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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같은 목소리 (50/129)


50화. 같은 목소리
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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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버린 사람을 왜 믿어야 해요? 그렇게 갔으면 끝이지 이제 와서 뭘 다시 믿으라는 거예요?”

이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마치 사자에게 볏짚을 먹인다는 소릴 들은 사람처럼 그 목소리엔 투명한 의문만 가득했다.

그래서 시온의 마음은 또 한 번 까맣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저주받은 그가 드러낼 수 있는 건 흔들리는 시선뿐이었고, 그마저도 지천의 어둠이 감춰 버렸다. 결국 이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시온만 또다시 비밀에 파묻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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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했군요.”

한참 후 시온이 힘겹게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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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하게 버리고 떠난 인간을 믿으라니.”

여느 때처럼 무감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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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인 척 생색만 내다 사라진 위선자는 당연히 믿을 게 못 되죠.”

그래서 이비는 시온이 평범하게 수긍한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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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면서 얼굴도 보이지 않은 음험한 인간을 믿을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곧 이상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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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주제를 알고 곱게 사라질 것이지, 괜한 짓을 벌여서 발목이나 잡는 인간은 믿지 않는 게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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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이비가 당황해서 중얼댔다.

점성술사를 꼼꼼히 까 내리는 백작의 태도가 이상했다. 처음엔 빈정대는 건가 싶었는데, 가만 들어 보니 딱히 화를 내거나 비꼬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태도는 오히려 죄를 고백하는 수도사 같았다. 차분하고 진지하며 어딘지 주눅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태도로 남을 욕하고 있다.

이비는 이게 무슨 행위인가 싶어 어리둥절했고, 그 사이 시온은 덤덤히 쐐기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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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마따나 그자만 아니면 나와 피곤하게 얽힐 일도 없었을 텐데, 이 정도면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겠네요. 끝까지 걸림돌밖에 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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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백작님. 함부로 단정 짓지 마세요.”

듣다 못한 이비가 반박했다. 그러자 시온이 이비를 돌아보며 텁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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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틀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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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려요. 걸림돌이란 말도,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도 다 틀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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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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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아저씨를 만난 건 나한테 가장 다행인 일이고, 나한테 딱 한 번 일어난 기적이에요!”

시온의 물음에 이비가 단호히 대답했다. 그러곤 자신의 낯간지러운 발언에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시온은 이비의 얼굴이 또 터질 듯 빨개졌을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이비를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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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믿는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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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믿어요, 하지만 소중한 건 별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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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떻게 별개가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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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하지만 날 두고 간 건 사실이고, 그렇다고 그냥 잊기엔 나한테 너무 큰 걸 준 사람이니까요.”

이비는 이렇게 말하고 자신의 대답에 놀랐다. 저주가 끄집어 낸 속마음이 새삼 절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비가 뒤늦은 자각을 한 사람처럼 굳어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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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뭘 줬는데?”

분명 사적인 질문은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시온은 그걸 까맣게 잊었는지 무례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이비는 그에게 질색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해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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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자일 때 옆에 있어 줬어요. 온 세상이 나를 빼고 돌아갈 때, 그래서 내가 나인 것조차 잘 믿기지 않을 때 날 발견해 줬어요. 필요도 쓸모도 없는 나를 이유 없이 아껴 줘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해 줬어요. 이 세상이 항상 나쁘지 않다는 걸 가르쳐 줬어요.”

그러나 말을 이어 가며,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고백을 입 밖에 내며 이비의 엉킨 기분은 엉뚱한 방향으로 풀렸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분하거나 창피해서가 아니라, 조금 슬프고 괜히 벅찼다.

분명 자신의 마음인데도 말로 새롭게 표현하니 그 의미가 너무 선명해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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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까지 내가 살던 세상은 희망도 도움도 없었는데, 나한테만 너무 잔인한 세상이었는데 아저씨가 와서 바꿔 줬어요. 기적이 있고 구원이 있는 세상을 나한테 줬어요. 그래서, 만약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이비는 목이 메는 걸 느꼈다. 저주가 아니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말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비를 사로잡은 저주는, 묻는 말에 반드시 진심을 말하게 하는 그 저주는 이비의 솔직하지 못한 입술을 열어 기어이 고백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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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살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겨우 말을 맺은 이비는 황급히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가득 고인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철이 들기 전부터 혼자였던 이비는 단 하루를 살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쳤다. 이비의 세계는 그토록 치열하게 발버둥 쳐야 간신히 유지되는 세계였다.

척박하고 악랄한 세계, 나 아닌 행운아들만 그럭저럭 유복한 세계, 그렇게 나만 빼고 잘만 돌아가던 냉랭하고 잔인한 세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난 당신이 내 세상을 바꿔 주었다. 단지 보살펴 준 게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 세상이 내게도 온정을 베푼다는, 이제껏 믿을 수 없던 사실을.

그 다정함은 나를 살게 한 구원이고 그와의 만남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그런데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라니.

간신히 눈물을 말린 이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백작에게 따질 게 많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 것도, 또 남의 속내를 억지로 털어놓게 만든 것도 화가 났다.

