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시온에겐 이비가 필요하다.
(35/129)
35화. 시온에겐 이비가 필요하다.
(35/129)
35화. 시온에겐 이비가 필요하다.
2022.09.29.
조사단장과 그의 부하들이 눈을 뜬 건 어스름한 새벽께였다.
지난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그들은 모두 전신의 둔통과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을 까맣게 잊어버린 기억상실을 호소했다.
기억상실이라니.
이비는 참 편리한 상태라고 생각하며 안색이 창백한 조사단장에게 말했다.
“정신이 드세요? 다행이에요, 그 안경 분이 알려 주지 않았으면 여러분이 쓰러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이비의 말에 조사단장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끄덕였다.
어젯밤 건방진 안경을 끌고 오라고 명령을 한 것까진 얼추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조사하셨으니 이미 알겠지만, 여긴 지난 그믐에 독 안개가 퍼진 장소예요. 아무래도 그 영향으로 쓰러지신 것 같아요.”
“독 안개……?”
이비의 공갈에 조사단장이 멍하니 중얼댔다.
벼락을 맞고 반나절 만에 깨어난 그는 아직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비는 그가 얼른 정신을 차리게 슬쩍슬쩍 위협해 주었다.
“정말 지독한 독이었어요. 사람들의 피부가 검게 녹고 이 바로 옆 호밀밭도 까맣게 타서 흐물흐물해졌었죠. 전부 정화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지막까지 사람을 해치려 들다니. 역시 저주는 정말 무섭네요…….”
이비의 염려스러운 목소리에 조사단장의 얼굴은 차츰 사색이 되었다.
그는 초조해하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당장에라도 이 막사를 벗어나고 싶은 표정인데, 아직 다리의 마비가 풀리지 않아 안달하는 모양새였다.
그게 눈에 뻔히 보였지만, 이비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저, 이런 와중이지만 단장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갑자기 무슨…….”
“이 마을에 이주 명령을 내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정말 송구하지만, 혹시 이주 명령을 철회해 주실 수 있나요?”
이비의 완곡한 청에 조사단장은 겁먹은 것도 잊고 정색했다.
“그건 이미 결정된 사안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분명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신 일이겠죠. 하지만 이 마을 분들은 당장 갈 곳이 없으세요. 그러니 다음 그믐까지 한 번만 지켜봐 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바옌 군의 첫 번째 강령은 비스의 안정입니다. 그러니 주민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주민들의 목숨엔 아무 관심도 없지만, 조사단장은 일부러 완고하게 말했다.
지금은 바옌 군의 깃발과 제복을 두르고 있지만, 사실 조사단장의 정체성은 바옌이 아니라 브릭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리고 이 지역의 소유자인 브릭 자작은 자신의 영토에 티엔다의 시선이 몰린 걸 몹시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사단장은 자기 사촌이자 뒷배인 브릭 자작을 위해서라도 이 마을을 깨끗이 비울 작정이었다.
이런 복잡한 속사정이 있는데 이비 아리아테라는 평민 정화자가 눈치 없이 끼어드니, 조사단장은 벌컥 짜증이 났다.
게다가 이 작은 마을이 주목받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저 성녀 후보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사단장은 자신이 이 꼴이 된 것도 이비의 탓이라 여기며 역정을 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서서 일을 그르치시면 안 됩니다. 그건 바옌의 명예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고 아리아테 님이 책임질 수 없는 일입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군에는 체계가 있고 귀족에겐 격이 있습니다.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지한 주장을 하시면 마냐냐 탑에도 큰 피해가 갈 겁니다.”
조사단장은 일부러 과장된 말로 이비를 꾸짖었다.
아무리 지고한 티엔다에 있다고 한들 본질은 평민 계집이니, 이렇게 호통치면 알아서 겁을 집어먹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사단장이 을러대자 이비는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주제넘었다면 부디 용서하세요. 제 고향 같은 마을이 이대로 사라지는 게 마음 아파서 그랬어요.”
이비가 겸손한 목소리로 반성했지만, 조사단장은 만족하지 않고 언짢게 혀를 찼다. 좀 더 숙이라는 의미였다.
