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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결혼까지 생각했어 (41/129)


41화. 결혼까지 생각했어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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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점성술사 아저씨가 라우렐 백작님인가요?”

이비의 작은 목소리가 시온의 가슴을 갈가리 찢었다.

고통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감정이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할퀴고 뜯었다.

그 선명한 아픔에 시온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이비에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익숙한 감각이 그를 억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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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표정 하나 바꿀 수 없었다.

시온에게 내린 은폐의 저주가 그를 다시 옭아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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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할 수 없지?’

시온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기색마저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비의 까만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여느 때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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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건 아닌가요……?”

시온의 반응을 살피던 이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시온은 그런 이비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저주가 모든 걸 완고하게 막았다.

결국 시온이 할 수 있는 건 어떤 진실도 감정도 드러내지 못한 채 건조한 목소리로 근거를 묻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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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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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아저씨가 백작님을 만났으니까요. 동쪽 경계나 타르데스 전당에 출입할 수 있고, 대공 가의 비밀을 알고, 그런데 대공 가보다 백작님 편을 들 만한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거예요.”

이비의 대답에 시온은 뭐가 어긋났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색할 수 없었고, 이비는 자신이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줄 알고 변명하듯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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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릴 때 언뜻 들었던 기억이 나요. 아저씨가 절 찾으러 왔을 때, 주변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를요. 그 소리가 백작님이 벼락을 떨어트리는 소리랑 거의 비슷했어요. 그래서 아저씨가 선대 라우렐 백작님이 아닐까 생각한 건데…….”

선대 라우렐 백작.

시온은 이 미묘한 오류에 허탈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 역시 드러낼 수 없었고, 이비는 결국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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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닌가 보네요.”

이비가 의기소침해져서 시온을 힐끗댔다.

그런 이비에게 그렇다, 아니다, 비슷했다, 아까웠다, 그 어떤 대답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온을 지배하는 저주는 악마처럼 영리하게 그의 비밀을 은폐했다. 일말의 단서도 흘리지 못하게 그를 통제하고 고립시켰다.

시온에겐 익숙하고도 지긋지긋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이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직전의 충격으로 늘 단조로운 박자를 유지하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이토록 놀란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시온은 제 가슴 속에 남의 심장이 들어와 앉은 착각마저 느꼈다.

시온은 이비의 손을 당겨와 이 박동 위에 대고 싶었다. 그럼 이비가 모든 걸 알아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저주는 시온을 결코 놔주지 않았다.

그로써 원치 않게 빚어 낸 침묵은 결국 이비가 진실을 지나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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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씀 안 하시는 걸 보니까 이건 아닌가 봐요. 음, 그럼 아저씨는 우리 아빠인가요? 나이가 좀 애매하긴 한데 그래도 가능성은 있죠.”

이비가 민망한지 아무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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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아니면 오빠? 삼촌? 사촌? ……의외로 엄마? 귀족은 맞죠? 같이 살 때 보니까 아닌 척하면서 좀 깔끔 떠는 구석이 있던데. 아, 이건 편견이구나. 그게 아니면 감시자라거나, 앗, 혹시 전당에서 점을 치던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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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고개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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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당연히 안 통하겠죠. 죄송해요.”

헛소리를 늘어놓던 이비는 입을 다물며 손으로 자신의 양 뺨을 감쌌다.

그때 이비의 뺨은 보기 드물게 상기되어 있었다. 상당히 창피한 모양이었다.

평소엔 마냥 뻔뻔하게 굴더니 고작 이게 뭐라고 저렇게 민망해하는지.

시온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백작이 앞서 보인 냉랭한 태도 때문에 이비는 그 소리가 실망 섞인 한숨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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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의 비밀이 뭘까 계속 생각했어요. 그래서 몇 가지 떠올리기도 했지만, 어차피 저한테 확신이 없으면 그걸 나열해 봤자 소용없잖아요.”

불안해진 이비가 변명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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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저씨 얘길 먼저 맞춰 보려고 했어요. 저도 알고 백작님도 아는 유일한 사람이고, 나름 연도 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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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접근이었습니다.”

이비의 말에 시온이 담담히 대꾸했다. 진심으로 한 말인데 이비는 어쩐지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더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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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잠깐 봐도 돼요?”

이비의 부탁에 시온이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이비는 손바닥이 위로 간 그 커다란 손을 보다가 머뭇머뭇 뒤집었다.

그러자 상처가 가득한 손등이 드러났다. 오랜 기간 쌓이듯 새겨진, 일부러 이렇게 만들기도 어려워 보이는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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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처는 경계에서 아마네세르를 막느라 생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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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비는 시온의 상처를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온은 이비가 입술을 깨문 채 자신의 손에 집중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비는 백작과 점성술사가 상처마저 닮았는데 왜 자기 추측이 틀렸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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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맞는데 아닌 척하는 건 아니죠?”

이비가 시온을 힐끗대며 볼멘 목소리로 중얼댔다.

시온은 어이가 없어 웃다가 이비의 눈이 심각한 걸 보고 웃음을 지웠다.

