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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그냥 보여서 (51/129)


51화. 그냥 보여서
2022.11.24.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그래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열두 살의 이비는, 자길 데리러 온 무고한 점성술사를 빤히 노려보았다.


“비가 많이 오는데 집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거기가 집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래, 일단 비부터 피하자.”

이비의 뾰족한 반박에도 점성술사는 이비의 머리 위로 로브 자락을 드리우며 웃었다. 기껏 비를 막아 줬는데, 어째선지 이비의 두 눈엔 도리어 불만이 차올랐다.


“춥잖아. 감기 걸려.”

이비가 고집스럽게 버티자 점성술사가 이비의 젖은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제야 이비는 인정했다. 오늘도 자신이 가출에 실패했음을.


 
빗방울이 나뭇잎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오솔길은 이미 진탕이 되어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이비가 가출을 위해 선택한 길은 하필 이 근방에서 가장 울창한 숲이었고, 비구름 가득한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 점성술사가 이비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덤불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기서 비 그칠 때까지 기다리자.”

점성술사가 가리킨 것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오두막이었다.

이비는 점성술사의 로브 자락을 뒤집어쓴 채 뚱하니 인상을 썼다.

그 오두막은 최근까지 사용된 것처럼 깨끗했다. 그러니 잠겨 있을 게 뻔한데, 점성술사는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오두막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점성술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와지끈 뜯어 버렸다.

이비가 놀라서 히익 피리 소리를 냈다. 그러나 점성술사는 여전히 온화한 사람인 척 오두막을 가로질렀다. 그러곤 이비를 앉히고 젖은 머리를 닦아 주더니 담요까지 꽁꽁 싸매 준 후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남의 집을 이렇게 막 써도 돼요?”

“응, 변상할게.”

이비의 항의에도 점성술사는 태연했다. 그러더니 배고플 이비에게 샌드위치까지 꺼내서 쥐여 주었다.

이 극진한 보살핌에 이비는 놀란 것도 잊고 패배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옳지 않아, 이건 잘못됐어.

이비는 불편한 마음으로 자신을 다그쳤다. 최근 자신에게 일어난 뚜렷한 변화 때문이었다.


‘길에서 자는 게 불편해졌어. 추운 것도 배고픈 것도 이제 못 참겠어. 나는 무능해졌어. 저 아저씨 때문에……!’

이비는 자신의 태만과 나약함을 점성술사의 탓으로 돌리며 다시금 그를 쏘아봤다. 하지만 점성술사는 속도 없이 고개만 갸웃댈 뿐이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르소 아줌마가 만든 샌드위치가 맛있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먹으며 다시 뚱하니 점성술사를 쳐다봤다.

비에 젖은 건 본인도 마찬가지면서, 그는 비가 뚝뚝 떨어지는 로브를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이비를 살피고만 있었다.


“아저씨.”

“왜?”

“내가 살찌면 잡아먹을 거예요?”

“아니.”

“그럼 키워서 팔아먹을 거예요?”

“아니야.”

“그럼 겁탈하고 죽여서 숲에 묻을 거예요?”

“겁…….”

이비의 과격한 물음에 점성술사가 끔찍하다는 듯 신음했다. 그러곤 경계심으로 똘똘 뭉친 그 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아니야, 네가 싫다는 일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약속할게. 네게 나쁜 짓은 절대 안 한다고.”

“왜 나한테 그런 약속을 해요?”

하지만 이비는 도리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괴롭힘이라도 당한 아이처럼 서럽게 따져 물었다.


“그럴 필요 없잖아요. 그런다고 득 될 것도 없잖아요.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한 달 전, 이비는 뒷골목 패거리에게 붙잡혀 끌려갈 뻔했다.

그런 이비를 점성술사가 구해 줬다. 구해 줬을 뿐 아니라 집으로 데려가 보살피고 치료해 주었다.

그렇게 낯선 이층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 이비는 한동안 멍했다. 심하게 다친 탓에, 그리고 그만큼 놀란 탓에 거의 일주일 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점성술사의 조심스러운 보살핌과 마르소 부인의 살뜰한 정성에 이비는 차츰 회복했고, 어느 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당장 그 집에서 나왔다.

불편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은 없다. 모든 좋은 일은 미끼이고 그 뒤엔 반드시 덫이 놓여 있다.

적어도 이비의 세상에선 그랬다. 이비가 나고 자란 곳은 이렇게 치열하게 불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였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집을 나왔지만, 이비의 가출은 곧 실패하고 말았다. 이비가 걷다 지칠 즈음 찾아온 점성술사 때문이었다.

그는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만 있어.’라며 이비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래서 며칠 후 다시 집을 나오자 ‘아직 열이 있잖아.’라며 이비를 도로 달랬다. 그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며칠만 더 쉬어, 이제 곧 그믐이야, 라며 꼬드겼다. 그래서 이비는 그때마다 마지못해 점성술사를 따라갔다.

그렇게 어영부영 몇 주가 지나고, 이비가 그 이층집에서 살게 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이비가 예상한 나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더 불안했다. 이 아늑하고 아득한 곳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예요?”

“딱히 바라는 건 없어.”

“그냥 장난이에요? 놀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내가 어디 귀한 집 자식이에요? 아저씨 동생이에요?”

“음, 그것도 아닌데.”

