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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알고 보니 사자 새끼 (47/129)


47화. 알고 보니 사자 새끼
2022.11.10.



“카셀, 카셀!”

살기등등한 얼굴로 걷는 카셀을 그의 친구가 다급히 붙잡았다. 그러더니 자길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카셀에게 완곡히 말했다.


“아리아테는 탑의 보호를 받고 있어, 잊지 마.”

그 충고에 카셀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는 더 진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왜, 내가 여자애를 때리기라도 할까 봐?”

카셀의 벗들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반쯤 돌아 있었다.

카셀은 머저리 같은 제 친구들을 노려보다가 이를 갈며 웃었다.


“아무도 따라오지 마. 따라오는 놈은 죽일 거야.”

카셀은 방해받기 싫었다.

그래서 저를 뒷바라지하는 자들을 모두 칼같이 떼어 내고, 혼자서 이비 아리아테가 있다는 수국 정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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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로 환하게 밝혀진 등나무와 달리, 수국 정원은 얕은 달빛 아래 잠들어 있었다.

어둠에 잠긴 수국 너머로 희미하게 불빛이 보였다.

정원 중앙에 놓인 원형 파고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었다.

카셀은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파고라가 가까워지자 작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살랑이듯 부드러운 콧노래였다.

카셀은 그 달콤한 목소리가 이비의 것인 걸 대번에 알아챘다. 그래서 여기까지 걷는 동안 겨우 한 김 식힌 화가 다시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모조리 짓이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파고라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다 몇 걸음을 남겨 두고 눈앞의 광경에 잠시 얼이 빠졌다.

등불이 걸린 파고라 아래 이비가 있었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는 느슨히 땋아 내린 채, 벤치에 앉아 흥얼대는 모습이 마치 달에서 잠시 내려온 여신 같았다.


“하…….”

그래서 카셀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헛웃음을 뱉었다.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저 어여쁜 얼굴로 감히 내 뒤통수를 쳤다는 게, 그래 놓고 도망치기는커녕 절 잡아먹으라는 듯 저러고 있다는 것도.

카셀은 당장 달려들어 윽박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이비는 탑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니 절대 손을 대면 안 된다. 게다가 카셀은 이비 뒤에 배후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이비를 구슬리기 위해 다시 신사의 가면을 썼다.

카셀이 여느 때처럼 우아한 얼굴로 파고라 앞에 서자 이비가 비로소 노래를 멈췄다.


“왜 혼자 있어?”

“이편이 대화하기 좋을 것 같아서요.”

“혼날 짓 한 걸 알긴 아나 보네.”

이비의 자그마한 대답에 카셀은 비틀린 기분으로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런데 그때 불현듯 현기증이 일었다.

젠장, 술 때문인가? 카셀은 눈앞이 핑 도는 느낌에 황급히 중심을 잡았다.


“어지러우면 거기 앉으세요.”

이비가 앉으라고 했지만 카셀은 무시하고 기둥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품에서 자신의 만행이 적힌 종이를 꺼내 보이며 물었다.


“이거 이비가 쓴 거니?”

“네.”

“왜 그랬어?”

“본보기가 필요해서요. 날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려고요.”

뜻밖의 대답에 카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게 이런 발칙한 소리도 할 줄 아는구나.

카셀은 이비가 겁먹었는데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자상하게 다그쳤다.


“그래서 누가 시킨 거야?”

“시킨 사람은 없어요. 혼자 한 일이에요.”

“바보야, 어쩌려고 그래. 이런 일에 함부로 끼면 큰일 나. 지금이라도 말해, 누가 시켰는지 말하면 이비는 봐줄 테니까.”

물론 봐준다는 건 거짓말이다. 카셀은 제게 발톱을 세운 이비를 곱게 둘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나서지 않아도 이비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투서에 필체를 남긴 이상 이비가 자신을 음해하는 데 가담한 사실이 곧 알려질 거다.

