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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평행 동맹 (36/129)


36화. 평행 동맹
2022.10.03.



 


“그럼 백작님의 저주는, 상대가 모르는 걸 말할 수 없는 저주인가요?”

이비가 조심스럽게 꺼낸 추측에 시온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왜 그렇게 판단합니까?”

시온이 이유를 묻자 이비는 어떤 추론을 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어제 말씀하셨잖아요. 저한테 아저씨 얘길 안 한 이유가 제가 떠올리지 못해서라고.”

어제, 바로 이 자리에서 이비는 시온에게 가볍게 따졌었다.


―절 부탁한 사람이 여기 살던 점성술사라는 거, 왜 진작 안 가르쳐 주셨어요?

―당신이 떠올리지 못해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시온은 이렇게 대답했고, 이비는 그의 성격이 정말 더럽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저주에 대해 알고 나니 그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만약 백작님이 아저씨 얘기를 처음부터 하셨으면 일이 이렇게 멀리 돌지는 않았을 거예요.”

물론 성녀 자리를 포기하는 건 별개지만.


“그런데 백작님은 티엔다에선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다가 여기서 뒤늦게 알려주셨어요. 제가 백작님이 이 집에서 지내는 걸 알고, 아저씨와의 관계를 추측한 후에요. 이것도 저주 때문인 거죠?”

이비의 물음에 시온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시온의 숙적인 아마네세르는 과거에 바다를 보고 태풍을 예견했다.

그는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태풍의 개수와 성격을 헤아렸지만, 그의 능력은 예지가 아니라 오로지 통찰이었다.

땅의 움직임과 바다의 무게, 그리고 대기의 흐름을 치밀하게 읽어서 미래의 풍랑을 확신하는 기적에 가까운 통찰.

작은 조각 하나 버리지 않고 살펴보다가 어김없이 진실을 꿰뚫는 이비 아리아테가 그런 아마네세르와 비견된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정확합니다.”

하지만 시온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당신 말대로 나는 상대가 모르는 걸 말할 수 없습니다. 점성술사에 대한 것도 당신이 이미 확신했기 때문에 언급이 가능했고, 지금 내가 이걸 인정하는 것도 당신이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담담한 말에 이비는 눈이 또 커다래졌다.

사실 시온은 이비의 저런 표정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지간한 능구렁이보다 약삭빠르면서 왜 매번 저렇게 순진하게 놀라는 척을 하나 싶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건 괜한 연기가 아니라 이비의 진심이었다.

이비는 모르는 것이 많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기준에서.

그래서 더 알기를 바라고, 바라는 만큼 더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

시온은 그런 이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혹시나 해서 되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죠?”

“이 정도 얘기할 정도면 나하고 손잡을 마음이구나, 저주에 불만이 있으면서 무력을 쓰지 않는 건 나름의 기준인가, 이 저주를 이용하면 상대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가릴 수 있을까, 선생님이 된 것도 저주에 대해 파악하려는 의도였을까, 오늘 점심은 디에스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온의 물음에 이비는 머릿속의 생각을 고스란히 상납했다.

그러곤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백작님, 제 상황을 알면서 그렇게 질문하는 건 절대 신사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혹시 제가 엄한 생각을 하다가 들켜서 수치심에 자결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이비의 경고는 타당하고 엄중했지만, 시온은 그 불만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더 버티지 못하고 감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성격 외엔 모든 것이 우월한 시온 라우렐은 당연히 눈도 높고 기준도 높았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타인에게 감탄하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를 봐도 그가 긍정하는 수준은 기껏 해 봐야 가벼운 인정이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그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주의 실체를 확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비는 또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점심 계획까지 알차게 세우면서.

이비의 끝도 없는 발상에 시온은 문득 점성술사를 통해 알게 된 이비 아리아테의 어릴 적을 떠올렸다.

고작 열두 살이던 이비는 어려운 사람이 되겠다며 티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게 무지하고 무모한 허영이 아닌 것을 시온도 이제는 안다.

이비는 그때 이미 세상의 무수한 단 차를 깨닫고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니 시온이 성녀가 되어 봤자 이용당할 뿐이라고 을러 본들 소용없는 게 당연하다.

자신보다 훨씬 바보들이 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저 사기적인 능력자가 얌전히 굴 수 있을 리가.

저 이비 아리아테는 단지 태생을 이유로 밑에 남기엔 너무 잘난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새삼 치명적인 저주인 것 같아서.”

“알면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비가 자길 빤히 쳐다보는 시온을 향해 투덜댔다.

시온은 이 와중에 저토록 귀엽게 굴 수 있는 것도 상당한 능력이지 싶었다.

물론 귀엽게 영리하든 멋지게 영리하든 그건 딱히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지금 시온에게 중요한 건 이비 아리아테가 보여 준 새로운 가능성이다.

지난 5년, 시온은 이 저주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을 혼자 꾸역꾸역 삼켜야 했다.

이걸 전하려는 시도나 저주를 풀어 보려는 노력은 물론 해 봤다.

하지만 그의 친부가 목숨을 걸고 채운 올가미는 악랄하고 교묘해서 부술 수는 있어도 풀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제 맨정신으로 맞서야 하는 아마네세르는 그에게 새로운 시련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타협도 절충도 불가능한 두 갈래 길에 떠밀렸다.

이따위 세상 알게 뭐냐며 멸망을 관망하거나, 아니면 머저리같이 계속 이용당하거나.

다행일지 불행일지 시온의 선택은 후자였다.

아무리 라우렐을 부정하고 경멸해도 그가 시온 라우렐로 자라며 쌓아 온 것은 여전히 단단하게 그의 한 축을 지탱했다.

