 근신이 고작이고 이조차 탑주에게 밉보일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위대한 몬트라 후작에겐 이비의 하극상을 문책하기는커녕, 이비가 제 약점을 마구 퍼트려도 그걸 제재할 권한조차 없었다.

더 위대한 라우렐 대공이 자신의 동생을 모욕한 이비를 어쩌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걸 왜 여태 몰랐지?’

카셀은 이비의 위치와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더 없이 당황했다.

그건 여태 쓰다듬고 괴롭히던 고양이가 알고 보니 사자였고, 심지어 그 사자 우리가 활짝 열려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자의 당황이었다.

카셀은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 악몽 같은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자신이 왜 이토록 상황 파악을 못 했는지 고민했고, 곧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모르지 않았다. 단지 잊고 있었다. 아니, 속은 것이다. 저 토끼인 척하던 독사에게.


‘망할, 그 간교한 게 날 속였어!’

카셀은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제법 타당한 주장이었다.

애당초 이비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티엔다 귀족들은 이비를 마냐냐의 헌신이라 부르며 숭배했다.

그런데 그 애가 사교계에 관심을 보이며 저자세로 기웃대자 분위기가 뒤집혔다.

신의 총아가 평민이어서 티엔다 귀족계를 동경해 왔다는 사실에 귀족들의 콧대가 한껏 높아진 것이다.

이 와중에 이비는 순진한 척 귀족들을 공경했고, 다들 거기 속아 선심 쓰듯 발밑을 내줬다. 그러다 순식간에 상황을 망각했다. 이 경이로운 아이를 귀여워할 수 있다는 우월감에 젖어서 말이다.

카셀도 그중 하나였다. 아니, 카셀은 그 중심에 있었다.

대 몬트라 후작가의 젊은 주인.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에게도 천장은 있었다. 바로 라우렐과 세드로라는, 용의 가호를 소유한 자들이 그에겐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이었다.

이비는 그런 그에게 훌륭한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마냐냐의 은총을 독차지한 녀석을 손에 넣고 굴릴 수 있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에 카셀의 태도는 슬금슬금 선을 넘어 경박해졌고, 그럼에도 고분고분한 이비를 보며 그는 결국 착각하게 되었다.

이비의 말처럼 가지고 놀다 버려도 괜찮을 거라고.

아무 뒤탈 없을 거라고.

어차피 웃거나 우는 것밖에 못 할 계집애라고.

참 어리석게도 말이다.


“이비도 똑똑하니까 알겠지만, 높은 자리에 있으면 들어야 하는 얘기가 많아. 최근엔 이비에 대한 얘기가 많아서 나도 고민을 좀 한 거지.”

그래서 교활한 카셀은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바로 태도를 바꿨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성녀는 이비여야 할 것 같아.”

“그 말은 저를 다시 성녀로 지지하겠다는 뜻인가요?”

“그래, 그러니까 오해는 풀자고.”

카셀은 뱃속이 타들어 가는 분노를 삼키면서 이비를 구슬렸다.

물론 이건 이비의 입을 막을 방편이었다.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이비의 투서가 누구에게 돌았는지 확인하고 수습할 시간이, 또한 이비가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 입수했고 또 얼마나 더 아는지 알아낼 시간이 절실했다.

그래서 카셀은 이비를 지지할 마음이 추호도 없으면서 일단 몸을 낮췄다.

그러자 이비가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증서를 써 주실 수 있나요?”

“증서…….”

이비의 요구에 억지로 웃던 카셀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이비야, 내가 이 정도 말하는데 꼭 그래야 하니?”

“물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하루아침에 바뀌는 말을 제가 어떻게 믿겠어요. 시간만 끌다가 또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잖아요.”

카셀은 분노로 뒤집히려는 눈을 눈꺼풀로 억지로 내리눌렀다.


“증서, 써 주실 거죠?”

그런 카셀에게 이비가 아무것도 모르는 양 생글대며 말했다.

카셀은 저 기고만장한 꼴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호흡이 가빠졌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테이블이 뒤집히고 의자와 화병이 벽에 처박혔다.

그의 두 손이 충동을 현실로 만들고자 파르르 떨렸으나, 카셀은 다시 한번 영혼을 깎아 인내했다.

이비는 고작 하루, 아니. 불과 몇 시간 만에 카셀의 인맥과 사업을 갑갑하게 꼬아 놨다. 그러니 분명 다른 패가 더 있을 것이다. 그걸 확인하기 전까진 저 독주머니를 꽉 묶어 놔야 했다.

게다가 이건 굴복이 아닌 매복이다.

어린애를 울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쥐여 준 사탕을 도로 빼앗는 것. 그리고 이비 아리아테의 사탕은 분명 성녀의 자리다.

카셀은 한 달 후, 한껏 기대했지만 결국 성녀가 되지 못해 우는 이비를 보기 위해서라도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그래, 이비가 원한다면 쓰지, 뭐.”

“그럼 증서에는 서명 대신 반지로 인장을 찍어 주세요.”

그런데 이비가 카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냉큼 말했다. 지금 카셀이 몸에 걸친 유일한 장신구, 그의 왼손 엄지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키면서.

그 순간 카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애써 머금던 웃음도 뚝 하니 그쳤다.


“……계속 이러면 피차 좋을 게 없는데. 내가 이 정도 성의를 보이면 너도 노력하는 척은 해야지.”

더 웃을 수 없게 된 카셀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이비가 가리킨 것은 몬트라의 주인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인장 반지였다.

이 인장의 무게는 몬트라가 이제껏 쌓아 온 역사와 업적의 무게와 동일했다. 그러니 제멋대로인 카셀조차도 이 인장 앞에선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비는 마치 카셀의 머릿속이 보이는 것처럼 퇴로를 막았고, 그로써 계속 한계를 갱신하던 카셀의 인내심이 결국 툭 하고 끊어졌다.


“내가 기는 꼴이 보고 싶어도 마냥 고집부리면 안 되지. 뒷감당 생각해, 그렇게 굴면 너한테 아무것도 안 남아.”

끓는점을 한참 넘긴 카셀의 눈빛과 목소리는 이제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그것은 격노보다 더 절절 끊는 진노였고, 퇴로가 막힌 맹수의 마지막 경고였다.


 
하지만 이비는 이 날 것 같은 위협에도 그저 웃었고, 그 미소가 카셀의 심기를 또 한 번 거슬렀다.


“너 성녀가 되고 싶은 거 아니야?”

카셀은 이비가 조금이나마 공손해지길 바라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나 이비의 입에선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되고 싶지 않아요.”

“뭐?”

“되어야 하는 거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카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비는 한숨을 쉬며 웃었다.


“아침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나 했는데, 후작님은 어제 제가 한 말을 하나도 안 들으셨나 봐요.”

이비가 고요한 눈으로 카셀을 바라보았다.


“첫마디부터 너무 틀렸어요. 오해라뇨, 난 오해한 적 없어요.”

이렇게 말하는 이비의 표정과 목소리도 담담했다.


“후작님이 리오 투하를 지지하겠다고 공언한 것도, 그래 놓고 내 앞에선 아무 일도 없는 척 입을 다문 것도, 그 이유가 내가 비스에서 한 일이 주제넘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전부 사실인데 오해라니요.”

이비는 화를 낼 필요도 없다는 듯, 그저 딱한 눈으로 카셀을 보며 덧붙였다.


“내가 분명 얕보지 말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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