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가시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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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가시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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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가시방석
2022.10.10.
―티엔다에서 저를 지켜봐 주세요!
그리하여 공정히 주고받게 된 이비의 첫 번째 요구는 난해했다.
그리고 또 괘씸했다.
티엔다가 두 사람을 수상히 여기며 떠들썩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지켜봐 달라니.
그 말은 비취색 드레스를 돋보이게 하는 저 꽃 병풍처럼, 본인을 띄우고 지킬 사자 병풍이 되어 달라는 의미였다.
같잖게 이용당하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다시 티엔다에 올라왔고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꽃놀이까지 참석했다.
그러곤 오해받기 좋은 모습으로 이비를 마냥 쳐다보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발레르 님. 정말 오랜만에 뵈어요.”
“아, 부인. 그간 잘 지내셨죠? 그럼요, 저는 늘 건강해요.”
“저도 너무 아쉬웠어요, 베르데 자작님. 다음에 다시 초대해 주시면 그땐 꼭 참석할게요.”
그사이 이비는 말갛게 핀 얼굴로 친숙한 귀족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돌아다녔다.
이비가 이렇게 귀족들과 어울리는 건 라우렐 성에서 열린 파멸의 연회 이후 처음.
그 후 이비는 계속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긴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 평소라면 호기심 많은 귀족들이 몰려와 질문 공세를 퍼부어야 정상인데, 이 등꽃제에서는 감히 누구도 이비에게 함부로 오라 가라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귀족들은 평소보다 훨씬 예의 바르게 이비를 대했고, 특히 젊은 남자 귀족들은 이비의 어깨너머 인물을 의식하며 대놓고 뒷걸음질 쳤다.
덕분에 이비는 저주를 걱정하지 않고 등꽃 아래를 편안히 거닐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라우렐 백작에 대한 헛소문은 더 증폭되겠지만, 시온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티엔다의 귀족 놈들이 뭐라고 떠들던 알게 뭐냐 싶었다.
게다가 지금 그를 더 짜증 나게 하는 건 눈치를 보는 귀족들보다 등 뒤에서 좌불안석하는 그의 부관이었다.
“송구합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부사령관이 긴 고뇌 끝에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은 아직 애송입니다. 사내다운 구석은 하나 없고 수다 떨고 차 마시기나 좋아하는 그런 녀석이죠. 하하.”
부사령관이 모래를 삼킨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그래서 시온은 뭐 어쩌라는 거냐 싶었다.
모렌 아르코 부사령관은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아르코 백작 가의 장녀다.
그런데 그에겐 가문의 기조와 전혀 안 어울리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저기서 이비를 에스코트 중인 아르코 영식이었다.
안 그래도 모렌은 총사령관의 변덕과 폭주로 초긴장 상태였다.
총사령관은 요 며칠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였고, 그 끝에는 언제나 이비 아리아테가 있었다.
그래서 모렌은 이번에 티엔다로 오면서도 그 성녀 후보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의 어리바리한 동생 놈이 이비와 나란히 등장했고, 불쌍한 모렌은 그 순간부터 등으로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저 옷 좀 보십시오. 사내 녀석이 무슨 인형 같지 않습니까? 아직 꼬마여서 반바지나 치마도 잘 어울릴 겁니다. 누가 저 녀석을 남자라고 생각할까요. 하하.”
“시끄러워.”
“넵.”
시온이 결국 신경질을 냈고, 주절대던 모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도 뭐가 켕기는지 총사령관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그래서 시온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동생에게 질투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인데, 유감이지만 시온은 그런 소모적인 감정과 별로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애당초 그는 질투라는 감정에 공감하지 않았다. 소위 집착도 마찬가지다.
가문은 라우렐이고 외모는 보는 바와 같이 잘났으며 몸도 머리도 소질도 어지간히 타고난 그는 무언가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서자라는 사소한 흠결이 있지만 이 문제도 이미 일곱 살 때 가문의 적자를 따까리로 삼아 훌륭히 극복했고, 소년기에는 귀찮을 정도로 많은 애정 공세를 받았다.
