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목줄과 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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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목줄과 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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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목줄과 재갈
2022.09.26.
라우렐의 영광을 위하여.
그 긍지 높은 소년은 이 말을 좋아했다.
위대하고 고결한 라우렐, 티엔다비스의 유일한 주인.
라우렐은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무한한 권리와 책임을 지니며, 그 책무를 다하기 위해 악한 것을 멸하고 약한 것은 보살피며 정의를 세운다.
그런 라우렐의 찬란함을 뼛속 깊이 새겼기에, 소년은 이 숭고한 의무를 짊어지는 일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곧 자신에게 주어질 호칭도 마음에 들었다.
용을 떨어트리는 자라든가, 재앙을 막는 자라든가, 경계의 감시자라든가.
아직 열일곱 살이던 시온의 이야기였다.
키와 체격은 이제 어지간한 어른보다 크지만, 그의 얼굴엔 아직 어린 티가 가득했다.
그러나 어제 백작위를 물려받은 시온은 자신이 미성년인 걸 인정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경계로 향하기 전, 가족과의 작별을 이토록 의연히 받아들이는 걸 보면 말이다.
타르데스의 따님과의 접견을 앞두고 라우렐 대공이 아들을 불렀다.
“시온.”
“네, 아버님.”
“널 떠올릴 물건을 하나만 다오. 네가 첫 전투를 마치고 오면 돌려주마.”
아버지의 요구에 시온은 내심 당황했다.
우직한 아버지가 이런 낯간지러운 소릴 하는 게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온은 자신이 집을 떠나는 걸 새삼 실감하며, 마땅한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소년은 짧은 궁리 끝에 오른쪽 소매에서 커프스를 떼어 냈다.
백금과 사파이어로 세공된 그것은 그가 백작위를 받으며 새로 맞춘 거였다.
시온은 그 한쪽을 아버지에게 미련 없이 건넸고, 대공은 아들의 물건을 받으며 씁쓸히 웃었다.
그래서 여태 멀쩡하던 시온도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하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미 세상 한 축이 무너진 것처럼 우울해하는 그의 이복형 때문이었다.
대공 옆에는 시온의 이복형인 하르딘 라우렐이 서 있었다.
시온과 하르딘은 어머니가 다르지만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게다가 사이도 어지간한 친형제보다 가까웠다.
적자이자 형인 하르딘 라우렐은 자기 사람을 끔찍이 아끼는 섬세한 소년이었고, 서자이며 동생인 시온 라우렐은 그런 형을 뻔뻔하게 휘어잡는 악당이었다.
그래서 대공비 쪽 사람들은 저 이복형제가 같이 놀 때마다 기함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나름 우애 좋은 형제였다.
시온은 형의 우중충한 낯짝을 힐끗대다가, 아버님이 잠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러 간 사이 그를 퍽 걷어찼다.
“장례식 보내냐?”
“야……!”
“존댓말 써야지. 나 이제 백작이야.”
동생의 태연한 목소리에 하르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라면 저 대단한 건방에 실없이 웃었겠지만, 오늘은 억지로라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그는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네가 경계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숙부님처럼 변할까 봐 무서워.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르딘은 대공의 후계자라는 본분을 떠올리며 그 나약한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시온은 그 모지리 같은 형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러더니 왼쪽에 남은 커프스를 마저 떼어내 툭 던졌다.
“너도 가지고 있어.”
“어?”
하르딘은 동생이 던진 물건을 얼떨결에 받고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시온이 퉁명하게 말했다.
“내가 은퇴하면 다시 내놔.”
시온은 그 말을 남긴 채 휙 돌아섰고, 하르딘은 그제야 힘없이 웃었다.
하르딘에게 시온은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는 형제이자 친구이며 동경의 대상이었다.
시온은 강했다. 의연하고 대범하며 또 오만하리만치 당당했다.
하르딘은 그보다 더 라우렐다운 라우렐은 없으리라 생각했고, 마치 태양처럼 눈부신 그를 질투하기보다는 사랑했다.