명예와 자존심, 품위, 책임감, 준칙에 대한 의무 같은 것들이 말이다.

친부에게 배신당했다고 스스로를 진창에 처박기에 시온의 자긍심은 너무 드높았다.

그래서 결국 그는 목줄을 맨 개처럼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그게 친부가 가장 바라는 일인 걸 알면서도, 이가 갈리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도.

티엔다와의 단절은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화풀이였다.

나는 의무를 다했고 이미 차고 넘치게 인내하고 있으니 내게 어떤 간섭도 하지 마라.

이 살벌한 서슬은 그가 누르고 눌러 겨우 잠재운 분노의 미약한 흔적이었다.

그렇게 5년을 보냈고 처음으로 이 재갈을 풀 가능성이 보였다.

이미 많은 것을 단념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온이 마음을 굳힌 듯 입을 뗐다.


“어제의 제안을 조정했으면 합니다.”

“조정이요?”

“첫 번째 조건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조건에는 협조하겠습니다.”

이비가 내건 첫 번째 조건은 내 앞길을 함부로 막지 말아라.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내 저주를 푸는 데 협조해 달라는 거였다.


“그 말씀은 제가 성녀가 되는 걸 계속 방해하겠다는 뜻인가요?”

“네.”

“왜죠?”

“이유는 직접 알아내십시오.”

시온은 이 정도면 이비가 알아들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비는 그의 예상을 가볍게 걷어찼다.


“그럼 싫어요. 안 할래요.”

“……안 한다고?”

“네, 안 해요. 옆에서 사사건건 방해할 사람하고 어떻게 손을 잡아요.”

이비는 가벼운 변덕을 부리듯 말했다. 그래서 시온은 얼굴을 굳히고 되물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거 모르겠습니까?”

“알겠는데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비는 태연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백작님의 이유죠.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 어련히 알아서 해 주시겠지, 이러면서 제가 백작님을 무조건 따를 의무는 없잖아요. 백작님이 제 아빠도 아니고.”

이비는 얄미우리만치 단호했고, 예상치 못한 거부에 시온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협상에 한해서는 확실히 하수였다.

결정하고 허락하고 명령하는 일만 열심히 해 온 그 남자는 이렇게 밀고 당기며 야금야금 이익을 취하는 일이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이 잠시 고장 나자, 이비가 더 뻔뻔하게 말했다.


“게다가 저도 백작님을 위해 두 가지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백작님도 두 가지 조건 다 받아 주세요.”

“날 위해 뭘 두 가지나 합니까?”

“하나는 백작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거, 둘은 백작님을 지켜드리는 거.”

알아주고 지켜 주고.

이 고의적인 어휘 선택에 시온이 정색하자, 이비는 서운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저는 백작님과 잘 지내고 싶은데, 이렇게 조율이 어렵다면 어쩔 수 없죠. 이 일은 없던 일로 하는 수밖에…….”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사뿐히 일어났다. 그러자 시온은 저도 모르게 이비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팔이 붙들렸지만, 이비는 이 무례에 놀라거나 화를 내는 대신 최선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

아, 시온 라우렐아. 너도 순진한 구석이 있기는 하구나.

하긴 저번에도 그랬지. 약점을 숨겨도 모자랄 판에 으르렁 어흥 잘도 울었지.

사실 백작은 이렇게 솔직할 필요가 없다. 정말 방해할 생각이라도 지금은 적당히 수긍하고 원하는 걸 얻어낸 후 뒤통수를 쳐도 될 일이다.

그런데 이 백작님 겸 총사령관님 겸 선생님은 미련하게 정공법을 고수한다.

아무래도 비굴해 본 적 없는 짐승의 습성인가 보다.

한편 얼 타고 있던 시온은 이비가 비웃는 기색을 느꼈는지, 그제야 울컥해서 물었다.


“……본인이 유리하다 싶습니까?”

“네, 맞아요. 유리한 것 같아요.”

이비의 솔직한 대답에 시온의 어금니가 맞물렸다.

불쌍한 백작님을 그렇게 잔뜩 달궈 놓고, 이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시온의 손을 떼 내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러더니 아주 다소곳하게 말했다.


“백작님은 양보하는 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제가 특별히 한 번 더 양보할게요.”

양보라는 표현 역시 시온에겐 낯설었지만, 지금 아쉬운 건 그였기에 애써 참고 들었다.


“이렇게 해요. 상대에게 필요한 일을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협조하기. 그리고 성녀에 대한 건 발탁식 일주일 전에 합의하기.”

고분고분해진 백작님께 이비가 고했다. 그러곤 그가 발탁식 일주일 전이라는 부분에 반발하기 전에 냉큼 덧붙였다.


“제가 성녀가 되는 걸 포기하게 하고 싶으면 그때까지 절 설득해 주세요. 저도 그때까지 백작님이 왜 반대하시는지 최선을 다해 알아낼게요.”

시온은 손해 보는 기분을 뒤로하고 이비의 말을 진지하게 곱씹었다.

총사령관님은 협상에 서툴 뿐 판단력은 준수했다. 그래서 이비의 제안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도 결국 인정했다.

비밀도 많고 고집도 센 두 사람은 피차 이 이상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고, 그럼 영원히 평행을 달려야 한다.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손해다. 시온은 이비가 필요하고 이비는 시온이 필요하다.

시온이 한숨을 길게 내쉬자, 이비가 제의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시온은 그 작은 손을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마지못해 손을 들어 맞잡았다.

백작님이 드디어 넘어오자 이비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백작님.”

“……이쪽이야말로.”

백작도 어울리지 않게 미소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이용할 생각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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