이러니 그는 한 번도 아쉬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감히 누구한테 그런 저급한 감정을 덧입히는지, 시온은 부사령관의 오해도 자신을 둘러싼 소문도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시온의 눈에 모렌의 동생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쉴새 없이 돌아다니는 이비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바빴기 때문이다.
‘잘도 돌아다니네.’
시온은 한시도 쉬지 않는 이비를 보며 생각했다.
사실 이비가 자길 지켜보라고 했을 때는 이 무슨 벌세우기인가 싶었다. 동시에 아주 지겨운 시간을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이비를 보는 일은 생각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의외로 재미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등꽃과 못잖게 화려한 기백 명의 귀족들.
그 사이를 그림자처럼 지나다니는 시종들, 구석에 엉킨 악사들.
먹는 이가 있든 없든 계속해서 채워지는 오찬의 접시.
치렁치렁 늘어진 온갖 장식.
적당한 음악,
적당한 웃음,
적당한 헛소리.
사교장에서 얻을 게 없는 시온에게는 전부 덧없고 뻔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비는 여기가 무슨 사금이 나오는 강가인 것처럼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니며 예쁘게 웃고,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고, 열심히 재잘댔다.
그러다 틈이 생기면 주위를 둘러보며 또 무언가 궁리하기.
언뜻 보면 축제에 들뜬 영애 같지만, 이비의 머릿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시온의 눈에는 저 모습이 아주 부지런한 다람쥐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게 좀처럼 질리지 않았다.
다만 비스에서 시온을 가지고 놀던 이비는 느긋하고 장난스러운 고양이에 더 가까웠던 것 같은데, 저렇게 촉각을 곤두세운 모습은 내심 낯설게도 느껴졌다.
시온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비를 보고 있을 때였다.
“오, 백작님. 여기서 뵙는군요.”
뒤에서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가벼운 발소리도 다가왔지만, 시온은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함부로 말을 거는 걸 허락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저 헤픈 목소리의 주인이 몬트라 후작인 걸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다.
“등꽃제에 오신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여기 계신 줄 알았으면 저도 더 일찍 올 걸 그랬습니다.”
인사를 무시당했지만 몬트라 후작은 더 살갑게 말을 붙였다. 그러더니 시온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계신지……?”
몬트라 후작의 눈이 자연스레 이비 쪽을 향하자, 시온의 뒤에 있던 모렌이 뒷짐을 지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몬트라 후작은 불쑥 시야로 들어온 모렌을 보고 놀라더니 이내 빙긋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요새 자주 보니 좋네요, 이슬라 부인.”
“후작님, 각하께서 꽃을 감상하고 계십니다.”
“이슬라 경의 꽃이 옆에 있는데 각하께서 다른 꽃을 감상하신다니, 많이 서운하시겠어요.”
몬트라 후작이 여우처럼 지껄였다.
그래서 모렌은 한결같은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마주 웃었다.
모렌은 경계의 부사령관이자 아르코 소백작인 동시에 이슬라 부인이기도 했다.
셋 다 자랑스러운 이름이지만, 감시자의 제복을 입고 총사령관을 보필 중인 모렌을 굳이 이슬라 부인이라고 부르는 저 후작 놈의 음흉함에는 절로 이가 갈렸다.
“아닙니다, 각하께 사람을 꽃 취급하는 악취미는 없으셔서요.”
“그거 잘됐네요. 혹시 허락이 필요할까 싶었는데, 정말 등꽃을 보고 계셨다니 말입니다.”
모렌이 말에 뼈를 담아 불쾌함을 표현했지만, 몬트라 후작은 도리어 유쾌한 얼굴로 화답했다.
그러더니 모렌이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성큼 걸음을 옮겼고, 모렌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
.
.
“이비이이!”