관상용 화초나 다름없는 평민 계집이 감히 귀족의 암투에 끼다니, 보수적인 티엔다 귀족계는 이런 하극상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비의 몰락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지만, 카셀은 제 정적을 찾아내기 위해 다시금 이비를 얼렀다.


“내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나한테 이래도 돼?”

“되고도 남죠. 추잡하게 굴어 놓고 그걸 예뻐한 거라고 말하는 자식은 몸과 머리를 분리해 비스와 티엔다에 따로 떼어 놓아야 마땅한걸요.”

하지만 되돌아온 건 평화로운 폭언이었다.

이비는 평소처럼 고운 목소리로 말했고, 그래서 카셀은 그 말의 의미를 한 발 천천히 이해하고 뒤늦게 눈을 부릅떴다.


“추잡?”

“네, 카셀 몬트라 너는 추하고 잡스러운 자식이에요. 잘 타고난 집안이 아니면 아무도 상종하지 않을 저질이고 기껏 잘 타고난 집안의 위상마저 하루 세 번 깎아 먹는 망나니예요. 비열하게 남의 뒤통수를 치는 게 똑똑한 줄 아는 외람된 머저리고 신의도 예의도 모르는 덜된 인간인데 그 와중에 변변치 못한 자기 과시에 심취한 얄팍하고 비루한 사람이에요.”

이비는 상스러운 욕 한마디 섞지 않고 카셀의 사람됨을 꼼꼼히 까 내렸다.

그래서 카셀은 눈을 부라리던 것도 잊고 얼이 빠졌다. 대귀족으로 태어나 이토록 정성스럽게 매도당하는 건 그의 생애 처음이었다.


“너, 너 미쳤어?”

“아니요, 멀쩡해요. 아깐 조금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놀라서 말까지 더듬는 카셀에게 이비가 말갛게 웃었다.

그래서 카셀은 마치 헛것을 본 사람처럼 이비를 멍하니 보다가 한참 후에야 헐떡이듯 웃었다.


“허, 얘 진짜 무서운 애였네. 여태 감쪽같이 속았어?”

카셀이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감탄했다.


“그렇지, 그 천한 본성이 어디 가겠어. 그래도 주워 먹을 게 있으니까 열심히 얌전 떨었구나, 잡스러운 혓바닥을 숨기면서. 나 진짜 상상도 못 했네. 이 정도면 박수라도 쳐 줘야겠는데?”

카셀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돌연 정색하고 싸늘히 짓씹었다.


“천한 게 정신이 나갔지, 어디서 감히…….”

카셀이 악마 같은 얼굴로 으르렁댔다.


“당장 꿇고 빌어, 다 벗겨서 끌고 다니기 전에.”

진심이었다. 저게 탑의 비호를 받든 말든, 지금 기분으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납게 윽박질렀지만 이비는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 모습에 카셀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내 말 안 들려?”

“잘 들려요. 말처럼 들리지는 않지만요.”

이비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고, 카셀은 결국 눈이 뒤집혔다.

참다못한 그가 파고라를 성큼 가로질러 이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카셀이 이비의 머리채를 잡기 전에 이비가 먼저 그의 팔을 낚아챘다. 그러더니 그대로 비틀어 등 뒤로 꺾어 버렸다.


“크악!”

카셀의 건장한 팔이 너무 쉽게 돌아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팔이 꺾인 카셀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당황한 그는 이비를 뿌리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어째선지 제 팔목을 쥔 작은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너, 너 이거 안 놔? 진짜 죽고 싶어!?”

카셀이 윽박지르자 이비는 아니요, 죽기 싫어요, 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그의 등에 털썩 앉아버렸다.


“이익, 너……!”

이비에게 깔린 카셀이 아직 자유로운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쪽 팔도 곧장 붙잡혀 똑같이 등줄기 쪽으로 당겨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미친! 당장 내려와!”

카셀이 무릎 꿇고 엎드린 채 악을 썼다.