내려다보는 것이 익숙한 조사단장은 이미 굽힌 상대를 더 내리눌렀다.
반은 화풀이고 반은 습관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머뭇대다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잘못한 것 같아요. 이 일은 바옌 공작님께 직접 사죄드릴게요.”
“……네?”
“공작님께서 재가하신 일에 감히 토를 달다니 제가 정말 무지했어요. 단장님께서 일깨워 주셨으니까 이 일은 제가 꼭 공작님께 말씀드리고 직접 용서를 구할게요.”
이비의 지나친 반성에 조사단장의 딱딱한 얼굴이 도로 해쓱해졌다.
이게 아닌데.
사실 주민 이주는 조사단장의 독단이다.
그는 여길 깨끗이 치우고 상부에는 적당한 보고서를 올려 일을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바옌 공작의 귀에 이 얘기가 직접 들어가면 일이 전부 틀어진다. 그보다 윗사람이 와서 다시 제대로 된 조사를 하면 정말 낭패였다.
“그, 그러실 것까진 없습니다. 이 일은 제 선에서 원만하게…….”
“아니요, 저는 평소 공작님께 늘 신세를 지고 있어요. 그런데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외람되게 행동하다니, 이대로는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이어진 말에 조사단장은 또 한 번 아차 싶어졌다.
바옌 공작은 이비 아리아테를 성녀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럼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얼마든 마주하고 대화할 수도 있을 텐데, 조사단장은 그걸 까맣게 간과하고 있었다.
저 이비 아리아테의 출신과 너무 겸손한 태도 때문이었다.
“몸도 편치 않으신데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시간을 뺏었네요. 부디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그럼 저는 이만…….”
“아, 아리아테 님!”
이비가 어두운 얼굴로 일어나자, 조사단장이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러곤 순진무구하게 돌아보는 이비에게 다시 말했다.
“바옌 공작님 앞에서 이 일을 언급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저도 함구할 테니 아리아테 님께서도 말을 아끼시는 편이…….”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장님. 하지만 저는 제 잘못을 그렇게 덮고 싶지 않아요.”
“하, 하지만…….”
“그리고 공작님께 다시 여쭤보려고 해요. 혹시 저와 제가 자란 이 마을에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지를요.”
이비의 결의에 조사단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그는 황급히 꼬리를 내렸다.
“정 그러시다면 주민 이주에 대한 것은 보류하겠습니다.”
“보류요? 갑자기?”
“네, 그러니 바옌 공작님껜 이 일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공작님께요? 왜요?”
“……제 입장과 체면을 부디 헤아려 주면…….”
“입장이요? 그게 뭐죠?”
조사단장이 자세를 완전히 낮췄지만, 이비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좀 더 해 보라는 의미였다.
올려다보는 것이 지긋지긋한 이비는 이런 식으로 조사단장이 울기 직전까지 괴롭혔다.
반은 복수고 반은 장난이었다.
.
.
.
이비가 조사단장과의 접견을 마치고 나오자, 막사 밖에서 기다리던 디에스가 이비를 맞이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 정도로 고생은요.”
“하긴 고생은 저쪽이 했죠.”
디에스가 조사단장의 막사를 눈짓하자, 이비는 말끔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병영을 다 빠져나오자 조사단장이 부하들을 마구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호밀밭을 지날 즈음엔 조사단장이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오르는 게 보였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호밀밭 너머로 보이던 바옌의 깃발이 하나둘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백작님도 만족하시겠죠?”
이비가 서둘러 철수하는 조사단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젯밤, 백작은 이비 앞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그 완고한 백작님은 이비가 어떤 추측을 하는지 하나하나 묻더니, 대답을 다 듣고 나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비가 그의 반응을 살피는데 백작이 돌연 말을 돌렸다.
―여기, 정리할 수 있습니까?
백작이 조사단의 병영을 눈짓하며 물었다.
병영 곳곳엔 바옌의 병사들이 내팽개쳐진 장난감처럼 쓰러져 있었다.
백작이 오늘 밤 떠날 생각으로 만든 난장판이었다.
이비가 할 수 있다며 끄덕이자 백작이 덧붙였다.
―그럼 내일 안으로 바옌의 깃발을 치우고 날 찾아오십시오.
