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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제까짓 게 원망해 봤자 (44/129)


44화. 제까짓 게 원망해 봤자
2022.10.31.


원래 이비는 카셀의 방에 들어가며 몰래 귀마개를 낄 생각이었다.

평소 그가 하는 말이 대부분 허랑방탕하게 놀리는 소리에 불과하니, 입 모양과 표정을 살피며 눈치껏 끄덕이다가 돌아올 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방에 들어서니, 방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이비는 선뜻 귀를 막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카셀이 방긋방긋 웃으며 이비를 손짓했다.

그 독촉에, 고민하던 이비는 결국 귀마개를 그대로 손에 쥔 채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몸이 좀 어떠신지 궁금해서 왔어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냥 과로야. 요즘 일이 좀 많았거든.”

카셀은 제 정수리에 벼락이 떨어진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말했다. 그러더니 옆을 보며 덧붙였다.


“게다가 아르코 경이 신속하게 대응해 주셔서 아주 괜찮아.”

아르코 경?

그 낯선 호칭에 이비는 카셀을 따라 옆을 봤다가, 뒤늦게 침대 가장자리에 선 여자를 발견했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오늘도 제복 차림인 아르코 영식의 누님, 모렌 아르코가 카셀의 옆에 있었다.

이비가 쳐다보자 모렌이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이비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 화답했다.

대귀족이 연회 중 쓰러졌다. 그러니 연회의 주최자가 극진히 간병하고 살피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리오 투하를 비롯한 투하 가문의 사람들이 이 방에서 나오는 모습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 사람, 모렌 아르코가 여기 있는 건 어색하다. 그는 어제만 해도 후작과 각을 세우며 으르렁댄 사람이다.


‘설마 라우렐 백작이 보낸 건가?’

이비는 아리송해하며 모렌을 다시 쳐다봤고, 그의 표정이 어제보다 경직되어있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이비의 의문이 한층 더 깊어지는데, 카셀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이비는 너무 귀엽네.”

카셀이 흡족한 눈으로 이비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어제 오찬 때도 정말 예뻤는데 말이야. 아, 저녁 연회 때는 더 예뻤겠네. 아깝게 그걸 못 봤어.”

“저도 연회 때 후작님이 안 계셔서 아쉬웠어요.”

“하여튼 예쁜 말만 골라서 하지.”

카셀이 한층 짙어진 눈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비는 이 자리에 있는 게 한층 더 불편해졌다.

누구의 말처럼 비위가 좋아 잘 견딜 뿐, 사실 이비는 카셀 몬트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를 정말 싫어했다.

다정한 척 음흉한 목소리도, 함부로 파고드는 손도, 노골적으로 돌아다니는 시선도 싫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싫은 건 저렇게 대놓고 맛있겠다는 표정을 짓는 미끈한 면상이었다.

이비는 몸서리치고 싶은 기분을 꾹 눌러 넣으며 웃었다. 그러자 카셀이 더 심술궂게 말했다.


“그래도 영 손해 본 기분인데 어쩌나. 아, 차라리 지금 한번 보자.”

“네?”

“어제 입었던 드레스, 지금 가서 입고 와. 나도 좀 보게.”

카셀이 싱글벙글 웃으며 한 소리에 이비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카셀은 더 진득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더 지껄이기 전에 모렌이 먼저 끼어들었다.


“흰색 드레스였습니다. 치마 부분이 마치 튤립 같았죠. 기억에 남네요.”

모렌이 여느 때처럼 단단한 투로 말했다. 그러더니 넌지시 이비를 감쌌다.


“워낙 인상적이어서 다시 보고 싶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이 숙녀를 어제의 연회로 돌려보내서 오늘의 연회가 허전해지면 안 되겠죠.”

모렌이 카셀의 억지를 끊어 버렸다. 그래서 이비는 안도하는 한편 걱정했다.

두 사람이 또 어제처럼 으르렁대면 그사이에 끼어 고생하는 건 본인이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그럼 오늘 밤에 어제 몫까지 즐겨야겠네요.”

그런데 카셀은 뜻밖에도 쉽게 물러났다. 어제와 너무 다른 태도였다.


“대신 이따 안 예쁘면 이비를 혼내야지.”

카셀이 다시 이비를 쳐다보며 가볍게 덧붙였다.

그때 이비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지만 애써 웃었다.

카셀은 이렇게 이비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다. 이비가 강아지처럼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을 제법 귀여워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비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그는 어김없이 정색하거나 이렇게 속삭였다.


―이비야, 나랑 잘 지내야 성녀님이 되지.

그는 이비가 성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따금 이런 식으로 이비를 겁주는 것도 즐겼다.

카셀 몬트라가 그런 인간인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그러니 역겨움이야 평소처럼 참으면 그만이다.

다만 문제는 이 와중에 계속해서 밀려오는 위화감이었다.

카셀이 가볍고 추잡하게 구는 건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데, 주변의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너무 고요하다. 마치 뭘 숨긴 것처럼.

그리고 저들이 실제로 무언가 숨기고 있다면, 그건 분명 이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후작님께 혼나지 않게 노력해야겠어요.”

이비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카셀이 응, 기대할게, 라며 건성으로 말했고, 옆에서 이비를 쳐다보던 자들의 시선은 또 한 번 짙어졌다.

그들은 이비를 우스워하고 있었다. 한심해하고, 또 딱히 여겼다.

하지만 이비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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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셀 몬트라가 사용 중인 이 별장에서 두 번째로 좋은 방은 동관 4층이다.

