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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눈치 보는 백작님 (49/129)


49화. 눈치 보는 백작님
2022.11.17.



“그것만 아니면 저나 백작님이나 이렇게 피곤하게 엮일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이비는 가볍게 푸념하며 백작을 돌아봤다.


“덕분에 백작님은 제 보모 노릇까지 하셔야 하니 이걸 어쩜 좋아요.”

이비의 장난스러운 자조에 백작도 이비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더니 여느 때처럼 차갑게 대꾸했다.


“보모 노릇을 할 틈이나 준 적 있으신지.”

“그야 보모가 필요한 나이는 지났으니까요.”

“집사한테는 아직 잔소리를 들으면서 말이죠.”

“음, 뼈아픈 지적이네요. 이 문제는 조만간 극복하겠어요.”

이비가 명랑하게 다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깜찍함에 웃겠지만, 백작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마냥 냉랭했다. 게다가 뭐가 답답한지 자기 가슴팍을 주먹으로 연신 내리치고 있었다.

덕분에 분위기를 풀어 보려던 이비만 애꿎게 불편해졌다.

애당초 이비는 혼자 있고 싶었다. 백작이 찾아왔을 때 ‘으, 방해꾼’하고 질색한 것도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래도 원만히 지내야 하는 백작님이라 착하게 옆자리도 내줬는데, 정작 백작은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계속 쌀쌀맞게 굴고만 있다.


“백작님, 그냥 들어가셔도 돼요. 저도 혼자 있는 게 편하고요.”

그래서 보다 못한 이비가 말했다.


“의무에 충실하신 건 알지만, 괜한 고생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의무에 충실한 걸 알면 이쯤 타협하시죠.”

“타협이요?”

“후작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어차피 성녀가 되기도 그른 것 같은데.”

하지만 백작은 여전히 못돼먹게 말했고, 결국 이비의 이마에도 힘줄이 돋았다.


‘이 인간이 왜 안 가고 이러나 했더니…….’

이 얘길 하려고 그랬나 보다.

넌 이제 성녀 되기 틀렸다, 그러니 내 말 들어라, 이딴 소릴 하려고.

백작의 말마따나 카셀의 변심으로 이비가 성녀가 될 가능성은 또다시 희박해졌다.

이건 등꽃제에 참여한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비는 무신경하게 말하는 백작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심지어 그는 이비가 곤경에 처하길 기다린 사람처럼 굴었다.


“깜빡했네요. 백작님이 제 좌절을 바라시는 거. 원하는 대로 돼서 기쁘시겠어요.”

“딱히요. 의무에 희비가 있을 리가.”

“기뻐하셔야죠. 이것도 백작님이 애쓰신 결과인데.”

“내가 애써서 카셀 몬트라가 당신을 우습게 여긴 거였군요. 동의하진 않지만 탓하고 싶다면 편히 하시길.”

백작의 차가운 조롱에 이비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이 백작님은 말을 가릴 필요가 없는 사람답게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해서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카셀 몬트라가 이비 아리아테를 우습게 여긴다는 말이 딱 그랬다. 이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비에겐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은 말이었다.

이비는 그 말이 뼈아파서 입술을 깨문 채 백작을 노려봤다.

하지만 다리를 꼬고 앉은 백작은 정면을 주시하며 그 시선을 외면했고, 그 우아한 자태에 이비는 더 약이 올랐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성녀가 되는 건 틀렸으니 이제 순순히 내 말 들어라? 약속대로 돌봐 줄 테니 얌전히 원하는 거나 말해라?”

부아가 치민 이비가 백작에게 따져 물었다. 막 후작 놈을 쥐어패고 온 직후여서 이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도전적이었다.

그러니 저 오만한 백작이 마주 성질을 부릴 법도 한데, 왜인지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무시당한 느낌에 입술을 잘근 물었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명백한 자격지심이지만, 자신을 우습게 여기던 카셀 몬트라가 이 남자에겐 오히려 우스운 상대라는 사실도 새삼 짜증 났다. 그러니 이 최상위 포식자에겐 이비 역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존재일 거다.

생각만으로도 불쾌해, 이비는 그의 옆모습을 노려보다가 일부러 활기차게 말했다.


“알겠어요, 제가 원하는 삶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셨죠? 그럼 백작님께서 의무를 다하실 거라 믿고 말할게요. 저는 대공비가 되고 싶어요, 도련님.”

이비의 앙큼한 요구에 백작의 가면 같은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놀란 듯 이비를 쳐다보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심입니까?”

“아뇨, 도발을 의도했으나 오히려 자학이 된 거짓말이에요. 저는 백작님 같은 시동생을 갖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백작이 제대로 추궁하기도 전에 이비는 사실을 자백했다. 그러곤 얼굴이 빨개져서 자기 무릎을 내리치고 울분을 토했다.

이 망할 저주!

허세를 부리려다가 속내가 털린 이비는 억울함과 창피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와중에 벤치에서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뭔가 하며 옆을 보니, 백작이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린 채 안 웃는 척 웃고 있었다.


‘웃지 마!’

이비는 이렇게 빽 소리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대신 곁눈질로 백작을 째려보며 부득 이를 갈았다.


‘저 인간도 그냥 질식시켜 버릴까?’

카셀 몬트라에게 했던 것처럼. 그놈처럼 쓱싹 넘어트린 다음 등짝을 발로 꾹꾹 밟아 주면 아주 통쾌할 거다.