마치 강아지를 부르듯 정겨운 목소리였다.
당연히 숙녀의 이름을 부르기엔 부적절한 목소리였다.
이비가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는데, 돌연 남자의 높다란 어깨가 이비의 얼굴을 덮었다.
“읍!”
웬 남자가 이비를 별안간 끌어안았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이비는 짙은 향수 냄새에 질색하며 그 상체를 밀어냈다.
그러자 남자는 웃음을 터트리며 딱 반걸음 물러났다.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남자가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이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비는 그 남자를 보고 속으로 중얼댔다.
‘이게 돌았나…….’
대뜸 끌어안겨진 이비는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하지만 그 기분을 절대 목 위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몬트라 후작님.”
왜냐하면 이 남자가 바로 대귀족 중 하나인 카셀 몬트라 후작인 탓이었다.
카셀 몬트라는 척 보기에도 허랑방탕한 남자였다.
이비보다 꼭 열 살이 많은 그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치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밝은 곳에서는 은빛으로, 어두운 곳에선 잿빛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언제나 끝이 정성껏 말려 있었고 반반한 얼굴은 늘 완벽한 상앗빛이었다.
그는 날렵한 맵시를 과시하기 위해 몸에 딱 맞는 블레이저코트를 즐겨 입었는데, 동시에 화려한 걸 좋아해 코트에 금사와 은사로 수를 놓아 그 반짝임을 즐겼다.
하지만 그렇게 맞춘 코트는 절대 두 번 이상 입지 않았다.
그의 반지, 향수, 구두, 벨트나 커프스나 크라바트의 장식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몸에 두른 건 모두 경악스러운 가격을 자랑하지만 한 번 선보인 후에는 어김없이 드레스 룸에 잠들었다.
카셀 몬트라는 티엔다에서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사람이었고, 그에 걸맞게 추문이 끊이질 않으며, 애석하게도 그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비가 부단히 경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카셀이 평소보다 나긋하고 다정하게 물었다.
“아뇨, 하루하루가 가시방석 같았어요.”
물론 이비는 솔직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카셀은 이 말을 농담으로 듣고 푸핫 웃었다.
“응, 맞아. 힘들었겠네. 어느 백작님 때문에.”
‘뭐야, 이 사람 오늘 왜 이래?’
카셀은 짓궂게 웃으며 시온이 앉은 쪽을 몰래 힐끗댔고, 그래서 이비는 내심 당황했다.
카셀 몬트라는 신의를 모르고 강약이 분명한 인간이다.
그래서 시온이 이비의 성녀 발탁에 반대했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떼고 관망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시온이 저기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보란 듯이 이비에게 접근했다.
혹시 무시무시한 백작님으로부터 이 가련한 평민 소녀를 지켜 주려는 걸까?
하지만 이놈에게 그런 인정머리가 있을 턱은 없고, 이비는 대체 뭘까 생각하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카셀이 이비의 목덜미에 코를 대며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밑 대륙 냄새가 나네.”
비록 닿지는 않았지만, 체온이 느껴지고 숨결이 스치는 거리에서 카셀이 중얼댔다.
“잠깐 다녀왔다고 그새 냄새가 뱄나? 난 이 냄새 싫은데.”
바로 뒤에서 들려온 카셀의 불평에 이비는 상상했다.
그의 안면을 뒤통수로 찍어 버리는 상상, 발등을 구두 굽으로 밟는 상상, 뺨을 후려친 후 미친 거 아니냐며 정색하는 상상.
전부 마음에 들지만 이비는 그중 어느 것도 고르지 않았다.
평민 출신의 성녀 후보로서, 성녀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대귀족께 공손히 굴어야 하는 당연한 이치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비가 얌전히 참아 내자 카셀이 낮게 웃었다.
그의 숨결이 이비를 또 한 번 역겹게 만들 때였다.
돌연 난입한 억센 손이 카셀의 어깨를 잡아 이비에게서 뜯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