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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어떻게 하고 싶어? (39/129)


39화. 어떻게 하고 싶어?
2022.10.13.


억센 손길에 카셀의 몸이 제쳐졌다.

거의 잡아 뜯긴 카셀은 사나운 눈으로 고개를 쳐들었고, 이비도 놀라서 자신과 카셀 사이로 난입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감시자의 제복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제복을 입은 그 사람은 매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다.

키는 카셀과 비슷한 수준으로 컸고, 몸은 곧고 다부져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높이 묶은 밀색 머리카락도 치켜든 깃발처럼 호전적으로 보였다.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이비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늘 라우렐 백작 옆에 붙어 있던 사람이니까.


“이게 뭐야?”

카셀이 자신의 어깨를 붙든 손을 보며 웃었다.

그러자 모렌은 한차례 숨을 들이켠 후 카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백작님께서 명령하신 일인가요?”

“아닙니다. 내 동생의 에스코트가 너무 미흡해 보여서 말입니다. 가문 차원의 훈육입니다.”

카셀이 구겨진 옷자락을 툭툭 털며 묻자 모렌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조금 전 모렌은 총사령관에게 눈빛으로 살해당할 뻔했다.

상관을 보좌한답시고 몬트라 후작을 막아섰다가 결과적으로 그놈을 이비에게 떠민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습에 나선 모렌은 이비의 옆에 선 제 남동생을 그윽하게 노려보았다.

그의 멍청한 동생, 아르코 영식은 제 파트너가 희롱당하는데도 뭐가 이상한지 모르고 멀뚱대고만 있었다.

그 꼴에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모렌은 최선을 다해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숙녀는 극진히 모셔야 하는 거란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는지 세심히 살피고 배려하면서 말이다. 등꽃 향기도 오래 맡으면 어지러우니까 저기 산책로에서 좀 쉬다 오는 게 어떠니.”

모렌은 책을 읽듯 말하며 동생의 가는 팔뚝에 이비의 손을 다시 얹었다. 그러곤 동생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치며 얼른 도망칠 것을 권했다.

큰누나를 아버지보다 무서워하는 아르코 영식은 영문도 모른 채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 걸음도 채 떼기 전에 도로 붙잡혔다.


“아니, 잠깐만.”

카셀이 웃으며 이비의 팔을 잡았다. 그래서 이비는 카셀과 아르코 영식 사이에 걸쳐진 꼴이 되고 말았다.


“나 아직 얘기 중이잖아.”

카셀이 나긋하게 말하자 이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와 딴판인 손아귀 힘 때문이었다.

카셀은 온화한 척 웃으며 이비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그러쥐었다.

그래서 이비는 아픔을 참으며 속으로 버럭 소리쳤다.


‘이 인간 진짜 왜 이래!’

아무래도 카셀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이비에게 다가오기 전부터 이미.

카셀 몬트라는 기분 좋을 땐 신사인 척하지만 조금이라도 언짢으면 개같이 구는 인간이다.

그리고 어린 아가씨를 함부로 끌어안고 목덜미를 킁킁대는 건 확실히 개 같은 짓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카셀의 심기 불편은 예상했지만, 이 상황 자체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카셀 몬트라는 강약도 위아래도 확실한 인물이다. 그러니 평소라면 지금 이비를 함부로 건드릴 리 없다.

왜냐하면 저기 백작님이 버티고 있으니까.

같은 대귀족이라도 라우렐과 몬트라의 격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니 라우렐 백작이 눈독 들이는 것에 몬트라 후작이 집적댈 리가 없는데, 이비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막되게 구는지 의아했다.

그러다 모렌을 향해 살벌하게 웃는 카셀을 보고 무언가 직감했다.


‘혹시 저 사람이 후작의 비위를 건드렸나?’

이비는 설마 하며 카셀과 모렌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그 예상은 애석하게도 정확했다.

카셀은 모렌 아르코 때문에 기분이 아주 더러웠고, 모렌을 쪼기 위해 이비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생존의 욕구보다 과시욕을 우선하는 카셀 몬트라는, 등꽃제에서도 당연히 가장 주목받고 빛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투하 가문의 등꽃 정원에 도착해서 보니 분위기가 묘했다.