달콤한 충동이 이비를 유혹했지만, 이비는 욕망에 넘어가는 대신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막 나가기로 했어도 백작에게 덤빌 순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후환이 두려웠다.

모처럼 축배를 들고 있었는데, 방해받는 걸로 모자라 이렇게 굴욕을 삼켜야 한다니. 억울해진 이비는 책상다리하고 있던 무릎을 모아 꼭 끌어안았다.

그냥 자리를 뜰까도 싶었다. 하지만 백작을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꿍하니 버티는데 문득 비스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비스의 이층집에서 백작을 처음 만난 날, 그날 밤도 백작은 저렇게 오만하고 재수 없게 굴었다. 그리고 이비는 그런 백작의 뺨을 때려 주지 못한 것 때문에 밤새워 뒤척였었다.

그 일을 떠올린 이비는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뭐든 다 해 준다더니 대공비는 또 안 되나 보네요.”

“정말 원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원하는 것과 결정하는 건 별개죠. 대공비가 되는데 말 안 듣는 시동생쯤이야 문제도 아니죠.”

“대공비는 그렇게 속 편한 자리가 아닙니다. 라우렐 대공 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면서 그런 말이 나오시는지.”

“그래서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성녀도 안 된다, 대공비도 안 된다, 조건 참 까다롭네요. 그냥 솔직히 말씀하세요. 주제도 모르고 대공 가에 들어올 생각을 하냐고요.”

이비가 퉁명한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백작이 다시 쳐다봤다. 하지만 이번엔 이비가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해도 백작이 사납게 노려보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 이비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화가 난 마음으로 덮으며 버텼다.

그러길 한참, 백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말이 변명 같았나?”

“아뇨, 변명 같진 않았어요. 명령 같았죠.”

무시하고 싶은데 대답이 저절로 나왔다.

이비는 그것도 짜증 나서 꼭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파묻었다. 그러곤 이미 견고한 마음의 담을 더 높이 쌓아 올렸다.

그리고 이비의 기분이 엉망인 걸 알아챈 시온은 그보다 훨씬 처참한 심정으로 자기 자신과 온 세상을 저주하고 있었다.


‘젠장.’

시온은 이렇게 씹어 뱉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곤 벽을 치듯 웅크리고 앉은 이비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몰래 지켜봤다.


 
정말 의미 없는 소리지만, 입 밖에 내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더더욱 무의미한 변명이지만 시온은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괜한 언쟁으로 이비를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이 자리에서 성녀 운운하며 시비를 걸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

안 그래도 시온은 여기까지 기어 나온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대고 이비가 필요 없으니 들어가라는 소릴 연이어 해 대니, 심지어 아주 배려하듯 말하니 기가 찬 나머지 빈정대고 말았다.

그렇게 한 마디씩 툭툭 주고받은 끝에 이비는 완전히 화가 나 버렸고, 시온은 아주 낯선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소위 눈치가 보인다는, 그 생애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시온은 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침묵하는 이비 때문에 난생처음 정서불안을 경험했다. 이 분위기가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걸 자각하기 무섭게 그의 드높은 자존심도 덩달아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조하다니, 누가, 내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 시온 라우렐에게 눈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시온의 고고함이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분개했다. 그래서 그는 어지러운 마음을 싹 다 치워 버리고 어느 때보다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건데, 그렇게 느꼈다면 내 실수인 것 같습니다.”

정말 엄중한 목소리로 꼬리를 내리며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비는 그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정말 대공 가에 들어오고 싶은 거면 당장 내일이라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대공비가 되는 건 논외이지만.”

오해를 풀고자 이렇게 덧붙여도 마찬가지였다. 이비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시온은 왠지 더 조바심이 나서 저도 모르게 조르듯 말했다.


“솔직히 대공비든 대공 가든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굳이 이런 걸로 실랑이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럼 이 정도도 안 하고 무조건 백작님 말을 들어야 하나요?”

드디어 이비가 대답했다. 물론 이비의 의지는 아니었고, 그마저도 기가 막힌다는 듯 반문의 형태였다.

그리고 시온은 이비의 대답을 듣고 왜 이런 언쟁이 시작됐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비는 시온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대공비 운운하며 그를 시험했다. 시온을 돌봐 준답시고 먹다 남은 빵이나 던져 주는 놈 취급하며 그의 식탁에 올라가 그가 내치기를 기다린 거다.

이 견고한 불신에 시온은 머리로 열이 몰리는 걸 느꼈다.

역시 이비는 그를 대단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이비 아리아테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또 얼마나 절박했는지 까맣게 모른 채 그를 의심하고 불신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비는 믿어야 했다. 시온이 아니라 이비를 부탁한 그 남자를, 적어도 이것보다는 더 신뢰해야 했다.

시온은 끓는 납을 삼킨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뻐근해서,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날 못 믿는 건 이해하지만, 당신을 맡긴 사람은 좀 믿어도 되지 않습니까?”

“왜요?”

그러자 이비가 다시 대답했다.


“날 버린 사람을 왜 믿어야 해요? 그렇게 갔으면 끝이지 이제 와서 뭘 다시 믿으라는 거예요?”

이렇게 되묻는 이비의 목소리는 냉담하지도 꼬여 있지도 않았다. 그저 투명하게 의문을 표할 따름이었다.

이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온은 자신의 일부가 재가 되어 부서지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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