그리고 시온 라우렐이 사용하는 첫 번째로 좋은 방은 그 바로 아래층, 동관 3층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조금도 헤매지 않고 비밀통로를 지나 카셀 몬트라의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앞서 라우렐 백작이 이 비밀통로로 이비의 방까지 몇 차례 오고 간 덕분에 그 길만 먼지가 닦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비좁은 틈을 지나는 게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드레스를 벗고 가장 간소한 원피스로 갈아입은 이비는 가파른 사다리를 힘주어 밟으며 이를 갈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이 자식아.’

아까 이비가 카셀 몬트라의 방에서 겪은 건 명백한 따돌림과 약 올림이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숨긴다. 그러면서 그걸 또 은근히 티를 낸다.

너 이제 큰일 났어, 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자들의 태도였다.

그들의 기만과 배척은 이비를 꽤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비는 후작의 방에서 나온 후로도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놈들이 숨긴 게 뭔지 직접 알아내기로 마음먹고 비밀통로를 이용해 그의 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쯤인가?’

사다리를 다 오르자 마치 다락처럼 생긴 너른 공간이 나타났다.

엎드려서 기어가야 할 정도로 천장이 낮은 공간이었는데, 그 위로도 먼지가 쓸린 자국이 보였다.

이비는 작은 등을 앞세우고 그 흔적을 더듬어 쫓아갔다.

먼지가 쓸린 자국은 그 공간 중간에서 끊겼다. 그리고 그 주변엔 발자국이 아니라 손자국이 가득했다. 백작이 위에서 내려온 게 아니라 밑에서 올라온 흔적이었다.


‘이 밑이 백작의 방이구나. 그럼 이 위가 후작의 방.’

이비는 제대로 찾아온 걸 알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렇게 기다리길 얼마, 머리 위에서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별수 있나? 그러게, 나설 데랑 나서지 않을 데를 알아야지.”

카셀의 목소리다.

이비를 대할 때만큼 능글대진 않지만, 방금 들려온 건 분명 카셀 몬트라의 목소리였다.


“난 너무 가엽던데.”

“가여울 게 뭐 있어, 예쁘다고 데려갈 사람 주변에 널렸는데.”

그리고 이건 이비의 얘기다.

아직 이름이 나온 것도 아니지만, 이비는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너무 과분했지. 평민에게 성녀라니, 안 그래?”

이어 직감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불길한 예감도 모조리 맞아떨어졌다.

이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언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신음과 비명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비가 필사적으로 숨을 참는 사이 머리 위에선 대화가 이어졌다.


“그럼 지금까지 왜 이비 아리아테를 지지하신 겁니까?”

“대세에 따른 거지. 다들 그 애가 성녀가 되길 기대했으니까. 사실 누가 성녀가 되든 나랑 별 상관도 없고, 이비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런데 그게 주제넘게 구는 걸 보니 안 되겠다 싶더라고.”

카셀 몬트라가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서 이비는 손끝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 헛웃음이 나왔다.

주제넘게 굴었다고? 내가 언제?


“아, 비스에서……. 자기 고향이라고 했죠?”

“고향이든 뭐든 거기서 성녀님 노릇을 톡톡히 하셨다던데, 안 되지 그러면. 밑 대륙 인간들이 한번 들러붙기 시작하면 얼마나 끈질긴데.”

카셀이 끌끌 혀를 찼다.


“못 배워서 금기가 왜 금기인지를 몰라, 그 멍텅구리는. 만약 저게 그대로 성녀가 된다고 해 봐. 밑 대륙 버러지들이 하루가 멀다고 찾아댈걸?”

“안 그래도 저희 아버님과 숙부님도 그걸 걱정하시던데요. 한번 선례를 보여 두면 비스에서 바라는 게 점점 많아질 텐데, 이비 아리아테가 거기 불려 다니다 잘못되면 정화는 누가 하냐고요.”

“나도 들었지. 그래서 성녀는 언니 닮은 리오 투하나 시키고 이비는 티엔다에 고이 모셔 두려고. 쓸데없이 비스 냄새 묻혀 오지 않게.”

카셀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고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이비는 마치 꿈을 꾸듯 멍한 기분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카셀은 더 이상 이비를 성녀로 추대하지 않는다.

대신 리오 투하를 차기 성녀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이비가 비스의 마을을 덮친 독기를 정화했기 때문에.

비스 사람들이 성녀님께 구원받는 데 버릇을 들이면 안 돼서.

이비 아리아테는 티엔다에서 정화를 계속해야 하니까.

이비는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잘 믿기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위에선 이비에 대한 헛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리아테는 여전히 자기가 성녀가 될 줄 알고 있을 텐데.”

“아닌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표정은 모르겠고, 네놈을 죽도록 원망하겠지.”

카셀은 친구의 악담에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어쩐지 다른 대화보다 이비에게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들렸다.


“제까짓 게 원망해 봤자 귀엽기나 하지. 생각해 보니 오히려 좋은데? 마냥 순종적인 것도 지루해.”

그 말에 이비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너무 이상했다.

내 운명을 좌우하는 대화가 저토록 가볍다는 게.

저토록 하찮게 심지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앞날이 결정되었다는 게.

이비는 속에서 무언가 치미는 느낌에 손톱으로 까드득 바닥을 긁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비가 엎드리고 있던 바닥이 돌연 덜컹 하고 열렸다.

이비는 놀랄 틈도 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자기가 떨어진다는 걸 자각할 틈도 없이 무언가에 붙잡혔다.

이비는 핏기가 다 빠져 나간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받아든 남자를 쳐다보았다.

천장에서 떨어진 이비를 두 팔로 안고 선 그는, 시온 라우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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