시온 역시 자신의 찬란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경계로 향해야 하는 운명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인정하면서,
나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시건방진 생각으로,
나의 근본이자 긍지인 라우렐의 영광을 위하여.
.
.
.
하지만 2년 후.
시온은 당당함도 긍지도 완전히 잃은 채, 형과 작별하던 그 순간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네세르와 열여섯 번째 교전을 마친 직후였다.
경계의 한복판에 선 시온은 넘실대는 혼란 속에서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아버님과 형에게 인사하고 라우렐 대공 성에서 나온 게 불과 며칠 전의 일 같았다.
그동안 아주 긴 꿈을 꾸다가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는 지난 2년간의 일을 모두 기억했다. 그러나 그건 다른 사람의 경험처럼 낯설었다.
멍하니 기억을 더듬던 시온의 옆구리로 싸늘한 감각이 스쳤다.
시온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미끈대는 감각에 당황했다.
흘러넘치도록 많은 피가 손바닥을 끈적하게 적셨다.
뭐지? 왜 이렇게 다쳤지? 대체 언제…….
자신이 피투성이인 걸 깨닫는 순간, 유예 중이던 고통이 단번에 그를 덮쳤다.
“아, 아악……!”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여태 잠들어 있던 감각이 깨어나 그의 전신을 잔혹하게 핥았다.
참다못한 시온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마저도 잔뜩 쉬어 비명조차 아닌 신음에 불과했다.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난 2년간 대수롭지 않게 넘긴 부상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온몸으로 아마네세르를 막고 그것이 잠든 사이 필사적으로 회복한 후 다시 전장에 나섰다.
개의 장난감이 되어 터지고 꿰매지길 반복하는 봉제 인형처럼.
그래서 시온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울부짖는 와중에 궁금해졌다.
나는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이렇게 엉망으로 뭉개지고 찢겨 나갔는데, 어떻게 아직 살아서…….
고통에 충격이 더해지자 돌연 숨이 막혔다.
호흡은 가쁜데 공기를 마실 수 없었고, 결국 눈앞이 까맣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진정하고 숨 쉬어.”
그때 누군가가 시온을 일으켜 세우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러곤 숨을 쉴 수 있게 그의 턱을 받쳐 주었다.
시온은 가까스로 다시 호흡했고, 어두워지던 시야도 곧 회복되었다.
겨우 진정한 시온은 자신을 일으킨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장신의 남자였다.
“넌 대체…….”
시온의 물음에 남자가 후드를 걷었다.
그리고 시온은 또 한 번 무너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
.
.
점성술사를 만난 그날 시온은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저주가 깨진 걸 눈치챈 대공은 바로 다음 날 그를 찾아왔다.
“오셨습니까?”
타르데스 전당의 총사령관실에서, 시온이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그때 그는 마치 왕좌를 차지한 사자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대공은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신음했다.
“어떻게 된 거냐, 왜…….”
“왜 제정신이냐, 뭐 이런 물음인가?”
아들이 아비의 의문을 가로챘다. 그러더니 싸늘히 웃으며 덧붙였다.
“변명부터 하십시오. 들을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그렇게 묻는 시온의 두 눈은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 싸늘한 분노에 대공은 무릎이 떨렸다.
시온은 어릴 때도 다루기 힘든 자식이었다. 지나치게 잘나서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인 반항적인 아들. 지배자의 기질을 짙게 이어받은 순혈의 라우렐.
그런 아들이 용을 대적할 힘까지 손에 넣고 살기를 드러내니 대공은 견딜 수 없이 두려워졌다.
“……나도 널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공의 권위도 아비의 체면도 버린 채 읍소했다.
“하지만 그건 가문의 숙명이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내 의무였다. 재앙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내하는 게 우리 라우렐의…….”
“정말?”
시온이 밝은 목소리로 아비의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아주 우습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피할 수 없는 일입니까? 아닐 텐데?”
재앙을 막는다는 거창한 허울과 달리 이제껏 시온을 포함한 라우렐 백작들이 한 일은 전략도 전술도 없이 몸으로만 때우는 형편없는 개싸움이었다.
