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비참한 백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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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비참한 백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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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비참한 백작님
2022.11.14.
고래고래 소리치던 카셀 몬트라가 돌연 조용해졌다.
그러자 그의 등에 앉아 있던 이비가 일어나 그 남자를 발로 뻥 차 버렸다.
카셀은 정신을 잃었는지 그대로 나자빠졌고,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온은 기분이 아주 묘해졌다.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막 나갈 줄은 또 몰랐네.
시온은 수국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망대에서 감탄 반 당황 반의 심정으로 카셀 몬트라의 등짝에 발을 비비적대는 이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이비는 카셀의 작태에 충격을 받고 기절했다.
때문에 시온은 이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당연히 의기소침할 줄 알았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일 때는 영락 없이 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이비는 울기는커녕 독이 바짝 오른 얼굴로 대뜸 펜과 종이를 찾았다. 그러더니 원한을 쏟아 내듯 무언가 휘갈기기 시작했다.
깃펜을 쥔 이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뒤통수에는 뒤통수’, ‘오늘 밤 피바람이 불 것이다’ 같은 말을 중얼대며 음산하게 웃었고, 시온은 대체 어쩔 셈인가 싶어 이비를 계속 지켜봤다.
그런데 그 후 이비는 시온에게 간섭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대신 서류 작성을 마치자마자 시온에게 신세를 졌다며 꾸벅 인사했다. 그러더니 의자와 가구를 밟고 천장의 비밀통로로 으쌰으쌰 기어 올라갔다. 시온이 올려주려고 무심코 뻗은 손을 무안하게 만든 채, 그렇게 혼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로써 덩그러니 혼자 남은 시온은 묘한 소외감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그의 영역에서 생긴 문제는 항상 그에게 먼저 보고되었다.
동녘의 경계에서도 비스 남동부의 작은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총사령관이라는 지위를 가졌을 때는 물론, 성격 나쁜 일개 선생일 때도 그는 늘 주변의 호소를 듣고 해결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비는 제 바로 옆에 있는, 쓰러졌던 동안 눕히고 진료까지 봐 준 시온을 깨끗이 무시한 채 자기 갈 길을 후다닥 가 버렸다.
이에 시온은 왠지 버림받은 기분을 느꼈고, 그는 이 비이성적인 감정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이윽고 그가 내린 결론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찌질했다.
시온 라우렐은 태생적 지배자로서 제 영역의 것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복합적인 이유로 이비 아리아테 역시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한 시온은 이비가 이 고충과 좌절을 자신에게 공유하길 당연히 기다렸다. 전날 후작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이비가 한마디만 하면 나설 생각이었다. 상황도 다 아는 마당에 조금만 기대면 원하는 대로, 어쩌면 그 이상도 해 줄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비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알아서 추스르고 알아서 싸우러 나갔다.
그래서 대리전을 준비하던 제왕은 꽤 무시당한 느낌에, 심지어 권리마저 침해당한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한테 기댈 줄 알았는데 안 그래서 섭섭하다는 거였다.
물론 소모적인 것을 싫어하는 백작님은 이 기분이 아주 시답잖고 쓸모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차라리 이 상황에 관심을 끄려고 했다. 도와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뭐 하러 마음을 쓰냐,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으니 저러겠지, 하고 덮어 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온은 불과 반 시간 만에 신경질을 내며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정말 참견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서 고생에 나선 백작님은 부관과 보좌진도 다 떼어 놓고 혼자 이비를 찾아냈다. 그러곤 그리 좋지도 않은 눈으로 이비를 지켜보았다.
혹여 카셀 몬트라가 애먼 짓을 할 것 같으면 벼락이라도 떨어트리고 모르는 척할 셈이었다.
그런데 이비는 시온이 지켜보는 보람도 없이 카셀을 혼자 제압해 버렸고, 덕분에 시온은 소외감뿐만 아니라 희미한 박탈감마저 느끼는 중이었다.