시온은 이비가 잘 걷다가 살짝 삐끗했다고 생각했다. 아깝긴 한데 어쩔 수 없고 그럴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이비의 머릿속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이비는 점성술사가 선대 라우렐 백작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그 위로 탑처럼 많은 이야기를 맞춰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모조리 무너져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백작이 자신을 쓸모없다고 생각할까 봐 대신 내놓을 무언가를 다급히 찾는 중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아까 이비가 등꽃 아래를 거닐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비는 보랏빛 꽃 무더기 속에서 설탕 인형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남몰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전 내내 이비를 관찰했던 시온은 이비가 지금도 그런 상태인 걸 쉽게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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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한 번에 알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온은 넌지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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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천천히 생각하십시오. 너무 멀리 가진 말고.”

그러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덧붙였다.

이걸 과연 알아들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비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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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에 대해 더 알아보라는 말로 이해하면 되나요?”

정말이지 눈치 빠른 이비 아리아테.

시온은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비는 이미 확신을 얻은 표정이었다.

이비는 다시 바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시온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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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백작님은 아저씨 얼굴도 보셨어요?”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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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겼어요?”

기분 나쁘게…….

솔직한 심정은 이렇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니 자신의 머릿속을 꿰고 앉은 저주가 그의 입을 틀어막을 게 뻔해서, 시온은 고민 끝에 얼버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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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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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겼군요. 여태 몰랐네요.”

백작님이 보기 드물게 바보처럼 굴자 이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바보 취급했다.

그러곤 백작이 노려보든 말든, 그를 정당히 놀린 것에 만족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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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몰랐어요. 아무리 졸라도 얼굴을 안 보여 줬거든요. 그 잘생긴 얼굴 왜 저한테만 그렇게 안 보여 줬을까요?”

이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푸념했다. 지나가듯 가볍게 한 말인데, 시온은 이번에도 이비의 기분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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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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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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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할 것까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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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나는 결혼까지 생각했으니까요.”

이비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가 아차 하며 시온을 쳐다봤다.

그런데 어째 시온이 이비보다 더 놀란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비가 차차 경악하자, 시온이 뒤늦게 경계하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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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혈연관계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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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이비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시온의 말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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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어릴 때 얘기예요, 어릴 땐 다 그러잖아요! 어리니까요!”

이비는 원래 어린이들의 첫사랑이 그러하며 자신도 지극히 보편적인 과정을 밟았음을 강력히 피력했다.

그러자 시온은 누가 뭐라고 했냐는 눈으로 쳐다만 봤고, 덕분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 이비는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지켜보던 시온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 손으로 입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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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절반은 귀엽기 짝이 없는 이비를 향한 실소였고, 남은 절반은 비열한 점성술사를 향한 냉소였다.

혼자 결혼까지 생각하셨다니.

물론 바람 불면 바뀔 소소한 마음이었겠지만, 그래도 시온은 저 이비 아리아테가 한때 순진하고 덧없는 꿈을 꿨다는 게 꽤 웃겼다.

한편으로는 이비가 저런 마음을 품을 때까지 점성술사가 그 앞에서 얼마나 좋은 사람인 척했을까 싶어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시온은 민망해하는 이비를 보며 간만에 길게 웃었고, 이비는 한참 후에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아직 장밋빛인 얼굴로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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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무튼 아저씨에 대한 건 제가 잘못 짚은 것 같으니까 다시 생각해 볼게요. 오늘 밤까지, 지금 제대로 못 한 것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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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이면 저녁 일정 때문에 좀 빠듯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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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듯해도 할 일은 해야죠.”

이비가 결연히 말했다. 그래서 시온은 오히려 굳이, 싶어졌다.

성녀 발탁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비와 달리 시온은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사실 몇 달쯤 걸려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비는 이걸 긴급한 일로 여겼고,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온의 눈빛마저 독촉으로 받아들여 더 씩씩하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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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이 해 주신 만큼 저도 꼭 해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비가 시온에게 신뢰를 주려는 듯 장담했다.

그래서 시온은 짐짓 당황해 이비를 쳐다봤다.

이비는 믿어 달라는 듯 말했지만 정작 시온이 그 말에서 느낀 건 이비의 완전한 불신이었다.

어째선지 이비는 자신이 쓸모를 다 하지 못하면 시온이 자신을 내팽개치고 갈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시온에 대한 이비의 신뢰는 바닥과 닿아 있는 수준으로 희박했고, 그래서 아까 오찬장에서 그런 것처럼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물론 시온이 앞서 저지른 독단과 독선과 오만을 생각하면 이비가 이토록 움츠리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이비는 그간 아무 내색 없이 시온을 보면서도 곧잘 웃었고, 그래서 시온은 제 위치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온의 하찮은 자각과 함께 현실이 도래했다.

시온은 이미 이비의 일로 격분하는 지경까지 왔지만, 정작 이비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마음을 꼭꼭 닫고 생판 남을 대할 때보다 못한 수준으로 시온을 불신하여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상당한 불균형을 깨닫는 순간 정체 모를 불길함이 그를 엄습했다.

그래서 시온이 굳은 얼굴로 이비를 쳐다보자, 이비는 잠깐 어색해하다가 그걸 숨기려는 듯 방긋 웃었다.

그래서 소모적인 감정을 싫어하는 백작님도 일이 꽤 잘못된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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