라우렐이 장성한 아들 하나 굴려 연명하는 한미한 가문도 아니고, 의지만 있다면 훨씬 나은 방법을 얼마든 찾았을 거다.
그런데 이걸 숙명과 의무라는 말로 얼버무리다니.
시온은 무책임하다 못해 무성의한 아버지를 차갑게 비웃었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이 역할을 독점해야 하니 그런 거겠죠.”
유일무이한 대륙의 수호자. 재앙에 맞서는 고결한 라우렐.
이 얼마나 위대한 허상인지, 또 얼마나 저렴한 기만인지.
그렇게 세상을 다루기 위해 필요한 건 아들 하나.
그마저도 본처의 자식을 쓰는 건 안 내켜 밖에서 잘도 만들어 냈다.
어릴 땐 대공비를 그리도 아끼시는 아버님께서 왜 이런 실수를 하셨을까 싶었는데, 이마저도 지극한 사랑이었나.
제 가문의 역겨운 민낯에 시온의 기분은 엉망으로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시온은 그걸 숨기지 않았다.
이미 다 때려 부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는 중이었고, 자신을 철저히 기만하고 이용한 친부에게 이 이상 자비를 베풀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정말 환멸 나지만, 시온 역시 귀족이었다.
그 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자답게 선택하는 일이 익숙했다. 그래서 이 빌어먹을 상황도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이해하니까 기다린 거다.
친부가 뭐라고 변명하는지 들어는 보려고.
거기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 후 이 도살장 같은 경계의 구조를 뜯어고치려고.
물론 꼭두각시 노릇은 청산하고 친부에게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은 후에 말이다.
그런데 시온이 그리 좋은 아들이 아닌 것처럼, 시온의 아버지도 전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대공은 숨이 막히는지 비틀대며 창가로 걸어갔다.
시온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아들의 냉혹함과 거만함에 대공의 눈빛은 한층 더 음울해졌다.
이곳은 총사령관의 방답게 전망이 좋았다.
위로는 경계를 막아선 계곡이 절경을 이루었고, 아래로는 마침 적당한 높이였다.
대공은 그 사실에 안심하며 말했다.
“용서해라, 시온. 부디 이걸로 마음을 풀어다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아들이 보는 앞에서 투신했다.
.
.
.
선대 라우렐 대공은 그렇게 즉사했다.
다행히 시온이 괜한 의심을 사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럴 목적으로 온 건지, 대공의 서재에서 유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저주나 경계의 감시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적당한 핑계로 점철된 유서였고, 그래서 대공의 전당 방문은 그가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것으로 포장되었다.
최악에 최악을 경신한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고마운 점이 하나 있었다.
시온이 죄책감에 시달릴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대공이 추락하자 시온의 방으로 부사령관이 달려왔다.
그는 당연히 정황을 물었고, 시온은 충격 속에서 대답하려다가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황을 설명하려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글로 쓰는 것도 불가능했다. 에둘러 말하려 해도 이 사실을 타인에게 알리려는 의도를 품는 순간 모든 게 막혔다.
그래서 시온은 깨달았다.
자신에게 새로운 저주가 내린 것을.
사려 깊은 아버지가 자신을 마음 놓고 경멸하도록 배려해 주신 것도.
시온에겐 정말 미치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재갈이 물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게 벌써 5년 전이다.
시온은 자신의 허름한 책상에 턱을 괸 채, 어젯밤 이비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지금 백작님이 가진 저주는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게 하는 저주겠구나, 라고 추측하는 중이에요.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걸 간파하다니, 여태 알리고 싶어도 알릴 수 없어 혼자 이를 갈게 만들던 그걸.
그래서 시온은 이비에 대한 평가를 또 한 번 뒤집어야 했다.
그에게 이비의 첫인상은 그냥 예쁜 바보였고, 실체를 드러낸 후엔 교활한 기회주의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초조하게 창밖을 힐끗대던 시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멀리 햇살을 받으며 걸어오는 소녀가 보였다.
그가 이른 새벽부터 기다린 이비 아리아테였다.