‘……돌아갈까?’
시온은 지금 제 꼴이 한심한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만 조용히 퇴장하려는데, 어느새 분풀이를 끝낸 이비가 엎드린 카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로써 남자는 반 바퀴 데굴 굴러 바로 눕게 되었고, 이비는 이제 볼일 없다는 듯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더니 수국 화단 쪽으로 걸어가 그곳에 미리 숨겨 둔 물건을 쓱 꺼냈다.
‘저건 또 뭐야?’
시온은 인상을 잔뜩 쓰고 이비가 꺼낸 물건을 쳐다봤다.
설마 후작의 숨통을 끊을 무기는 아니겠지.
시온의 우려와 달리 그건 흉기와 거리가 멀었다. 손잡이가 달린 그 아기자기한 물건은 나들이에 잘 어울리는 바구니였다.
그걸 본 시온의 의문은 한층 더 깊어졌다.
아닌 밤중에 웬 바구니인지, 혹시 도주하려고 짐이라도 꾸린 건가?
시온은 다소 지친 기분으로 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비는 그걸 까맣게 모른 채, 정말 나들이 가는 소녀처럼 바구니를 흔들며 수국 정원 저편으로 경쾌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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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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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 시온이 다시 찾아낸 이비는 수국 정원 구석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한적한 곳에서 이비는 별로 다소곳하지도 얌전하지도 않은 자세로, 그러니까 벤치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와인 잔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성한 수국 잎을 헤치고 나타난 시온을 보고는 이렇게 중얼댔다.
“으, 방해꾼.”
“……필요할 땐 실컷 끌고 다니더니 필요 없다고 방해꾼 취급을 하시겠다.”
이비의 노골적인 불평에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시온은 울컥하며 이를 갈았다.
그러자 이비는 잠깐 딴청을 피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타당한 지적이네요. 방금 건 제가 무례했어요. 기왕 오셨으니 앉으세요.”
이비는 선심 쓴다는 듯 벤치 끝으로 이동했다. 그러곤 헤실헤실 웃으며 와인이 반쯤 차 있는 투명한 와인 잔을 흔들었다.
“그런데 잔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비가 모처럼 자리를 만들어 줬건만, 시온은 이비의 옆에 앉는 대신 이비가 손에 든 잔과 벤치 아래 놓인 바구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까 이비가 달랑달랑 들고 가던 바구니는 나들이용 간식 바구니가 맞았다. 그 안에는 막 마개를 뜯은 와인 병과 이런저런 간식거리가 담겨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보시다시피 축배를 들고 있죠.”
이비는 무엇에 대한 축배인지는 말하지 않고 우아하게 잔을 들었다.
그러더니 반 모금 찔끔 마시고 인상을 썼다. 윽, 써. 이비는 시큼한 술맛에 질색하며 급히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그래 놓고 다시 와인을 음미하는 척 잔을 찰랑찰랑 흔들었다.
“딱히 애주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맞아요, 그냥 기분만 내는 거예요.”
“그런 거면 더 안전한 날 안전한 곳에서 하시죠.”
“안 돼요, 집에서 마시면 집사가 잔소리한단 말이에요.”
이비의 입에서 집사 소리가 나오자 시온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그런 간섭받을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맞아요, 지났죠. 근데 그래요, 치사하게.”
하지만 이비는 시온의 표정을 못 보고 태연히 종알댔다.
그래서 소모적인 감정을 싫어하는 백작님은 아까보다 조금 더 진저리나는 상황에 부딪혔다.
이비 아리아테가 말한 그 집사는 반반하게 생긴 적발의 남자였다.
이비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다닌, 스스럼없이 부부행세를 한, 심지어 같은 방까지 사용한.
동시에 아마네세르의 통찰안을 가졌고, 수상할 정도로 몸이 날쌔며, 이비를 필사적으로 감싸는.
일개 집사가 대체 왜?