이런 데 얼굴을 내밀 리 없는 라우렐 백작이 이미 이곳을 장악하고 있었고, 귀족들은 그의 시선과 심기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카셀에겐 참 재미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라우렐 백작께는 착하게 몸을 낮출 수밖에.

카셀은 이때 이미 기분이 반쯤 상해 있었다. 그때 하필 모렌이 걸렸다.

카셀이 백작에게 먼저 인사했지만, 백작은 그 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셀은 이해했다. 백작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

그런데 한미한 군견 가문의 계집이 주제넘게 끼어들며 그의 기분을 잡쳐 놨다.

건방지게 시야를 가린 것부터 시작해서 자길 방해꾼 취급하며 내쫓으려 한 것도, 악취미 운운하며 기어오른 것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카셀은 모렌이 이비의 징계 때도 탑주 앞에 나섰다가 꼬리를 말았던 일을 들어 알고 있었다.

탑주에겐 곧장 굽힌 주제에 내겐 끝까지 대든다는 생각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고 카셀 몬트라는 화가 나면 반드시 되갚아 줘야 하는 인간이었다.


“내가 이비랑 할 얘기가 좀 많은데. 아르코 군, 파트너를 잠깐 빌려 주겠나?”

카셀이 수려하게 웃으며 이비의 팔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시선은 이비가 아니라 모렌에게 박혀 있었다.

카셀의 앙갚음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유치한데 심지어 교묘했다.

이비를 향한 백작의 시선은 그 자체로 경고였다. 내가 보고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의미가 저변에 가득했다.

그런데 모렌은 꽃구경 운운하며 백작의 시선이 이비를 향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고, 그래서 카셀은 그 말을 믿는 척 이비에게 추근 대기로 했다.

이 일로 백작님이 분노하셔도 그건 전적으로 모렌 아르코 탓이니까.

그리고 이 웃기지도 않는 논리는 놀랍게도 꽤 잘 통했다.

실제로 모렌은 몬트라 후작의 횡포가 난감해 미칠 지경이었다.

여기서 후작에게 이비 아리아테를 빼앗기면 각하의 입장이 우스워진다. 그렇다고 각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그것도 면이 상할 일이다.


‘으앙, 너네끼리 싸워 놓고 왜 나한테 이래!’

카셀과 모렌의 기 싸움을 눈치챈 이비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견딜게요. 이비는 어른이니까.’

물론 태세 전환이 빠른 이비는 이 상황도 곧 받아들였다.

그 사이 카셀이 멍청하게 서 있는 아르코 영식을 채근했다.


“안 빌려 줄 거야?”

“아니, 저는, 아리아테 양만 괜찮으시다면…….”

청년의 대답에 이비와 모렌은 마음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르코 영식은 역할을 쉽게 포기했고, 이비는 마지못해 카셀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모렌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설마 각하의 관심을 가벼이 여기시려는 건 아니겠죠.”

그건 카셀과 이비, 두 사람 모두를 향한 경고였다.


‘그거 가벼운 거 맞아요, 내가 시킨 거예요.’

그래서 이비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대신 카셀과 모렌이 주고받는 살벌한 시선 밑에서 긴 한숨을 삼켰다.

늑대 사이에 낀 양이 된 기분이었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평민 출신의 정화자는 이미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 봤으니까.

귀족들의 실랑이에 희생양이 되는 것도, 이유 모를 화풀이에 휩쓸리는 것도, 가벼운 장난감 취급을 당하는 것도.

막 티엔다에 발을 들였을 때 매일 같이 겪은 일이니까.

그러니 정말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활기찬 이비는 또 한 번 환멸을 느꼈다.


‘사자를 뒤에 앉혀도 결국 이 모양이야.’

평소 이비를 대하는 귀족들의 태도는 대개 가벼웠다.

그런데 라우렐 백작이 이비 옆에 자리를 틀자 귀족들의 대우는 달라졌다.

그들은 이비에게 가볍게 말을 걸지 않고, 무언가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뭐든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대신 미엘 세드로나 리오 투하에게 하는 것처럼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래서 이비는 잠깐이나마 어려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세상이 무척 상냥해진 착각마저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건 착각이었다.

백작의 위세를 빌려 본들 이비는 결국 쉬운 사람이었고, 또 이렇게 노리개로 쓰이는 중이다.