“다 아닌데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이비는 비에 쫄딱 젖은 채, 담요를 둘둘 두르고 두 손으로 샌드위치를 꼭 쥔 채 그렇게 물었다.

점성술사는 그런 이비를 잠자코 바라보더니, 비로소 대답했다.


“그냥 보여서.”

그의 말은 간결했다.


“큰 의미는 없어. 그냥 네가 눈에 띈 거야.”

또한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다.

그래서 이비의 머릿속은 또 물음표로 가득 찼다. 이비가 그게 뭐냐며 따져 물으려 하자 점성술사가 먼저 입을 뗐다.


“이 세상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아.”

“완벽이요?”

“모든 일이 법칙을 따르는 건 아니야. 어떤 일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기도 해, 정말 다행히도 말이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네가 기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네 기대를 항상 채워 줄 만큼 이 세상은 완벽하지 않아.”

점성술사의 아리송한 말에 이비가 불만스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기대한 일이 뭔데요? 나는 아무런 기대도 안 해요.”

“정말?”

점성술사가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그는 이비와 시선을 맞추려는 듯 몸을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내가 나쁜 사람이길 기대하고 있잖아.”

뜻밖의 말에 이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비는 놀란 얼굴로 점성술사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서서히 깨달았다. 그의 말처럼, 자신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던 기대를.

그건 배신당하는 것. 친절한 척하던 사람이 본색을 드러내는 것. 달콤한 미끼가 함정과 올가미로 변하는 것.

그래서 이 모진 세상의 민낯에 그럼 그렇지, 하고 냉소하며 안심하는 것.

이비는 이런 것을 늘 기대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비는 무작정 변명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자각과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자기도 모르던 생각을 다른 사람이 알아챈 게 무서웠다. 왠지 벌을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비가 머뭇대며 움츠리는데, 점성술사가 돌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거 나도 들은 말이야.”

“에?”

“내가 아는 사람이 해 준 말이야.”

“아저씨한테요……?”

이비가 얼떨떨하게 묻자 점성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비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자그마하게 꿍얼댔다.


“잘은 모르겠지만 되게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러자 점성술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이비는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온화한 점성술사가 이비 앞에서 저렇게 크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맞아, 아마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일 거야.”

점성술사의 목소리도 왠지 즐겁게 들렸다. 아주 친한 사람, 어쩌면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이비는 잠깐 떨었던 것도 잊고 심통이 나서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이상한 사람이 한 말을 왜 해요, 아저씨도 똑같이 이상해요.”

이비는 그렇게 투덜대며 남아 있던 긴장을 털어 냈다.

빗소리가 이어졌다. 장작은 타닥대며 타올랐고, 포근한 담요에 파묻힌 이비는 어느새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이비는 졸음이 쏟아지는 걸 느끼면서도 점성술사의 말을 몰래 곱씹었다.

이 세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말이 왠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이비에게 세상은 이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완벽하지 않다는 말이 이비의 세상에 균열을 일으켰다.

점성술사의 말처럼, 아니, 누군지 모를 이상한 사람의 말처럼 이 세상이 완벽하지 않다면, 그래서 내가 기대한 일이 항상 당연한 게 아니라면.

조금은 믿어 봐도 괜찮지 않을까?

꾸벅꾸벅 졸던 이비가 결국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자 점성술사가 다가와 이비를 안아 들었다.

이비가 놀라서 숨을 들이켜자 점성술사가 속삭였다.


“괜찮으니까 그냥 자.”

다정한 목소리였다. 더는 거절할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목소리에 이비는 결국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곤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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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대는 법을 배운 지 어언 8년. 그럼에도 인간은 역시 기댈 것이 못 된다는 결론으로 회귀한 이비 아리아테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땋고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전날 밤 몬트라 후작을 때려잡은 이비에게 오늘은 전시에 준하는 중요한 날이다.

그래서 심기일전의 뜻으로 머리를 땋고 하늘색 리본을 질끈 묶었지만, 사실 이비의 마음은 영 다른 곳에 있었다.


―괜찮으니까 그냥 자.

누구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지난 새벽, 너무 익숙한 목소리로 이비를 놀라게 한 백작은 결국 이비를 들어 방까지 옮겨다 주었다.

그는 자는 척하는 이비를 침대에 눕히고 베개를 다듬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나가 버렸다.

그래서 방에 남은 이비는 당혹스러움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온갖 추측이 이비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설마…….’

이비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발상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은 티엔다비스. 순리와 역리가 공존하는 공중대륙. 이 불완전한 세계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불필요하다는 의지가 있을 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비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동시에 어젯밤 백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달을 등지며 다가오던 순간이 선했다. 다행히 와인 병만 가지고 되돌아갔지만, 우연인지 의도인지 이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온 라우렐은 그토록 무신경하고 무례한 사람이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몸과 마음의 온도가 반비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근데 그런 사람이 설마…….


‘안 돼, 싫어, 하지 마!’

이비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이 불편한 발상을 구깃구깃 접어 머릿속 어딘가에 던져 두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당장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이비는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찰싹 때렸다.

그러곤 다시 정신을 다잡고, 어느 때보다 결연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다채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비는 그것을 외면한 채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화려한 응접실에 도착한 이비는 곱게 무릎을 굽혔다.


“간밤 평안하셨나요?”

이비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일찍 불러 주셨네요, 몬트라 후작님.”

그러자 눈이 꺼멓게 죽은 카셀 몬트라가, 이비를 더 격렬히 노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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