시온은 디에스라는 이름의 집사가 사사건건 거슬렸다. 그는 이비 옆에 그런 게 붙어 있다는 소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신경이 쓰였고, 신경 쓰이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그냥 넘어가자니 제 못된 성미가 얌전히 굴지도 않았다.
그래서 시온은 속으로 신경질을 내고 삼키길 반복하다가, 왜 이런 걸 고민해야 하나 싶어 그냥 입을 열었다.
“그 집사는…….”
“잠깐, 질문할 거예요?”
그런데 이비가 손을 내밀며 시온의 말을 막았다. 그러더니 퍽 단호한 투로 말했다.
“백작님. 앞으로 저한테 사적인 질문을 하실 때는요, 그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먼저 물어봐 주시겠어요? 제가 백작님 앞으로 온 편지도 아니고 마음대로 펼쳐 봐도 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이비는 얄밉게 또 한 번 선을 그었다.
타당한 주장이지만 계속 밀려나길 반복한 시온은 기분이 꽤 나빴다.
그래서 집사든 뭐든 내 알 바냐 싶어 그냥 가 버릴까 생각했다. 애당초 그는 방해꾼 취급을 참으며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 더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냥 돌아서면 되는데, 시온은 어째선지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그는 하늘 같은 자존심을 잠시 접고 어른스러운 척 이비의 요구에 따랐다.
“……그 집사에 대해 질문해도 됩니까?”
“아니요. 안 돼요.”
하지만 이비는 이마저도 단칼에 날려 버렸고, 시온은 방해꾼 소릴 들었을 때보다 울컥해서 이비를 노려봤다.
그러나 여상히 방긋대는 이비 앞에서 그의 서슬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비의 웃는 얼굴 위로 이비가 쓰러지기 직전에 보인 창백한 얼굴이 겹친 탓이었다.
하나도 안 괜찮다면서 숨도 못 쉬던 주제에, 어느새 말짱해져서 웃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아까 그 부서질 것 같은 모습보단 이렇게 까부는 모습이 훨씬 낫다는 점이었고, 결국 시온은 다시 한 수 접으며 이비가 내준 벤치 끝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가 옆에 앉자 이비가 놀라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온은 모르는 척 물었다.
“여기 언제까지 있을 겁니까?”
“어수선한 게 가라앉을 때까지요. 그런데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밤새 꽃놀이라도 하려고요.”
이러려고 챙긴 간식이군.
이비의 대답에 시온은 간식 바구니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 사이 이비가 되물었다.
“백작님은 언제 들어가실 거예요?”
시온은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쉬었고, 이비는 그 얼굴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빚이 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가 보네요.”
갑작스러운 빚 얘기에 시온이 고개를 들자 이비는 시선을 피해 다시 술잔을 입에 댔다.
물론 이번에도 참새가 물을 쪼듯 혀끝만 살짝 적시고 말았다.
시온은 그럴 거면 술을 굳이 왜 마시냐 싶었지만, 이비는 그렇게라도 입술에 바른 향기가 마음에 들어 평소보다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도 보고 계셨죠?”
“네.”
“왜요? 후작이 때리기라도 할까 봐요?”
“설마 몸싸움까지 이길 줄은 몰랐으니까.”
시온의 솔직한 대답에 이비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설마 제가 대책 없이 일만 저지를 줄 아셨어요? 절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비가 장난스럽게 따졌다. 그러더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백작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저씨가 괜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이비는 시온이 여기까지 자신을 쫓아온 게 점성술사에게 진 빚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시온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자 이비가 정말 유감이라는 듯 푸념했다.
“그것만 아니면 저나 백작님이나 이렇게 피곤하게 엮일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동조를 바라듯 시온을 쳐다봤다.
그때 이비의 눈빛은 아무런 악의도 의도도 없이 오히려 평소보다 순진했다.
그래서 시온은 소외감과 박탈감에 이어 또 한 번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그 감정의 정체는 비참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