“왜 불쌍한 아이를 협박하십니까. 봐요, 이비가 겁에 질렸잖아요.”

틀려요, 후작님. 겁에 질린 게 아니라 네놈의 뻔뻔함에 질린 거예요.


“적당히 하십시오. 보기 안 좋습니다.”

맞아요, 아르코 영식의 누님. 정말 보기 안 좋으니까 둘 다 꺼져 주세요.

이비가 마음으로 간곡히 청했지만, 카셀과 모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각을 세웠다.

더군다나 카셀은 또 비열하게 이비를 걸고넘어졌다.


“보기 안 좋다니요. 아까부터 사람을 너무 매도하는데, 그럼 당사자한테 물어볼까? 자, 이비…….”

카셀이 이비를 돌아보며 무언가 물으려 했다.

위기를 직감한 이비가 질문을 피하려고 몸을 빼는데, 돌연 느긋하게 웃던 카셀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어?’

이비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카셀의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쓰러졌다.

그는 그대로 기절한 듯 거품을 문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모렌은 그 모습에 헛숨을 삼켰다가 버럭 소리쳤다.


“이런, 후작님이 쓰러지셨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아니, 왜 쓰러졌는지부터 봐야지!’

모렌의 대처는 지나치게 빨랐고, 덕분에 이비는 더 당황했다.

혼란에 빠진 이비는 길바닥에 널브러진 카셀을 다시 쳐다봤다.

그는 거품을 입에 문 채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이비는 왠지 이 모습이 익숙했다.

그러니까 며칠 전, 조사단의 막사에 쓰러진 병사들이 꼭 저런 모습이었다.


‘설마…….’

이비는 혹시나 하며 저편에 앉은 백작을 슬쩍 돌아봤다.

그러자 턱을 괸 채 이비를 쳐다보던 시온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딴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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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라 후작이 이유 없이 혼절하는 바람에 등꽃제의 시작을 알리는 오찬은 어수선하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아쉬울 건 없었다. 오늘은 사흘간 이어지는 등꽃제의 첫날이고, 즐길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등꽃제가 이어지는 동안 초대받은 귀족들은 투하의 별장에서 머물렀다.

이비도 꽤 좋은 방을 배정받았다. 아무래도 성녀 가문이 탑의 정화자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성의인 듯했다.

이비가 그 좋은 방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숨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아니라 붙박이 옷장에서 난 소리였다.

하지만 이비는 놀라지 않고 냉큼 옷장으로 가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백작님.”

이비가 옷장 문을 활짝 열며 웃었다.

그러자 옷장 안에서 어두운 얼굴의 백작님이 나타났다. 뭔가 험한 길을 지나왔는지, 그의 옷에는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붙어 있었다.


“……왜 남의 별장의 비밀 통로까지 아는 겁니까?”

“집사가 알려 줬어요. 우리 집사 정말 유능하죠?”

그거 진짜 집사 맞아?

이비의 너스레에 시온은 한숨을 쉬며 옷장의 턱을 성큼 넘었다. 그러곤 자신의 어깨를 무심하게 털었다.

그들이 비밀 통로까지 이용해 몰래 만난 건 당연히 작당을 위해서였다.

시온은 오늘 이비가 요구한 대로 착실히 움직였다. 그러니 이젠 이비가 시온을 도울 차례였다.

이비가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자, 대충 먼지를 떨어낸 시온도 그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런데 시온은 그 상태로 말이 없었다. 답지 않게 무언가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를 보던 이비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먼저 말 안 꺼낸 건 칭찬해 드릴게요. 그런데 해도 괜찮아요, 몬트라 후작님 얘기요.”

누가 눈치 빠른 거 모를까 봐, 이비는 이번에도 정확히 정곡을 찔렀다.

그래서 시온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아까 몬트라 후작의 작태는 애매하게 표현하면 모욕이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추행이었다.

그래서 매사 뻔뻔한 시온도 이번만은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후작의 더러운 짓은 잘 봤습니다. 그걸 잘도 참는군요, 라고 평소처럼 객관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여느 신사들처럼 괜찮냐고 어르는 것도 그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은 고민 끝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자를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그렇게 묻는 시온의 눈은, 누가 봐도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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