그래서 이비는 분한 얼굴로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백작이 이미 이비를 보고 있었다. 말없이, 고요히. 어두운 와중에도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박혀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짙었고, 그래서 이비는 조금 당황했다. 왜인지 사자를 만난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이비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항의하려는데, 백작이 돌연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그가 한 손으로 벤치의 등받이를 짚으며 몸을 기울이자 둘 사이의 공간이 너무 쉽게 메워졌다. 백작의 그림자가 장막처럼 드리우자 이비는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백작의 넓은 어깨가 이비의 시선을 내리눌렀다. 조금 다가온 것뿐인데 이비는 갇히거나 깔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백작이 이비를 향해 손을 뻗자 그건 단지 기분이 아니라 예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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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손길에 얼어 있던 이비가 숨을 크게 삼켰다.

그대로 백작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백작의 커다란 손이 이비의 몸을 지나쳤다.

그 손은 그대로 이비 옆에 놓인 간식 바구니에 닿았고, 이비의 무릎 위로 팔을 드리웠던 백작은 바구니에서 술병을 꺼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껏 긴장했던 이비는 어안이 벙벙해 백작을 쳐다봤다.

하지만 백작은 이비가 쳐다보든 말든 무시하며 와인을 병째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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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 대면 어떡해요!”

이비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백작은 아직 넉넉한 이비의 잔을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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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잔이면 내일 아침까지 충분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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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거든요!”

백작의 뻔뻔함에 발끈한 이비가 술잔을 호기롭게 들이켰다.

하지만 호기로운 건 술을 입에 머금을 때까지였고, 이후엔 차마 삼키지 못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독한 맛, 예상되는 거북함, 뒤이어 찾아올 어지러움, 또 다음날의 고통.

입 안의 술을 삼키지 못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이비는 역경에 강하지만 불필요한 고통은 반드시 피하는 성격이었다.

이비가 그 상태로 고뇌하자 백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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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볼 테니까 뱉으시죠.”

그렇게 말하면 더더욱 뱉을 수 없다.

결국 이비는 백작을 노려보다가 입안의 술을 꼴깍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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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하고는…….”

그 모습에 백작이 다시 혀를 찼다. 그래서 이비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덕분에 시온은 안 그래도 술렁이던 마음이 한층 더 심란해졌다.

이비 아리아테는 얄밉다. 그런 주제에 또 귀엽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을 속절없이 녹게 만든다.

아까도 그랬다. 이비가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써 담담히 말할 때, 그러고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하늘을 보며 연신 밭은 숨을 내쉴 때.

시온은 그 모습을 마냥 지켜보다가 크게 실수할 뻔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버린 것이다.

의도는 스스로도 모른다. 머리라도 쓰다듬으려 한 건지, 뭘 어쩌려고 했는지.

어쨌든 그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고, 이비의 경계 가득한 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때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와인 병을 낚아챈 건 그 생애 가장 위대한 판단이었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이 술병을 쥔 시온은 자괴감을 삼키며 와인을 들이켰다.

아까만 해도 죄다 갈려서 재가 날리던 마음이 어느새 비 맞은 잔디처럼 참방대는 게 느껴졌다.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더 달갑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바라고 있었다. 이비 아리아테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싶지 않다고.

.
.
.

어느덧 새벽이 되었다.

이비는 여전히 수국정원에 있었고, 깜빡 잠이 들어 무릎에 이마를 파묻고 있었다.

찬 공기에 어깨가 오들오들 떨렸다. 그래서 설핏 깬 이비는 추운 것과 귀찮은 것 중 어느 쪽의 편을 들어줄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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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우면 그만 들어가시죠.”

그때 옆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퉁명하고 까칠하고, 참 곱지 않은 목소리였다.

귀가 멀쩡히 열려 있지만 이비는 못 들은 척했다. 역시 귀찮음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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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어쩌라는 거야…….”

이비가 잠든 척하자 백작이 짜증을 냈다. 그래서 이비도 비몽사몽한 와중에 성질이 났다.

그냥 가면 될 것이지 왜 신경질이람. 누가 같이 있어 달랬나?

이비가 속으로 불평하는데 어깨로 뭐가 툭 떨어졌다. 커다란 담요 같은 것. 이비는 거기 옅게 밴 냄새를 맡고 그게 백작의 코트인 걸 깨달았다.

그의 옷은 여태 벽난로 앞에 걸어 둔 것처럼 따뜻했다. 그래서 이비는 저도 모르게 안심하듯 숨을 내쉬었다.

이비는 추위를 많이 타서 따뜻한 걸 좋아했다. 하지만 포근한 체온을 느낄 기회는 잘 없었다. 집사는 이비 못지않게 몸이 차가운 사람이고, 동물을 무서워해서 개나 고양이를 끌어안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백작이 걸쳐 준 코트가 싫지 않았다. 본체에 대한 불만과 원한의 높이는 나날이 갱신 중이지만, 그래도 이 아늑함은 달가웠다.

아, 그러고 보니 아저씨도 몸이 따뜻했어. 그래서 손을 잡으면 항상 기분이 좋았어.

멍하니 생각하던 이비는 더 깊이 잠들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등과 다리 밑으로 단단한 팔이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이비는 곧장 짜증을 내며 뒤척였다.

아, 왜 이래. 누가 건드리래.

이비는 시온이 자신을 안아 들려고 하는 걸 깨닫고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런데 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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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니까 그냥 자.”

잠든 아이를 달래듯, 온화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항상 못되게 나쁘게 말하던 백작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이비는 그를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굳어 버렸다.

착각인가?

방금, 아저씨랑 목소리가 똑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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