백작님의 버르장머리는 여전히 건재한 듯싶지만, 이비는 거기서 미묘한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
자길 찾아오라니, 가까이만 가도 으르렁대던 사람이 무슨 변덕인가 싶었다.
아무렴 백작과 친해지고 싶은 이비에겐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이비는 백작의 요구를 일찌감치 해치우고, 이제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시온의 방문을 두드린 이비는 어제와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태도로 인사했다.
그리고 시온은 어제처럼 얼굴을 구기고 으르렁대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오기 전에 할 일은 마치셨는지.”
“네, 다행히 조사단장님께서 마을의 사정을 헤아려 주셨어요.”
이비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시온은 문 앞에 세우고 있던 몸을 옆으로 틀었다.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 이비는 그 외간 남자의 방에 입장했고, 시온은 정중히 에스코트하는 대신 자신의 책상 의자를 내주었다.
그러곤 본인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온과 마주 앉게 되자 이비가 먼저 운을 뗐다.
“오늘 오라고 하신 이유는…….”
“맞춰 보십시오.”
시온이 어린애 장난하듯 말했다.
그래서 이비가 눈을 깜빡이자, 그는 기다리지 않고 물었다.
“내가 왜 부른 것 같습니까?”
“제안에 응할 마음이 생겨서 불렀겠죠. 물론 이것저것 귀찮게 따질 것 같긴 하지만.”
이비는 가감 없이 대답했고, 시온은 어이없어 웃었다.
이렇게 잘 알면서 눈은 대체 왜 깜빡이는 건지. 습관인 건지, 적을 방심시킬 계략인 건지.
저 만만치 않은 이비 아리아테의 본성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후자겠지.
“맞습니다. 이것저것 귀찮게 따질 작정입니다.”
시온은 담담히 수긍했고 이비는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얘 왜 갑자기 솔직하지?’
이비는 오히려 의심하듯 시온을 쳐다봤다.
한껏 들이댈 땐 언제고 도로 경계하는 모습이 정말 성가신 고양이 같지만, 시온은 불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제 한 추측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꽤 정확하기도 했고.”
“……꽤 정확하다는 건, 제가 알아내야 하는 게 더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이비는 혹시나 해서 던져 보았다.
그에 시온은 기꺼이 끄덕였고, 용기를 얻은 이비는 한발 더 나아갔다.
“제가 백작님의 비밀을 알아내길 원하세요?”
“그전에 내 저주가 어떤 건지 알았으면 합니다. 더 정확하게.”
그러나 시온의 대답은 여느 때처럼 불친절하고 모호했다.
그래서 평소라면 ‘이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마음이 없구나, 백작님의 버르장머리는 오늘도 흐림!’ 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백작이 저주에 걸린 걸 알게 된 이비는 그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진지하게 곱씹었다.
확신컨대 그의 저주는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는 저주.
이건 백작도 이미 인정했다. 그래 놓고 이제 더 정확하게 알아내라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백작의 저주는 이비의 저주보다 조건이 까다롭다.
이비의 저주는 묻는 말에 반드시 솔직히 대답하는 저주. 물음도 대답도 솔직함도 그 정의가 명료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비밀은?
비밀은 상대적이다.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비밀은 변한다.
그럼 대체 뭐가 비밀이지?
이 저주를 건 게 정말 라우렐 대공 가라면, 그들이 숨기려 하는 비밀은 라우렐과 연관된 것.
가만, 그럼 백작이 저주에 걸린 게 가장 중요한 비밀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 방금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내 저주가 뭔지 알아내라고.
왜 그걸 말할 수 있는 거야?
이비는 백작을 앉혀 둔 채 멍하니 허공을 헤아렸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다른 사람이 아는 건 비밀이 아니죠.”
이비의 속삭임에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무언가 기다리듯, 또는 기대하듯이.
하지만 이비는 먼 곳을 보느라 그걸 깨닫지 못했다.
대신 아무것도 모른 채 또 모든 것을 알아냈다.
“그럼 백작님의 저주는, 상대가 모르는 걸 말할 수 없는 저주인가요?”
이로써 확실해졌다.
시온에겐 이비 아리아테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