믿을 수가 없었다. 체격 차이가 있는데 이렇게 쪽도 못 쓰고 제압당하다니.

더군다나 그를 깔아뭉갠 이비의 몸은 가벼웠다. 그런데 어째선지 조금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아까 들이켠 술 때문인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왠지 어지럽고 숨쉬기도 불편했다.

힘이 빠진 상체는 점점 더 앞으로 기울었고, 결국 카셀의 얼굴이 땅에 닿았다.

그가 순교자 또는 포로의 자세에 안착하자 그 위에 앉은 이비가 돌연 자기 고백을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니까 좋네요. 역시 사람은 솔직하게 살아야 하나 봐요.”

이비는 큰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홀가분하게 말했다. 그러곤 목을 비틀어 자신을 노려보는 카셀에게 인사했다.


“그래서 후작님께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음, 깔고 앉아서 이런 말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후작님도 예의 없는 자식이니까 그냥 이렇게 얘기할게요.”

이비가 등불을 등진 채 웃었다.

그래서 이를 갈던 카셀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역광을 받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비의 분위기가 펑소와 사뭇 달랐다.


 


“후작님 덕분에 많은 걸 깨달았어요. 아까, 누가 시켰냐고 물어보셨죠? 날 얼마나 얕잡아 보길래 내가 한 짓이라고는 의심조차 안 할까요?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비가 카셀의 등에서 느긋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나는 반대로 과대평가하고 있었어요. 태어나길 고귀하게 태어난 티엔다 귀족들은 모두 어려운 사람일 거라고요. 하나같이 무서운 맹수들이고, 내가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일 거라고 말이에요.”

토끼는 토끼로, 사자는 사자로, 까마귀는 까마귀로 살아가지만, 어째선지 사람은 제왕으로 귀족으로 가여운 천민으로 살아간다.

정말이지 이상하지만 견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제비뽑기를 단단히 잘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그런데 후작님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태어나길 곱게 태어나 마냥 쉽게 살았으면서 그게 저 잘난 건 줄 아는 카셀 몬트라는 맹수보다 집돼지에 훨씬 더 가깝지 않을까 싶어진 거예요.”

“지, 집 뭐? 이게 진짜……!”

“가만히 있어.”

“크윽!”

카셀이 다시 몸부림치자 이비가 그의 등판을 철썩 후려쳤다. 상상도 못 한 손찌검에 카셀은 눈을 홉떴고 이비는 엄하게 타일렀다.


“그래야 기절하기 전에 얘길 다 하지.”

기절이라니. 카셀은 그 말을 듣고서야 의식이 흐릿한 걸 느꼈다. 숨도 더 가빠졌다.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다.


“괜찮을 줄 알았지? 가지고 놀다 버려도.”

카셀의 몽롱한 귓가로 이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런데 아니야. 너 잘못 건드렸어. 오늘 일은 새 발의 피고 넌 이제 나한테 계속 혼날 거야. 완전 망할 때까지.”

“네까짓 게, 누굴 망하게 한다고……!”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카셀이 숨을 헐떡이며 일갈하자 이비는 웃으며 반문했다.


“네가 후작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서 저절로 후작이 될 동안 나는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이비가 모처럼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카셀은 숨만 몰아쉴 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무언가 잘못된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비의 말처럼 괜찮을 줄 알았다.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 중요한 조력자가 떠나고 옛 연인들과 더 지독한 악연을 맺었으며 사촌에게는 원한을 샀다. 모두 뼈아픈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곤혹스러운데 이런 짓을 벌인 당사자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며 위협한다.

카셀은 건방 떨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동시에 자신을 깔고 앉은 이비의 낯선 표정과 말투엔 오싹한 위기감을 느꼈다.

카셀은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굴욕감과 낭패감에 신음했다.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떠밀어 벼랑에서 굴러떨어진 가련한 동물은 알고 보니 사자 새끼였다.

그리고 그건 지금 약이 바짝 올라 그를 사정없이 물어뜯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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